# 41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41화>
그놈 한 놈이 다가 아니었나?
불길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는 문제.
별수 없이 나는 일행을 이끌고 빠르게 다른 곳의 철판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다음 철판도 이미 부서져 있었다.
혹시나 하고 확인해 보았지만, 나머지 모든 곳이 다 마찬가지였다.
붉은 옷을 입은 놈이 혼자서 모든 곳을 다 돌아다닐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상 말이 안 된다.
결국 남아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그럼 설마, 여러 명이 동시에 철판을 부순 건가?’
만약 내 가정이 맞아 들어간다면, 비슷한 놈이 10명은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이쪽을 공격한 것도 아니니 무작정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놈이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한 것도 찜찜했다.
하지만 고개를 털어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다가 돌아온 몸이다.
이 정도 일에 흔들릴 생각은 없다.
‘상관없다. 놈이 적이면, 놈도 처치한다. 수가 많으면, 하나씩 잡아먹고 힘을 키우면 그만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다음 계획을 성공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일행을 데리고 수도 밖 평원으로 향했다.
근처에 다가가자 전장의 향기가 느껴졌다.
폭음과 비명, 피 냄새가 뒤섞여 흘러들어왔다.
평원 옆에 위치한 작은 언덕에서 전황을 살피기로 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차원문.
시커먼 구멍 안쪽으로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차원문 옆에는 암흑 사제들이 잔뜩 달라붙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역시 철판은 기운을 증폭시켜 문을 여는 열쇠였군.’
그리고 사제들은 주위로 모인 죽음의 기운을 차원문에 주입하는 역할이었다.
‘한번 열린 차원문은 힘을 빨아들여 더 커지겠지.’
결국 차원문을 키워 마왕의 본체를 불러들이는 것이 놈들의 계획이었다.
사제들이 위치한 곳 바깥쪽에는 장로들이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아직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군.’
장로들은 전방으로 나서지 않고 지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바깥으로 어보미네이션 떼가 몰려 있었다. 하나같이 피부색이 시커먼 개량형.
“으으, 엄청 많다.”
옆 나무에 따라 올라온 루스가 진저리치며 말했다.
“그래, 많기도 많구나.”
수도 바로 앞에서 덤벼드는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어보미네이션에 비해 암흑 기사는 많지 않았다.
살아서 싸우고 있는 암흑 기사보다, 오히려 시체가 되어 있는 쪽이 훨씬 많아 보였다.
그 광경을 보다가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일부러 죽게 내버려 둔 건가?’
암흑 교단은 죽음의 기운을 모으기 위해 암흑 기사조차 희생시켜 버린 것 같았다.
나는 꺼림칙한 마음을 다잡고 반대편을 보았다.
그쪽에는 제국 측의 병력이 보였다.
가장 전방에는 마스터들이 어보미네이션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바로 뒤로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마스터들의 싸움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대로 키우던 플레이어들은 다 죽어 버린 건가?’
생각보다 강해 보이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플레이어 바깥쪽에는 제국의 병사들이 평원을 반쯤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수많은 병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마수들이 제법 튀어나왔었나 보군.’
차원문에서는 마왕의 화신이 나오기 전에 마수들이 먼저 튀어나온다.
마수는 어둠의 기운을 뿌리는 암흑 교도는 건드리지 않고 제국 병력만 공격한다.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앞에서 막지만, 마수는 때때로 포위망을 벗어나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마수가 수도로 들어가게 둘 수도 없으니, 병사들은 피할 수도 없겠군.’
그러니 마수가 뒤로 뚫고 나올 때마다,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가는 것이다.
혀를 차며 계속해서 주위를 살피자, 멀리 스탄 백작가의 깃발이 보였다.
반대쪽에 드레오스 후작의 깃발도 보였다.
문득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흐음, 후작은 과연 무슨 속셈일까? 아직까지 제국 쪽에 붙어 있다니…….’
이미 전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계속 정체를 숨기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읕 텐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 행동 방향을 정했다.
“일단 백작 쪽에 합류하자.”
전장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을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가까이 있어야 빠르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그러니 백작의 병사들 틈에 섞여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움직이면 된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일행을 이끌고 백작의 진영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막사 안에서 백작과 만날 수 있었다.
“오, 자네 왔는가? 수도 내부는 좀 어떤가?”
백작이 반갑게 맞이하며 내게 물어 왔다.
“강한 몬스터들은 대부분 처리했습니다. 노르트인들이 있으니 머지않아 정리될 겁니다.”
내 대답에 백작이 안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거 정말 다행이군. 자네가 없었으면 끔찍한 피해가 생겼을 거야. 제국의 귀족으로 감사를 표하겠네. 고맙네.”
백작이 고개 숙여 감사했다.
제법 예의도 바르고 괜찮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황제에게 칼을 겨누는 순간 끝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사로 누군가 들어왔다.
“백작님, 다녀왔습니다.”
그는 두꺼운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이쪽을 흘끔 쳐다보는데, 표정이 썩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때 백작이 기사에게 말했다.
“앨번, 왔는가? 잘되었군. 둘이 초면이니 인사하게. 이쪽이 정해수 플레이어네.”
그러더니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나의 기사 앨번이네. 수도 밖에서 병력을 지휘하느라 자네와는 초면이겠군. 서로 인사 나누게.”
40대쯤으로 보이는 완고한 인상의 남자는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 이쪽을 쳐다봤다.
내가 그에게 먼저 인사했다.
“정해수입니다. 이쪽은 제 동료들입니다.”
“앨번이다.”
그는 짧게 이름만 말했다.
그러더니 백작을 보며 말을 시작했다.
“마수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막지 못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병력의 피해가 너무 심합니다.”
“다른 가문의 사병과 황가의 병력은 어찌하고 있나?”
“다들 동원되어 있습니다만, 마수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기사와 병사들의 피해가 큽니다.”
“으음.”
백작은 뾰족한 수가 없는지 침음만 흘렸다.
“저희가 좀 나가 볼까요?”
내가 백작에게 슬쩍 말을 건네었다.
애초에 막사 안에만 있으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차원문을 주시할 수 있는 위치에서, 크게 힘 빼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마수를 잡으면, 의도에 맞게 움직이면서 스탯도 흡수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고민하던 백작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 자네가 나서 준다면 더 좋을 수가 없지.”
백작이 막 반색을 하는데, 앨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 말도 안 됩니다. 마수는 플레이어 두어 명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자의 목숨만이 아니라 우리 병사들의 목숨까지 걸린 일입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표정이 영 껄끄럽더니, 그는 이쪽이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뭐, 웬만한 플레이어만 봤으면 인상이 썩 안 좋을 수도 있겠지.’
진형기의 손에 죽은 여자나 보리스 같은 놈들이 제국의 주 육성 대상이었다.
게다가 귀족에 들러붙어 알랑거리던 안토니의 경우도 있고.
앨번이 그런 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면, 지금의 태도를 영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그때 백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정해수 플레이어는 다른 자들과는 다르네. 걱정 말게, 앨번.”
백작이 한동안 앨번을 달래 밖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나를 보며 말했다.
“수도에 와서 몇몇 플레이어들과 좀 마찰이 있었다네. 연회에서 본 그런 자들 말이네. 그러니 자네가 좀 이해해 주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나는 백작에게 별거 아니라는 태도로 대답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나도 지휘부에 가서 대책을 좀 더 논의해 봐야 되겠군.”
백작과의 대화를 마치고 막사에서 나온 나는 일행을 이끌고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 주위에 시체가 즐비했다. 대부분 일반 병사와 기사들.
‘차원문에서 갈수록 더 강한 마수들이 튀어나올 텐데.’
회귀 전 나는 뒤쪽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래서 병사의 피해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게 썩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마 이것도 암흑 교단이 의도한 것이겠지.’
차원문은 병사들의 죽음을 빨아먹고 크기를 더욱 키워 갈 것이다.
그때, 멀리서 병사들이 마수와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은 무작정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대부분 죽어 갔다.
‘어처구니가 없군.’
병사들을 저렇게 의미 없이 소모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마스터가 지원을 올 때까지 버티며 시간을 끌어야 한다.
‘지휘관이 누구기에 저딴 식으로 병력을 내모는 거지?’
이해 안 되는 병력 운용에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먼발치에 낯익은 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후작!’
놈이 병사들을 닦달해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니 후작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을 죽여 차원문에 기운을 공급하려는 속셈이었군.’
그때 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저기 뭐가 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멀리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쿠우우우-
한 마리 마수가 병사들 쪽으로 질주해 왔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몸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덤프트럭만 한 황소. 고르곤이었다.
놈은 입에서 연신 김을 뿜으며 병사들을 들이받고 있었다.
쾅-
그때 누군가 고르곤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꺼운 판금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기사, 그는 백작의 수하인 앨번이었다.
하지만 마수를 막은 앨번의 방패가 움푹 찌그러져 있었다.
고르곤의 힘을 견뎌 내지 못한 것이다.
투구 아래로 핏기도 살짝 보였다.
그는 단 한 번의 충돌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때 휴고가 옆에서 물어 왔다.
“대장, 도와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어떻게 할까?’
백작의 수하라 그냥 죽게 두긴 좀 꺼림칙했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적극적으로 구해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고민하는 중에 번뜩하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계획대로만 되면 기분도 좋고, 이득도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되었군. 너흰 멀찍이 따라와라.”
나는 일행에게 말하고 고르곤 쪽으로 달려갔다.
고르곤은 막 앨번을 다시 들이받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끼어들며 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쾅-!
강기공에 둘러싸인 발길질에 고르곤이 옆으로 주르륵 밀렸다.
나는 그 틈에 앨번에게 외쳤다.
“빠지세요! 병력도 물리고.”
앨번의 투구 사이로 크게 떠진 눈이 보였다.
내 실력에 놀라고, 구해 준 것에도 놀란 것 같았다.
“고, 고맙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숙인 앨번이 얼른 움직였다.
언행이 공손해진 것을 보니, 영 꼬인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앨번이 병사들을 지휘해 고르곤 주위에서 물러났다.
그때 고르곤이 내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좀 더 자극해야 하겠지?’
내 양손에서 촘촘한 밀도의 오러가 팔이 늘어난 것처럼 뻗어 나왔다. 강기공의 효용이었다.
나는 양손의 오러를 고르곤의 대가리를 향해 휘둘렀다.
성난 고르곤이 그대로 이마를 앞세워 돌진해 왔다.
강기와 고르곤의 이마가 충돌했다.
콰쾅-!
폭음과 함께 고르곤의 머리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하지만 놈의 몸은 여전히 돌진 상태.
나는 얼른 옆으로 이동하며 놈의 돌진을 피해 내었다.
그 후 스쳐 지나간 놈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순간 고르곤의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양손의 강기를 놈에게 휘둘렀다.
목표는 꼬리 아래 은밀한 곳.
‘마수한테도 통할까?’
짧게 생각하는 사이 공격이 명중했다.
콰콰쾅-
날아간 양손의 강기가 꼬리 아래 민감한 부위에 명중했다.
꾸어어어어어-!
순간 고르곤이 처절한 비명을 내뱉었다.
잠시 멈춰 있던 놈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코에서 시퍼런 콧김이 뿜어지고,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통하는구나! 새로운 걸 하나 배웠군.’
이제 슬슬 준비가 끝났다.
슬쩍 고개를 돌려 먼발치를 살폈다.
후작은 여전히 병력을 갈아 넣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고르곤이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앨번이 열심히 지휘한 덕인지 주변에 병사는 없었다.
텅 빈 공간을 마수를 끌고 미친 듯이 질주했다.
저 멀리 목표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있나 한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