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35화>
크리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가 말이 없자 좌중이 웅성거렸다.
그를 알아차린 크리스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 괴물을 처치하고, 괴물을 부리던 암흑 교단의 장로까지 처치했더군요. 우리 쪽 병력이 전멸한 상황이니 분명 제삼자의 개입이 있었던 거지요.”
크리스의 눈은 똑바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암흑 교단을 적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 명의 마스터와 수백 명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장로 하나를 잡는 거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병력은 전멸했고, 장로도 사실 외부인에 의해 죽었다고 봐야지요.”
장내는 이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해 있었다.
크리스의 말이 이어졌다.
“적은 강합니다. 게다가 놈들이 꾸미는 짓이 이루어질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서로 다른 입장은 잠시 내려놓고, 오늘은 재앙에 대처할 방안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크리스가 단상을 내려갔다.
이제 연회는 자유롭게 진행된다.
연회에서 정보와 의견을 교류한 후 정식 회의가 며칠 내로 다시 이루어질 것이다.
단상을 내려온 크리스가 곧바로 나에게 다가왔다.
‘쯧. 하필 앞쪽에 앉아서는…….’
괜히 자리를 선택한 백작을 원망하는 순간 크리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또 보는군. 자네 이름이 아마 정해수지?”
저번에 만났을 때 이름을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나에 대해 따로 조사를 한 것 같았다.
“예, 또 뵙는군요. 근데 무슨 일이신지? 제가 맡은 일이 있어서 좀…….”
오늘은 명분상 호위 역으로 따라온 것. 임무가 있어 대화를 나누기 힘들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크리스가 백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탄 백작님, 오랜만이군요. 잠시 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둘은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백작은 내가 썩 내켜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거절할 만한 명분이 없었는지, 백작이 미안하다는 눈빛을 내 쪽에 보내더니 크리스에게 말했다.
“으음, 너무 길게 시간을 빼앗지는 말게. 어디 데려가지도 말고.”
수락이 떨어지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가 바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그날 보리스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네. 장로를 잡으러 오라고 했었지.”
내가 말없이 듣고 있자 크리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장로와 싸울 때 자네의 모습을 보지 못했네. 혹시 자네도 그때 그곳에 있었나?”
나는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저는 수련을 위해 던전에 있었습니다. 장로를 잡는 것은 역부족이라 먼 훗날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근데 벌써 장로를 잡을 모양이군요. 대단하십니다.”
크리스의 눈빛이 심유해졌다.
“좀 전에 듣지 않았나? 제삼자가 있었네. 장로는 그가 잡은 거지. 그리고 난 그게 자네라고 생각하고 있네.”
‘갑자기 돌직구로군.’
나는 표정을 잘 관리하며 대꾸했다.
“저 같은 일개 플레이어가 장로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스터 여러분이 가셔서도 고생하신 일을 제가 할 수는 없지요.”
크리스는 한동안 말없이 내 눈을 쳐다봤다.
나도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자네가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군. 그럼 전에 한 번 했던 말이지만 다시 하도록 하지. 이쪽으로 오게. 대우는 내가 약속하지.”
“죄송합니다만, 대답은 같습니다. 딱히 누구 밑에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거절하자 크리스는 생각이 많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크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재앙이야말로 최악의 적이네. 그걸 잊지 말게!”
단호하게 말한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한쪽 소매가 허전하게 나부꼈다.
크리스의 등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한 말처럼 재앙은 진짜 최악의 적이다. 직접 본 감상이니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재앙을 막는 것보다도 우선하는 일이 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코 내 목표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의지 견정한 크리스와 비열한 황제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흠, 흠. 자네, 괜찮나?”
내 표정도 심상치 않았는지 백작이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습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어차피 재앙이 눈앞이야.”
백작의 말대로 재앙이 머지않았다. 분명 무언가 일어날 테고, 그 가운데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는데, 이번에는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탄 백작, 어찌 혼자 오셨소? 그렇게 늘 혼자 다니니 세상만사에 뒤처지는 것 아니오?”
돌아보니 드레오스 후작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드레오스 후작님, 제 걱정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이것저것 달고 다니시니 매번 늦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답하는 백작의 목소리에도 날이 서 있었다. 아마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늦는 것은 오히려 백작, 당신이겠지. 호위 역이라고 데려온 것이 고작 플레이어 하나요? 거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몰라도 어찌 저리 모르는지.”
갑자기 내 쪽으로 주제가 옮겨졌다.
무슨 소린가 하고 둘러보니 후작 쪽에는 플레이어 여럿이 붙어 있었다.
아마 후작 파벌 귀족의 호위 역으로 플레이어를 잔뜩 끌고 온 듯했다.
‘괜히 귀찮게 굴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나는 지금 크리스 때문에 신경이 살짝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인지라,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쪽을 살피는 것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후작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디서 플레이어랍시고 한 명 데려온 모양인데, 겉만 멀쩡하면 뭘 하겠소? 솜씨가 있어야지. 쯧쯧.”
왜 갑자기 이쪽을 걸고넘어지는지 의아했다.
‘그냥 백작과 사이가 나빠서 그런 건가? 그걸 나한테 푸는 거고?’
짐작 가는 바라고는 그뿐이었기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쪽도 역시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여기 정해수 플레이어야말로 최강의 플레이어입니다. 후작님이 데리고 있는 자들 다 합쳐도 이 친구 하나만 못할 겁니다.”
그러자 후작이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
“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처음 보는 것을 보니 본국 소속도 아닌 것 같은데. 방금 한 말 책임질 수 있소?”
“무슨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까? 제 생각을 말한 것뿐입니다만.”
“이제 와서 빼는 거요? 그럴 거면 큰소리치질 말았어야지.”
후작과 백작의 다툼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후작은 계속 내 실력에 대해 꼬투리를 잡았고, 백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매우 수상했다.
‘이상한데, 왜 굳이 내게 저렇게 집착하는 거지?’
후작은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졌고, 상황은 차츰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 *
연회장 중앙의 테이블이 치워졌다.
둥그렇게 비워진 가운데 공간을 두고, 주위로 구경꾼들이 둘러섰다.
그리고 그 한쪽에 내가 서 있었다.
‘귀찮은 일을 벌이는군.’
괜히 찾아와 시비를 건 드레오스를 흘끔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내게 억지로 싸움을 강요하는 듯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맞은편에는 후작이 데려온 플레이어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다들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상태.
그중 안토니의 표정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이번에는 전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안토니는 잔뜩 기가 살았다.
그러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안토니는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때 드레오스 파벌의 귀족 중 한 놈이 나와 사회를 보았다.
“자, 자, 여러분 플레이어들 간의 대련이오. 저쪽 플레이어가 자칭 최강이라고 하니 솜씨를 한번 봅시다!”
후작 파벌은 나를 시종일관 조롱하고 비웃고 있었다.
주위에서도 환호와 비웃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이해 안 되는 상황이 계속되자 나는 슬슬 짜증이 났다.
그때, 멀리 엄지를 척 하고 올린 넬도르와 닭다리를 척하고 올린 루스가 보였다.
‘거참, 속 편해서 좋겠군.’
그들을 보자 마음이 그나마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기왕 이리된 것, 빠르게 끝내자.’
어찌 보면 크리스를 만나고 찜찜했던 기분을 날려 버릴 기회이기도 했다.
그때, 사회를 보던 놈이 말을 걸어왔다.
“이봐, 자네. 방식은 어떻게 하겠나? 자네가 최강이니 한 명씩 싸우면 다 이기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나중에 체력이 어쨌다느니 그런 소리 하면 안 되네. 애초에 한 명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놈이 실컷 비웃으며 떠들어 대었다.
맞은편에 서 있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조용히 내뱉었다.
“귀찮으니 한꺼번에 덤벼라.”
내 목소리가 크게 퍼져 나가자 주위가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소란이 일어났다.
“오오! 패기가 좋군. 저 정도는 되어야 최강이란 소릴 할 수 있지!”
“제정신이 아닌 거 같은데?”
환호와 야유가 뒤섞였다. 그때 맞은편의 플레이어들이 나섰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그중 한 놈이 칼을 뽑아 들며 내게 다가섰다.
놈에게 한 번 더 얘기해 줬다.
“한꺼번에 오라니까? 후회하지 말고.”
“닥쳐라!”
놈이 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나는 왼손에 강기를 끌어 올려 놈의 칼을 밀어내었다.
캉-
“어, 어?”
칼이 맨손에 막히자 놈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눈앞에 놈의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그곳을 후려쳤다. 대번에 놈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드득-
갈비뼈가 부서져 내장을 찔렀는지, 놈은 입으로 피를 흘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한 놈이 단번에 심한 부상을 입자 놈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좌중에 살기와 긴장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곧 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나도 강기공을 몸에 두르고 맞서 나갔다.
놈들의 공격 중 일부는 피하고 나머지는 그냥 맞았다. 놈들의 공격은 강기공을 뚫지 못할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약하다.’
너무 쉽다. 이대로는 분풀이도 되지 않는다.
나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강기공에 의해 밀도 높은 오러 소드가 형성되었다.
한 놈당 한 칼씩. 오른쪽 팔을 목표로 칼을 휘둘렀다.
예상대로 두 번은 필요 없었다.
서걱- 서걱-
몇 번의 절삭음이 들린 후, 놈들의 팔이 모조리 바닥에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목을 따 버리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앞으로의 행동에 제약이 될 수 있다.
대신에 오러를 난폭하게 움직여 팔의 절단면을 짓이겨 버렸다.
깔끔하게 잘라 낼 경우 표션과 치료 마법에 의해 회복이 쉽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분 나쁘게 굴던 안토니는 좀 더 심하게 해 주었다.
그러고 나자 기분이 좀 풀렸다.
팔이 잘린 놈들이 오른팔을 움켜쥔 채 바닥을 뒹굴었다.
“크아악. 내 팔!”
놈들의 비명이 연회장을 울렸다.
“빠, 빨리 치료 마법을, 사제를 불러와라!”
후작 파벌은 사제를 찾느라 난리가 났다.
반면 스탄 백작은 거보라는 듯 어깨를 펴고 있었다.
그리고 드레오스 후작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눈은 뱀같이 번들거렸다.
잠시 백작을 노려보던 후작이 이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네…… 참 대단하군, 대단해.”
말은 칭찬이었지만,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내가 가만히 있자 후작이 주위를 향해 말을 이었다.
“진짜 최강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솜씨인 것은 맞는 듯하군. 그런데 싸움이 너무 싱겁게 끝나 버려서, 이대로는 영 재미가 없지 않소, 여러분?”
주위에서 대번에 호응이 일었다.
“맞다. 싱겁다. 아무나 또 나서라!”
몇몇 생각 없고 호전적인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순간 후작의 의도가 느껴졌다.
‘계속 내게 싸움을 시키려 드는군.’
생각 중에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인데, 내 기사와 한 번 더 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질문의 대상은 나였지만, 후작의 말은 주위를 향하고 있었다.
“오오! 좋다. 이제 좀 볼만하겠군!”
“싸워라!”
이미 한 번 피를 보자 다들 흥분한 것인지, 대번에 호응이 일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생각해도 후작의 태도가 이상했다.
‘아까도 그렇고, 정말이지 이상할 정도로 내게 집착하는군.’
나는 가만히 후작을 쳐다봤다. 뱀 같은 눈이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단순히 백작과의 원한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때 백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겠나? 저쪽 기사에 대한 정보가 없네. 처음 보는 자야.”
언뜻 보니 날카로운 눈을 가진 매부리코의 기사가 후작 옆에 서 있었다.
기사치고 상당히 마른 몸매에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놈은 전투를 준비하는지 벌써부터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백작에게 나직이 말했다.
“별 상관은 없습니다. 근데…… 죽여도 되겠습니까?”
저쪽에서 이상할 정도로 계속 시비를 걸어왔다. 이유를 알려면 후작을 한 번 흔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한 놈쯤 죽여 보면, 뭐든 행동에 변화가 생기겠지.’
그러면 후작의 의도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으음, 저쪽이 계속 억지를 부린 상황이니 괜찮을 걸세. 자네가 탈이 나는 것보다는 낫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마음대로 하게.”
백작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따지고 보면 본인 때문에 생긴 일이니,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었다.
‘잘되었군.’
그때 기사가 칼을 뽑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도네센이라고 하네. 잘 가게.”
그러고는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검을 휘둘러 왔다.
‘누가 갈지는 두고 보자고.’
나는 그에 맞서며 단검을 휘둘렀다.
쾅-
오러 소드가 맞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