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15 (fin.)
정령 소환.
이는 해당 정령과의 교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레고리 고국의 마셔스 수림에서 마주했던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
당시에는 그저 지식의 파편으로 존재하던 물의 이치가 어느새 론의 경험이 되고, 깨달음이 되자 이는 더 이상 지식의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지상계를 이루는 계(界)의 이치에 다다라 절로 정령왕 오비니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고, 이는 곧 교감 즉, 소환의 단초가 되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령왕의 소환.
그것이 실제 브래들리 후작성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그때 론은 잠시나마 오비니트의 의념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지상계의 근간이자 자연의 섭리인 물의 정령왕.
이 땅에서 고작 백 년 남짓의 생을 살다가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오비니트는 살리지 않겠지.’
상공에 떠오른 론이 아래 펼쳐진 경기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사로운 정이 아닌 오로지 조건 대 대가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정령왕인 만큼 인간의 희로애락은 그 법칙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고로, 그 결과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었다.
[론! 저기 저기!]
그 와중에 홍염이 다급히 아래를 가리켰는데, 론의 감각에도 익숙한 마기가 느껴졌다.
바로 반타 블랙.
브래들리 영지에서 제물소환진 못지않게 치가 떨리도록 경험했던 그것이 대형 경기장의 관중석 곳곳에 퍼져 있었다.
“하···!”
찰나에 드는 수많은 생각들.
허나 그 어디에도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리고 이내 곧 참상이 벌어지려던 순간,
화아아아앗.
론이 떠 있던 상공에 환한 빛이 번쩍였다.
‘일단 뭐라도!!’
신체를 광자화 하여 빛처럼 순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텔레포트.
이를 통해 론은 곧장 관중석의 한 마인 앞에 나타났고,
“뭐, 뭐야···?”
‘홍염!’
[응!]
화르르르륵.
홍염을 통해 마인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꺄아아아아악!!!”
“위험해!!”
“도, 도망쳐!!”
“살인범이오!! 여기 살인범이오!!!”
“경비병!! 경비병!!”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시엘, 미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새액?
텔레포트의 범위를 자신으로만 한정시켰고, 서둘러 다음 곳을 향해 몸을 틀었다.
화아아앗.
화르륵.
텔레포트와 멸마의 불꽃.
론과 홍염의 숨 막히는 투쟁이었으나, 기어코 모두를 막을 순 없었다.
“안돼!”
저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마인이 휘두르는 차가운 단검이 선연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단검의 목표는 역시나 평범한 사람.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었으면 모를까, 지금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수십 수백은 되는 듯 했다.
[론! 어떻게 해?!]
탄식을 뱉을 새도 없이 밀려오는 막막함.
‘없나? 정말, 정말 없는 건가···?’
생의 끝자락에 선 수많은 이들의 마나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명 한명이 세상 유일의 존재로 태어난 귀한 생명이건만, 바람 앞 등불처럼 그 존재가 흔들거렸다.
‘아···.’
사람이든 짐승이든 무엇이든 생명으로 태어나 단 한 번 느끼기에도 벅찬 경험이 론의 감각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왔다.
태어난 곳도, 자라온 환경도, 함께한 이들도, 보고 먹고 배우고 한 것들도 모두 다르기에 피어났던 고유의 마나들이 향하는 종착역.
죽음이었다.
이제껏 생사를 오가는 일이 많았던 론이었음에도 쉬이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운행이었다.
끝이 있기에 아쉬움이 있고, 그 아쉬움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생명이건만, 수많은 이들이 꼭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수백 년을 지나 수천 수만 년.
이 땅이 지어지기 시작한 태초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호흡.
그 시작은,
빛이었다.
혹은 신의 의지.
이로 말미암아 시작된 작디작은 미생물들이 수 대에 걸쳐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태초···.’
개개인들이 가진 고유성에도 그 시작점은 있었고, 그 시작점인 빛이자 신의 의지로부터 온 만물은 개성대로 달려온 것이다.
찰나의 깨달음이 계(界)의 흐름을 관통했고, 론은 그 스스로 세계를 관조할 수 있었다.
인간이되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
그렇기 때문에 론은 이내 그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수억만 년 이상의 역사였고, 기나긴 운행이었다.
고작 백 년 남짓의 인간이 담기에는 너무도 큰 거대함, 이내 그 깨달음의 세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 속에서도 론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생각.
바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유희였다.
‘그래도 한 번 막아보긴 해야지! 허무하게 죽는 건 너무 아쉽다고!!’
화아아아아앗.
한낮임에도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든 강렬한 빛이 이고르 왕국 수도 너머까지 한껏 퍼져나갔다.
[와아···.]
론 옆에서 멸마의 불꽃을 준비하던 홍염도 순간 터져 나온 빛에 넋이 나가버렸다.
***
하늘연달,
한 해의 열 번째 달의 끝자락에 이르렀음에도 이고르 왕국의 수도는 사람들로 붐볐다.
골든스태프 대회가 일찍이 잘 마쳤지만, 그 후유증에 사람들이 눌러앉은 것이다.
개회식 첫날부터 모든 출전자가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여줬던 마나의 저울.
그리고 이어진 커다란 폭발과 빛.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에 넋 놓고 보는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날을 두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신의 은혜를 입은 날이라고.
지병을 앓고 있던 이들, 크고 작은 상처가 있던 이들 너나 할 것 없이 건강을 되찾았던 것이다.
게다가 대회 결과는 또 어땠는가.
골든스태프 역사상 최초로 마법 혈통의 신예가 우승을 차지했다.
바로 라리사 케스케이드.
마법 혈통이 대기만성형이라는 인식을 부수고, 고유의 바람 마법 이외의 원소들까지 다루며 다른 출전자들을 압도해버렸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인상에 가장 강력하게 자리 잡은 것은 역시 라리사의 바람 마법이었다.
아들렌 아카데미 최종 선발전에서 보였던 기예가 우연이 아니었다는 듯이 라리사는 기어코 구름을 형성에 이어 벼락까지 내리쳐버렸다.
출전 대상인 미성년자는 물론이고, 20대들도 쉬이 할 수 없는 그 신위에 모두가 그녀를 칭송했다.
“그래서 작위와 봉토 수여도 거부한다 이 말입니까?”
그런 영광의 주인공에게 론이 물었다.
“응, 받는 순간 아들렌 왕국에 족쇄 채워지는 거잖아.”
“어이, 라리사. 아무리 너나 나나 막 나간다지만, 그런 얘기는 왕실 관계자가 들으면 큰일 난다고.”
“뭐 사실이잖아. 난 이 젊음을 고리타분한 영지에서 썩히고 싶지 않다고.”
“뭐 근데, 그건 그렇긴 해. 큭큭.”
라리사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크루딘이 받았다.
일전에 왕실간담회를 통해 아들렌 국왕은 선포했었다.
골든스태프 우승자에게는 세습 작위와 더불어 봉토를 하사하겠다고 말이다.
전무후무한 포상이었기에 왕국 내 수많은 이들이 눈에 불을 켰었는데, 정작 그 당사자는 이를 거부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꼭 나쁜 거 같지는 않아요. 다시 다 같이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거잖아요.”
잠자코 있던 사티넬이 동조했다.
“그치? 사티넬,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네? 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언니!!!”
론이 사라진 후 가장 큰 심경의 변화를 보인 것은 역시 사티넬이었다.
그리고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라리사였고.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마셔스 수림에서 마주했던 마인들과 지독한 환술.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의 이들에게서는 모두 단단한 눈빛이 쏟아져나왔다.
“그나저나 라리사님은 졸업생이니 그렇다 쳐도 사티넬이나 크루딘은 괜찮습니까?”
“어이, 론. 너도 같이 가는 마당에 그게 뭔 소리야.”
“네, 어짜피 2학년부터는 외부활동으로 대체할 수 있잖아요. 학기말 시험만 치르면 되죠.”
론이 크루딘과 사티넬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이유.
지금 이들은 아카데미로 복귀하지 않고, 곧장 탐방 여정을 떠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3서클 4서클 마법 시험이 마냥 쉬운 시험은 아닐 텐데요?”
“뭐 어때, 옆에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가 있는데.”
크루딘이 론을 똑똑이 쳐다보며 말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두 눈을 잃고 안대를 끼고 있던 론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전과 같이 푸른 눈동자가 크루딘을 마주 봤다.
개회식 당일, 론이 마인들을 몰아내며 도달했던 경지.
그것은 기나긴 역사의 운행이었다.
작디작은 미생물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태동을 관조하고 온 론은 스스로의 눈을 복구할 수 있었다.
지금껏 그 어디에도 없던 경지였다.
“그렇습니까.”
론이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화르르륵.
[나도 있어!]
새액 새액!
홍염과 시엘도 재밌겠다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고르 왕국 수도의 한 여관.
론은 동료들과 편히 그 해후를 즐겼다.
***
골든스태프 대회를 계기로 대계의 서막을 열려던 마계 세력은 결국 론의 신위 앞에 무너졌다.
물론 완전히 궤멸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잔당들을 지우기 위한 여정이 바로 론 일행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보를 아쉬워한 이들.
바로 아들렌 왕실과 아카데미가 있었다.
무려 15년 만에 되찾은 골든스태프의 영광이었는데, 그 당사자인 라리사가 국왕의 포상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현 마법의 시대에서 천재 마법사 한 명이 왕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그게 마법 혈통의 천재였으니 바이코누르 국왕의 아쉬움은 배 이상이었다.
그리고 세기의 관심을 속에 묻혀있던 한 존재.
론 스펜서.
모두가 라리사를 칭송했지만, 적잖은 이들이 론의 신위를 알고 있었다.
게다가 럼블은 론의 여정과 잃었던 두 눈을 복구한 것까지 보고는 기함을 토했다.
어떤 현상을 모방하고 따라는 수준을 넘어 마치 신의 권능에 도달한 것 같은 경지.
럼블 그 자신도 이르지 못한 경지였기에 론의 결정에 차마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래서 아카데미에는 이제 오지 않는 것이냐?”
론과의 마지막 독대.
럼블은 그에게 물었다.
“귀한 추억이 있는 곳인데 굳이 오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좋은 시간들이었고, 잊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허허···. 정말 경이롭구나. 이런 네가 겨우 열여섯이라니.”
이미 그 나이대는 물론이고, 럼블 그 자신의 경지마저 넘어선 듯한 초연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티넬과 크루딘을 잘 부탁하마.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명색이 아카데미 총장이니 이런 말이라도 하는 게 도리겠지. 껄껄껄.”
이미 앞선 면담을 통해 사티넬과 크루딘이 외부활동을 하겠다는 걸 들었었기에 럼블이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실제로 더 좋은 지도자가 옆에 있었고 말이다.
“감사했습니다, 총장님. 혹 마계 세력에 대해 의논 드릴 것이 있으면 찾아뵙겠습니다.”
“으응? 이미 네가 다 해치우고 다니는 거 아니었느냐? 뭘 새삼스럽게.”
“그래도 좀 전에 알려주신 서부의 로드마 왕국 사건은 총장님 덕분에 알게 된 것이잖습니까. 감사합니다.”
“원, 녀석도. 그래, 이제 그만 가 보거라. 네 친구 녀석들이 기다리겠다.”
“예,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아카데미에서 비롯되었던 긴 여정.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으니 결국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회귀 전에 비하면 고작 1년이었으나, 정말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다음을 향해 나아갈 시간.
론은 함께 하는 이들을 비롯해 이 땅의 모든 만물에 감사하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