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12
한낮의 태양이 점점 기울어 가는 시간,
수업이 끝난 아카데미 학생들이 하나둘 건물 밖으로 나온다.
“음? 사티넬, 오늘은 도서관 안 가?”
크루딘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티넬에게 물었다.
론과 라리사가 부재한 아카데미.
크루딘과 사티넬의 생활 패턴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오후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항상 도서관에 있다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는데, 오늘은 좀 달랐던 것이다.
“네, 오늘은 좀 바람 쐬고 싶네요.”
“뭐야, 공부만 하는 범생이가 웬일이래. 어디 뭐 라울 거리? 생각해보니 나도 간만에 바람 좀 쐬어야 될 거 같긴 한데.”
“크루딘님”
“어?”
“크루딘님은 아직 마법약 수업 레시피 보고서 작성 못 했잖아요. 그거 하셔야죠. 라리사 언니한테 또 한 소리 들으시려구요?”
“라리사가 거기서 왜 또···. 하아···.”
“아무튼 보고서 잘 완성하세요. 저는 오늘 좀 쉴게요.”
“어어? 사티넬 진짜 혼자 가게?”
“네.”
“허! 그래, 아주 혼자 자알 쉬어라.”
“네에, 감사합니다.”
“어? 어어, 사티넬? 사티넬!”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사티넬.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정확히는 여름 방학 때 마셔스 수림을 다녀온 뒤부터.
어딘가 모르게 차가워진 느낌.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 크루딘이였지만, 그는 할 일이 있었기에 이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
텔레파시(telepathy)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사고, 말, 행동 따위가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 심령 현상이다.
어쩌면 그저 망상처럼 느껴지는 이것.
그런데 때로는 일상 가운데 불현듯 발생하기도 한다.
마치 마나공명 계수와 좌표를 맞춘 두 워프게이트 사이로 물체가 오가듯이 말이다.
평소와 같은 하루,
평소와 같은 날씨,
평소와 같은 수업,
평소와 같은 오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던 사티넬은 오늘따라 왠지 론 생각이 떠올랐다.
이유야 당연히 골든스태프 대회 때문이었다.
아들렌 아카데미의 대표로 뽑힌 두 명 가운데 유일한 재학생인 론.
그런데 그 당사자는 대회가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아카데미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사티넬은 저도 모르게 마셔스 수림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믿었던 늙은 길잡이가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며 일행들을 모두 환술에 가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눴던 그때.
당시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충격이고, 아픈 상처였지만 그래도 함께 했던 이들이 소중하다는 건 변함 없었다.
다만, 그 여정의 끝에서 론이 위험하다며 홀로 돌아설 때는 마음 한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실감.
부모님 이후 처음으로 쌓은 인연이 그렇게 깊게 자리 잡고 있을 줄은 그녀도 몰랐다.
‘살아는 있는 거죠···?’
걱정과 공허가 뒤섞인 감정이 사티넬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수업 시간에는 그나마 교수님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답답함을 막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목적 없이 내디딘 발걸음.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아카데미의 여러 건물을 지나 어느새 정문 앞까지 나온 사티넬.
“그래, 가자. 라울 거리까지.”
걸어서 가려면 한참인 곳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먼 거리가 사티넬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갔다 오면 피곤해서 자고 싶은 생각 밖에 안 들 거야. 그래, 차라리 그게 나.’
딱히 큰 의미는 없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
그녀가 근 1년간 그 누구보다 친숙하게 느껴오던 마나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위에서 사라져 그녀를 외롭게 했던 그것.
‘론님?!’
사티넬이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 기운.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속도로 다가오는 이가 웬 두건 쓴 이상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론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아니었다.
허나 그녀 주위에 있는 이라고는 눈앞의 사람이 전부.
‘정말 론님이라고?’
‘그렇다면 왜 아카데미에 오는데 두건을···.’
‘아닌가? 내가 지금 착각하는 걸까.’
‘아냐, 분명해!’
‘맞겠지···?’
짧은 찰나에 지나치는 수많은 생각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속 깊이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생각은 단 하나였다.
‘보고 싶어.’
그 일념이 사티넬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떨리는 듯한 움직임은 어느새 더욱 속도를 붙여갔고,
결국 두건 쓴 사내 앞에 마주할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지은 사티넬.
“저···.”
허나, 그녀의 말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눈앞의 사내는 쌩하니 지나가 버렸다.
“어?”
멍해진 사티넬의 머릿속.
‘아니···라고?’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가깝게 지냈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아는 론은 이렇게 매몰차게 지나칠 이가 아니었다.
허나 그럼에도 모든 감각은 그를 론이라 지목하고 있었다.
지독한 혼란스러움.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붙잡는 게 예의가 아니란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절로 손이 뻗어나갔고, 지나쳐간 사내의 손목을 잡아버렸다.
‘맞잖아, 맞잖아요.’
느껴지는 그 익숙함에 사티넬이 무언가에 홀리듯 잎을 뗐다.
“맞죠, 론님?”
역시나 움찔대는 상대방.
사티넬이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그 앞으로 갔다.
어떻게 봐도 론이 맞는 것 같았기에.
체형도, 느낌도, 그리고 특유의 은은한 향도 모든 게 론이었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도 더 확인한 사티넬이 결국 두건을 들어 올렸다.
“아···.”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늘 봐왔던 붉은 머리카락.
론이 맞았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이 차오르기도 전에 불길한 검은 안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론···님?”
**
아들렌 아카데미.
론에게 있어 이곳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다름 아닌 함께 했던 동료들이다.
엘프의 후손 사티넬, 워록의 재능을 지닌 크루딘, 바람의 일족 라리사.
때문에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다른 때도 아닌 학기 중이었으니.
허나 이렇게 바로,
그것도 정문을 채 지나기도 전에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론이다.
“맞죠, 론님?”
론의 머리가 하얘졌다.
두건까지 깊게 눌러 쓴 그였는데, 확인도 하지 않고 확정 짓는 사티넬.
멍한 그를 대신해 사티넬의 두건을 벗기고, 이어서 그의 안대에까지 손을 댔다.
분명 뿌리치는 게 맞았지만,
사티넬의 손이 닿는 순간 그 익숙한 마나에 론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스륵.
뒤통수에 단단히 묶은 매듭이 풀리고, 론의 얼굴에서 안대가 떨어져 나갔다.
“...”
사티넬의 반응도 반응이었지만, 의외로 론은 후련했다.
내심 마음에 걸리던 그녀였는데, 차라리 이렇게 드러났으니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약 보름 만에 풀은 안대.
의외로 햇빛이 느껴졌다.
유백색의 의안(義眼)을 투과하는 빛.
‘이건 의외네.’
모든 시신경이 말끔히 사라진 건 아니었나 보다.
“아니··· 왜···.”
그런데 빛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사티넬에게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꼴이 이래서 말입니다. 하하···.”
애써 멋쩍게 웃는 론.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아, 바로 치료소부터 가요! 다른 데는 아픈 데 없고요?”
눈으로 볼 순 없으나,
그녀의 말투로부터 론은 짐작할 수 있었다.
허둥지둥할 정도로 그녀가 걱정하고 있음을.
[론, 엄청나게 놀랐나 봐.]
요 며칠 홍염의 열감지 공감각을 통해 미세한 감정의 변화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지금 사티넬이 딱 그랬다.
‘그러게.’
“사티넬.”
론이 사티넬의 양어깨를 쥐고 진정시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라울 거리로 가는 거 아녔습니까?”
론이 애써 미소 지으며 사티넬을 진정시켰다.
“아뇨! 그냥 산책 중이었어요!”
“아아, 네···.”
뭐라 말하든 곁에 붙어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
“어···. 총장님 뵈러 갈 건데, 그럼 같이···.”
“네! 같이 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티넬이 동의했다.
아카데미 정문에서부터 총장실 건물에 이르기까지 쉴새 없이 이야기가 오갔다.
대부분 사티넬이 묻고 론이 답하는 방식이었는데, 그 내용은 당연히 어둠의 세력에 관한 것이었다.
일전에 마셔스 수림에서 애매하게 헤어진 후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사티넬이었기에 아예 대놓고 질문 공세를 해왔다.
‘말하는 것까진 상관없겠지.’
브래들리 영지에서 있었던 참상의 규모는 상당했기에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교국에서도 파견을 나간지라 결국 공공연히 알려질 게 뻔한 상황.
때문에 론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요약 및 각색해 사티넬에게 전했다.
마셔스 수림에서 만난 코르테즈처럼 마기에 물든 이들의 본거지가 있어서 그곳을 박살 냈다는 둥,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둥,
비밀이지만 그 주동자가 후작이었다는 둥.
어찌 보면 상당한 기밀 사항이었지만, 사티넬이 그리 입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나 걱정해주고 반가워해 주는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싶은 론이었다.
가뜩이나 외로운 행보.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건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저 겪은 일들에 대한 나열이었지만, 사티넬의 반응에 론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럼 그 정령왕이란 존재를 이제는 론님이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거예요?”
“예?”
두 눈을 바쳐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다는 대목에서 사티넬은 안타까워하면서도 감탄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드는 의문점.
재소환 여부였다.
“어···. 글쎄요···.”
솔직한 심내는 가능할 것 같았다.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가 말했던 깨달음, 계(界)의 이치가 지금도 자신의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 대가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거지만.’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는데,
품 안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시엘이다.
새액.
‘어···.’
불의 정령에 대해서는 마셔스 수림에서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신수 시엘은 아니었다.
사티넬도 분명 초면이었는데, 어찌할까 고민할 새도 없이 녀석이 튀어나왔다.
새액, 새액.
“...”
시엘이 시끌벅적한 소리에 궁금했나 보다.
그런데 당연히 놀랄 거라 생각한 론의 예상과는 달리 사티넬의 눈망울이 이내 초롱초롱 빛났다.
“와아, 엄청 예뻐요! 론님이 기르는 애예요?”
“아···. 네.”
“이름이 뭐예요?”
“시엘이요.”
“와아···. 이름하고 꼭 어울려요. 엄청 예쁘다아. 솔직히 처음 뵀을 때 뭔가 특이한 기운이 좀 느껴지긴 했었는데, 요 아이였군요! 안녕! 반가워!”
새애애액.
사티넬의 파장을 느낀 것인지 시엘이 기분 좋은 울음을 내뱉었다.
[나도 있어!]
화르륵.
시엘과 잘 어울리는 사티넬의 분위기에 홍염도 전염됐는지 시키지도 않은 현신을 해버렸다.
‘뭐 사이가 안 좋은 것보단 나으려나···.’
주변에 아카데미 학생들도 몇몇 있었지만, 마법 아카데미인 만큼 당연히 기초 원소마법 파이어로 알고, 지나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장실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너희들은 여기 있을래?”
[응!]
새액!
불과 몇 분 새 사티넬의 분위기에 폭 빠진 홍염과 시엘.
자연의 수호자라 일컬어지던 엘프의 후손이라는 말이 과연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래, 그럼.”
론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런 그를 뒤에서 바라보던 사티넬.
이제껏 참고 있던 안타까움이 그제야 그 눈망울에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