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31화>
[브레인 워시(S. 반지)]
- 암흑 교단이 마왕의 성물을 이용해 만든 반지. 키메라나 마수를 조종하고, 요인을 세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의 대상을 세뇌할 수 있다. 대상의 지능이 낮을수록, 정신 상태가 혼미할수록 세뇌가 성공할 확률이 증가한다.
“그놈을 부리는 데 쓰는 반지였군.”
“주인! 저 자식 아직 살아 있어.”
그때 루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루스가 가리킨 곳을 보니 바간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다 쓰러진 채 이쪽을 쳐다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놈이 피 흘리며 스러져 있는 것이 만족스럽다.
즉사하지 않고, 잠시라도 더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 기꺼웠다.
그래도 계속 저대로 둘 수는 없다. 굳이 변수를 더할 필요는 없으니까.
멸세폭의 반동으로 움직이기 힘든 상태만 아니면 다가가서 비웃어 줄 텐데.
어쩔 수 없이 루스에게 바간을 마무리하라고 하려다, 손에 들린 반지에 생각이 미쳤다.
‘이걸 쓰면 놈에게서 정보를 캘 수 있지 않을까?’
그대로 둬도 바간이 살아날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포션을 퍼부어 최대한 빠르게 몸을 회복시켰다.
얼마 후 몸이 겨우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바간은 그때까지 숨이 붙어 있었다.
그에 브레인 워시를 손에 끼고 바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바간의 얼굴이 꿈틀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왜 너를 죽이려 드는지 궁금하나?”
바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입술이 살짝 떨어졌지만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놈이 괴롭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니 다친 몸이 다 나은 것 같았다.
더 약 올려 주고 싶지만, 이대로 두면 곧 죽을 것 같았기에 얼른 브레인 워시를 발동시켰다.
마나를 주입하자 반지가 현란한 빛깔의 광선을 내뿜었다.
빛은 바간의 눈으로 쏘아져 갔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니……. 잘 되겠지?’
정신이 혼미할수록 성공률이 오른다고 했던 걸 떠올리며 나는 내심 성공을 기대했다.
잠시 후, 놈의 눈동자가 변했다. 동공에 초점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더니 흰자위가 일곱까지 색으로 차례대로 바뀌어 갔다.
잠시 후, 바간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성공이야, 실패야?”
써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다. 얼른 맥을 짚어 보니 아직 살아는 있었다.
“주인, 일단 포션 먹이자. 일어나도 이길 수 있어!”
내가 당황한 듯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루스가 말을 걸어왔다. 가만 생각하니 녀석의 말이 맞았다.
루스는 몸이 거의 멀쩡하고, 나도 작정하면 멸세폭 한방 정도는 더 쓸 수 있다. 원혼의 거울도 쓸 수 있고.
이 정도 전력이라면 바간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도 무서울 것이 없다.
결정한 즉시 포션을 꺼내 바간의 입에 흘려 넣었다. 그리고 멸세폭을 맞은 놈의 상처에도 뿌렸다.
상세가 워낙 중해 이 정도로 완전히 살아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포션의 효과로 바간의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그를 확인한 나는 놈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짝, 짝, 짝-
몇 번이고 따귀를 치자 바간이 눈을 떴다.
“마……스터.”
말하기가 쉽지 않은지, 거친 음성이 바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놈은 나를 여전히 마스터라 불렀다.
‘성공한 건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질문을 해 보면 놈의 상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간, 네 목적이 뭐지?”
“재앙……을 막는 것……입니다.”
순순히 대답을 하는 것이, 일단 세뇌가 되긴 한 것 같았다.
놈들의 비밀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 왔다.
흥분되자 말이 저절로 쏟아졌다.
“네놈들은 도대체 뭐지!? 황제와는 무슨 관계냐? 왜 날 배신한 거냐고!”
목소리가 건물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바간의 입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말해라! 빨리 진실을 토해 내라!’
“저……는 소환…… 전용으로 생…… 커억.”
대답을 하던 바간의 숨이 갑자기 멈췄다.
눈알이 뒤집어지고 고개가 떨어졌다.
파삭-
순간, 손에 낀 브레인 워시가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간! 바간! 말을 해라, 말해!”
놈의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대로 숨이 넘어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죽지 마라! 이 개자식아. 말을 하고 죽으란 말이다!”
속에서 천불이 치솟아 올랐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다.
짝, 짜악-!
바간의 뺨을 연이어 후려쳤다. 어떻게든 놈의 정신을 돌려서 말을 들어야 한다.
그때, 놈이 눈을 떴다.
정전되었다가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눈동자가 깜빡였다.
그러더니 놈의 입이 열렸다.
“마……스터,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
하지만 무언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 부팅한 로봇이 저렇지 않을까 싶은 목소리.
아니, 그보다 좀 더 자연스럽긴 했지만, 꼭 네비게이션의 안내 음성 같았다.
“바간, 네놈은 뭐냐?”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며 질문을 던졌다.
“저는 마스……터의 소환 전용 S급 영웅, 발라딕 바간입……니다. 클래스는 일인성채, 전위에서 활약하……는 것이 저의 주 임무입니다.”
가슴이 철렁한다.
잠깐 떠올랐던 좋지 못한 예감이 맞아 들어간 느낌.
“황제와 너희 소환 영웅들과는 무슨 관계지?”
“저의 임무는 오로……지 마스터를 돕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답답했다. 무언가 실마리를 잡을 뻔했는데, 그것이 눈앞에서 뚝 끊어진 것 같았다.
이런 상태면 더 이상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다급한 마음에 놈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발라딕 바간(S. 일인성채)]
- 충성도 : 100(충성도가 낮으면 배신할 수 있습니다.)
상태창은 전혀 변동이 없었다.
충성도는 이미 진작 100이 된 상태였고, 놈을 공격했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갔음에도 혼란은 여전했다.
속에서 계속 화가 솟구쳤다. 그때 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곧 죽을 것 같아.”
바간의 숨이 간당간당했다. 이대로 자연히 죽게 두는 것은 놈에게 너무 관대한 일이다.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이 말했다.
“네놈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내가 다 부숴 버릴 거다!”
푹- 푹- 푹-
그렇게 몇 번이고 놈의 몸을 찔렀다.
“끄어억…….”
바간의 입에서 기어코 비명이 새어 나왔다.
머지않아 놈의 흐릿한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놈의 목을 벤 후.
퍽-
머리를 밟아 터트려 버렸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군.”
포이즈너나 마위니를 죽였을 때처럼, 미친 듯이 흥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답답하던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물론 이런 식으로 끝낼 생각은 더 이상 없다.
‘이제 놈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귀 직후 가졌던 분노가 응어리지며 가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대신 놈들에 대한 의문이 겉으로 떠올랐다.
‘놈들의 의도를 알아내고, 부숴 버린다.’
물론 놈들을 죽이는 일도 당연히 빼먹을 수 없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부상이 없는 루스가 심심했는지 주위를 돌아다니다 발코니로 다가갔다.
조금 있으니 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주인! 밖에 커다란 게 있어!”
알고 있다. 회귀 전에도 본 적이 있으니까.
아마 장로가 죽고 반지도 부서졌으니 세뇌도 풀렸을 터.
장로가 소환한 괴물이 거대한 몸으로 난동으로 부리고 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하니 반지가 아깝군.’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별 소득 없이 부서져 버렸다.
세뇌가 풀리면서 부서진 것일까?
‘석연치 않아.’
궁금한 것이 많았다.
황제를 족치면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었다.
‘계획대로만 풀리면, 재앙이 끝나고 황제를 칠 수 있다.’
“아하하, 잘 싸운다.”
마음을 다잡는데, 루스가 남의 싸움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발코니로 갔다. 밖은 예상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몸집의 괴물이었다.
‘만티코어.’
인간의 얼굴에 사자의 몸통, 전갈의 꼬리에 날개까지 달린 괴물.
놈은 제국의 마스터에 맞서 날뛰고 있었다.
세뇌가 풀리면서 적아가 완전히 사라졌는지, 근처의 인간은 모조리 공격 중이었다.
대단한 괴물이지만, 언뜻 봐도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미 이곳저곳 썩어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한 모습.
무언가 연구를 하다가 실패를 한 것이 분명했다.
‘땅에 파묻어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어쨌든 만티코어의 상태가 좋지 않은 덕에 제국 측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다.
쌍둥이 마스터 중 크리스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크로스와 창술사 브레니 쉴즈가 만티코어와 싸우고 있었다.
이미 일반 병력과 플레이어들은 몰살당한 듯 보였다.
‘보리스 놈은 어디 있나?’
주위를 둘러보다 결국 보리스를 찾지 못한 나는 루스를 불렀다.
“루스, 저번에 봤던 덩치 큰 놈 기억나? 보리스 말이야. 그놈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봐.”
“아, 그 멍청이? 알았어, 잠깐만.”
루스가 잠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내 한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어, 근데 피가 너무 많아서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어.”
“잘했다. 방향만 알면 돼.”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 보리스를 굳이 지금 찾아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 후 발코니에 자리 잡고 싸움을 구경했다.
‘조금만 있으면 밥상이 잘 차려지겠군.’
역시 재료가 좋으니 좋은 요리가 만들어진다.
만티코어와 제국 마스터들의 싸움은 머지않아 클라이맥스로 진입할 것이다.
그때까지 몸을 더 회복한 후 내려가면 된다.
“대장,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기다시피 다가온 휴고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다. 네 몸이나 얼른 회복시켜라.”
녀석을 흘끗 본 나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녀석의 옆에 잔뜩 놓아 주었다.
휴고를 보자 고마운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했던 녀석과의 대화는, 설득이 아니었다.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녀석의 성정에 반하는 일을 강요했다. 나와의 인간 관계를 걸고.
‘결국…… 고마운 선택을 했구나, 휴고.’
휴고를 일행으로 받은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몸이 제법 회복되었다.
때맞추어 바깥의 전투도 격화되었다.
크로스가 만티코어의 앞발에 밟혀 죽어 버린 것이다.
그사이 쉴즈의 창이 만티코어의 머리에 박혔다.
하지만 쉴즈도 무사하지 못했다. 만티코어의 가시 달린 꼬리가 쉴즈의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배를 뚫고 들어가 등 뒤로 튀어나온 꼬리 끝에는 쉴즈의 몸 안에서 나온 것들이 걸려 있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얼른 가야겠군.”
녀석이 완전히 죽어 버리면 스탯을 흡수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휴고를 내버려 둔 채 루스와 함께 전장으로 향했다.
아래로 내려오자 아수라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피 냄새와 온갖 오물의 냄새, 그리고 죽음의 향기.
그것들을 뚫고 만티코어 쪽으로 다가갔다.
두개골을 꿰뚫은 창 때문에 놈의 숨이 간당간당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쉴즈를 먼저 살피기로 했다.
하지만.
“아쉽게 되었군.”
쉴즈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면 내 손에 죽어 주면 좋았을 것을.
타이밍이 살짝 늦은 것 같았다.
아쉽지만, 괜찮다. 이곳의 메인 디쉬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
나는 몸을 일으켜, 몸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고 있는 만티코어에게 다가갔다.
크르르
괴물은 괴물인지 그 상태에서도 위협적인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눈알만 번들거리고 있으니 가소롭기만 할 뿐이었다.
두개골에 꽂힌 창을 쥘 때까지도 놈은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창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안 그래도 치명상을 입었던 만티코어의 머릿속이 부서져 갔다.
놈의 몸이 몇 번 움찔했지만 반격을 가해 오지는 못했다.
쿠어어어-
결국 만티코어의 입에서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온몸으로 강력한 기운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하아-!”
절로 탄성이 터진다.
바간과 장로에 이어 만티코어까지 처치하자, 스탯이 치솟았다.
불과 몇 시간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맛집이야. 기다려서 먹을 가치가 있어.”
입에서 시답잖은 소리가 절로 흘러나올 만큼 큰 기운이었다.
“히잉…….”
옆을 보니 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답지 않게 시무룩한 모습.
“왜 그러냐?”
“이건…… 못 먹겠어. 안 좋은 게 너무 섞였어.”
뜻밖의 말이었다.
만티코어라면 루스에게 최고의 요리가 되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놈에게 섞인 나쁜 기운이 너무 강력한 모양이었다.
루스에게는 안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일단은 기분 나쁜 기운을 계속 내뿜는 사체를 처리하기로 했다.
“루스, 이놈 태워 버려라.”
“응! 먹지도 못하는데, 냄새 때문에 코가 썩겠어.”
루스가 불길을 일으켜 만티코어를 태워 버리는 것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이 자식이 어디 있나? 이쪽이라고 했는데.’
다음 맛집을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