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2화>
동굴을 나와 북쪽으로 2시간을 더 걸었다.
시작 지점을 한참 벗어난 상황이라 초반보다 강한 몬스터들이 출몰했다.
꾸에엑-!
오크들의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포이즈너의 독 안개가 주위를 휘감으며, 포위해 오던 오크들을 몰살시켰다.
이번 목표는 오크 족장이다. 네임드 몬스터답게 언뜻 보면 오우거로 헷갈릴 만큼 덩치가 컸다.
오크들을 100마리 이상 처치하는 것이 놈의 등장 조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100마리를 잡았는지 메시지가 들려왔다.
[오크를 100마리 이상 처치하셨습니다. 성난 오크 족장 자쿰이 출현합니다.]
쿠아아아-
포효가 숲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 나무 위로 삐죽 솟은 머리가 보였다.
입가에 길게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를 가진 녹색 근육질의 괴물. 놈이 자쿰이었다.
자쿰은 나무를 수수깡처럼 부러트리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손에 들린 전봇대만 한 방망이가 휘둘러지기 직전, 포이즈너의 손에서 몇 개의 플라스크가 날아갔다.
“이놈은 독 안개만으로는 처리하기 힘듭니다. 잠시 물러나 계시겠습니까, 마스터.”
명색이 네임드라 그런지 독 저항을 갖추고 있는 모양. 포이즈너가 물러날 것을 권해 왔다.
딱히 앞에 나설 이유도 없지.
나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 포이즈너와 자쿰의 싸움을 지켜봤다.
포이즈너의 손에서 날아간 플라스크가 터지며 검은 액체가 자쿰의 몸에 뿌려졌다.
자쿰의 피부가 여름철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도 쉽게 죽어 주지는 않을 모양인지 손에 들린 방망이로 포이즈너를 후려쳐 왔다.
포이즈너는 왼손을 들어 올리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앞에 반투명한 막이 생기며 자쿰의 방망이를 막아 냈다.
꽈아아앙-!
방망이와 방어막이 충돌하며 굉음이 울렸다.
멀리 떨어진 내 몸이 떨려 올 정도.
하지만 포이즈너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포이즈너가 뿌린 액체는 여전히 자쿰의 몸을 녹여 가고 있었고, 방어막은 굳건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몇 번이고 방망이를 내려치던 자쿰의 몸이 굳었다.
전신의 피부는 물론, 근육까지 녹아 버린 자쿰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내가 마무리하지.”
나는 짐짓 호기롭게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독이 묻을 수 있습니다. 이걸 복용하시지요.”
포이즈너가 내민 병에 든 하얀색 액체를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이것은 회귀 전 포이즈너가 독을 쓸 때마다 일행에게 먹도록 준 것으로, 그의 독에 대한 피해를 예방하는 약품이었다.
놈이 준 액체를 한 모금 마시고 품에 집어넣었다. 놈도 딱히 저지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도 쓸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크를 잡으며 획득했던 무딘 칼로 쓰러진 자쿰의 목을 베었다.
오는 길에 스탯이 상당히 올랐음에도 칼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을 도끼질하듯이 내려치고 나서야 자쿰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자쿰에게서 강력한 기운이 흘러들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나머지 네임드 2마리를 다 잡고 나서 승부를 건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아이템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시작 지점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 강력한 적들이 있다. 남, 서, 북쪽에는 네임드가, 동쪽에는 필드 보스가 존재한다.
다음 목표는 서쪽에 위치한 네임드. 놈을 잡으면 제법 괜찮은 무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서쪽으로 가지. 처음 있던 곳에서 서쪽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나는 포이즈너를 이끌고 다음 네임드를 향해 나아갔다.
가는 길에 역시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나도 앞장서 전투에 가담했다. 스탯도 상당히 올랐으니 몸을 좀 풀어 둘 필요가 있었다.
덤벼드는 리자드맨 무리를 처리한 후 포이즈너가 말을 걸어왔다.
“싸움에 능숙하시군요, 마스터.”
살짝 감탄한 듯한 말투. 하지만 놈의 감탄 따위는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고맙군. 당신에 비하면 하찮은 솜씨야.”
“아닙니다. 전투가 처음이신 걸 감안하면 굉장한 재능입니다. 마스터를 모시게 된 게 행운이군요.”
그 마음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방금 전의 대화로 충성도가 10 올랐다는 메시지가 떴다. 놈의 몸에 칼을 박아 넣은 순간이 더욱 기대되었다.
짧은 대화 후 걸음을 바삐 놀려 남서쪽으로 나아갔다. 리자드맨의 영역이라 그런지 그 후로도 꾸준히 리자드맨 무리의 습격이 있었다.
몇 번의 싸움을 반복하자 회귀 전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뛰어난 스킬이 없었지만, 높은 스탯을 바탕으로 스스로 익힌 체술과 검술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뀐 신체 스펙에 슬슬 적응되자 하나둘 기교를 실험해 봤다.
먼저 휘둘러 오는 리자드맨의 칼날을 슬쩍 걷어 올려 옆에 있는 리자드맨의 팔에 박아 준다.
그리고 동료의 팔에 검을 찔러 당황한 놈의 목에 찌르기를 넣고 재빨리 빠졌다.
초록색 체액이 목에서 뿜어져 나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적셨다.
팔에 부상을 당한 나머지 놈이 칼을 왼손에 바꿔 쥐고 휘둘러 왔다. 나는 칼끝을 맞부딪친 후 미끄러트려 칼을 쥔 놈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끄에에엑-!
신음을 흘리며 물러서는 놈에게 다가가며 이번에도 목젖을 찔러 들어갔다.
다시 한번 초록색 피가 뿜어지며 싸움이 마무리되었다.
포이즈너가 크게 뜬 눈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진짜 대단하시군요, 마스터.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자아졌다.
나 같은 놈은 주인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글쎄…….”
원한을 곱씹다 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짧게 대답해 준 후 목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충성도가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또 들려왔다. 이번에는 무려 20. 놈의 충성도는 벌써 80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떻게든 충성도 90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지난 생이 우습게 느껴졌다.
몇 번의 전투를 더 한 후 나와 포이즈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리자드맨의 부락.
저 안쪽에 보이는 가장 큰 집에 놈이 살고 있다.
“가지.”
포이즈너를 앞장세워 부락으로 진입한다.
이곳을 싹 쓸어버리고 네임드도 잡는다.
포이즈너의 독 안개는 다수를 상대할 때 효율적이다.
포이즈너의 손에서 연녹색 안개가 흘러나와 마을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언가 주문 같은 걸 외우자 확산 속도가 한결 빨라졌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온몸에 진물을 흘리며 집 밖으로 뛰어나오는 리자드맨들로 마을이 가득 찼다.
리자드맨들이 고통스럽게 녹아 갈 때, 멀리서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익, 쉬익-
시뻘건 눈으로 노려보며 입으로는 연신 위협적인 소리를 내뱉는 놈이 바로 이번 사냥의 목표였다.
[네임드 몬스터 스케라가 등장했습니다. 강력한 적입니다. 주의하세요.]
경고가 무색하게, 이번에도 싸움은 별다를 것 없이 전개되었다.
포이즈너의 플라스크가 날아가고, 화난 스케라가 포이즈너를 공격했다.
포이즈너가 시전한 방어막이 스케라의 공격을 막아 내고, 결국 스케라는 독에 몸이 녹아 쓰러졌다.
스케라가 죽은 자리에 아이템이 드롭되었다.
[검은 꼬리(D. 단검)]
-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 재질을 알 수 없다. 역방향으로 새겨진 비늘무늬 때문에 한 번 찔리면 뽑기 어렵다.
‘튜토리얼에서 얻을 수 있는 장비치고는 괜찮은 편이야.’
오크를 잡고 주워 쓰는 칼이 F급인 것을 생각하면 썩 훌륭한 무기였다.
‘저놈이랑 싸울 때 도움이 되겠군.’
포이즈너를 흘끔 보며 상상했다. 역방향의 비늘이 놈의 심장에 박히는 것을.
이제 두 번째 네임드도 잡았고, 마지막 하나만 남은 상태.
다음 번 싸움에서 포이즈너도 같이 처리한다.
슬슬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오늘은 리자드맨 부락 근처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잠자리를 준비해 놓고 요기를 위해 챙겨 온 리자드맨 고기를 불에 구우려 할 때였다.
“이거 좀 드시지요.”
포이즈너가 어디서 났는지 육포를 내밀고 있었다.
“고마워. 당신도 얼른 먹고 쉬어 둬. 내일은 인상 깊은 하루가 될 거야.”
“오늘도 마스터께 충분히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내일은 더 기대되는군요.”
놈이 준 육포를 씹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죽어도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 줄게. 기대해.’
* * *
포이즈너가 주위에 퍼트려 놓은 독 안개 때문인지 밤새 몬스터의 습격은 없었다.
푹 쉬고 일어나 오늘을 준비하고 싶었지만, 놈의 등에 칼을 꽂는 상상을 하느라 늦게 잠들었더니 몸이 개운하지 못했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으니 포이즈너가 육포를 가지고 다가왔다.
“지금은 이것밖에 드릴 게 없군요. 나중에 도시로 나가면 식량부터 마련해야겠습니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을 바라봤다.
놈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할수록 다가올 순간이 기대된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놈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져 얼른 육포를 받아 들었다.
“괜찮아. 당신 아니었으면 리자드맨 고기나 씹고 있었을 거야. 고마워.”
하지만 네가 이 튜로리얼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거야.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시작 지점의 남쪽, 지금 위치에서는 남동쪽에 있다.
방향을 잡은 나는 걸음을 옮겼다. 당연하게도 몬스터들이 습격해 왔다.
“사람은 처음에 처치한 놈을 제외하면 안 보이는군요.”
한동안 사람을 못 본 것이 의아한지 포이즈너가 물어 왔다.
“이곳은 튜토리얼 지역이야. 사람들은 대부분 시작 지점의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지.”
그리고 매일 저녁 오두막은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한다. 습격을 버텨 내고, 힘을 키워 동쪽에 있는 필드 보스를 잡는 것이 튜토리얼을 끝내는 방법이었다.
물론 나는 마을에서 사람들이랑 어울려 지낼 생각이 없다. 마을에도 용무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포이즈너를 처리한 후가 될 것이다.
덤벼 오는 몬스터들을 처치해 가며 남동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느 순간부터 주위엔 슬라임이 넘쳐 나고 있었다.
젤리처럼 생긴 이놈들은 살아 있는 것을 덮쳐서 통째로 녹여 버린다.
놈들에겐 물리 공격이 잘 통하지 않는다. 게임이나 만화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초보에겐 버거운 상대.
반면 스킬이 없어도 마력을 칼에 주입해 오러 소드를 만들 수 있는 나에게는 쉬운 생대였다.
하지만 포이즈너에게 이쪽의 전력을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 이번에는 나서지 않고 뒤따라 걷기만 했다.
끊임없이 덤벼드는 슬라임을 잡으며 숲 깊숙이 들어갔다.
[네임드 몬스터 슬라임 킹이 나타났습니다.]
멀리 집채만 한 덩어리가 보였다.
이번에도 포이즈너가 앞장섰다. 놈의 등을 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제 곧 때가 온다.
이윽고 포이즈너와 슬라임 킹이 싸우기 시작했다. 워낙 덩치가 크고 신체 기관이 따로 없어 무력화시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차분하게 때를 노린다. 놈이 가장 마음을 놓을 순간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핵이 파괴된 슬라임 킹의 몸이 액체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그 순간, 포이즈너의 방어막이 거두어졌다.
나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려 놈의 등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내 마력을 잔뜩 머금은 검은 꼬리는 단번에 놈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갔다.
“커억-!”
놈의 입에서 달콤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잠시 비명을 즐기는 순간, 놈의 몸에서 강력한 독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그 기운에 휩쓸린 몸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해독약은 놈이 슬라임 킹과 싸울 때 미리 마셔 둔 상황.
뒤로 밀려 뒹굴다가 몸을 일으키는 나를 보며 놈이 말했다.
“어, 어째서 이런 짓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나는 말없이 놈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어 주었다.
놈의 떨리던 눈이 어느 순간 날카롭게 빛나더니 무언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반격을 결심한 모양.
계속 두고 봐 줄 필요는 없다. 아직 진화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S급. 죽기 직전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호문쿨루스.’
놈의 뒤편을 보며 나는 놈에게서 훔친 스킬을 사용했다.
놈의 손에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어리는 순간, 등 뒤에 나타난 무언가가 심장에 박힌 단검을 비틀어 뽑아 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놈의 입과 심장에서 폭포수 같은 핏물이 토해져 나왔다. 손에 맺히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상태.
놈은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죽기 직전 내가 그랬듯이, 더 이상 말할 힘도 없어 보였다.
나는 빌어먹을 황제 놈이 했던 말을 포이즈너에게 들려 주었다.
“잘 가, 뒤는 걱정 말고.”
모조리 뒤따라 보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