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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 마법사의 회귀-110화 (110/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10

110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를 보았는가.

마치 세상이 물속에 담긴 것처럼 만물의 윤곽이 흔들린다.

그리고 지금,

론의 눈앞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빛의 굴절에 의한 왜곡 현상.

그런데 이윽고 일어난 변화는 단순한 아지랑이가 아니었다.

솨아아아아아.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습도가 높아지더니 이내 마른하늘에 물이 차올랐다.

콰아아아.

그 어떤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

그렇다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론이 사생결단의 순간 떠올린 한 존재.

[론! 그때 그 미친 정령이야!]

피식.

론의 고개가 홍염에게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홍염은 그때 물의 정령왕과 그리 좋은 인상을 나누진 않았지···.’

과거 마셔스 수림에 있을 때, 홍염과 함께 물의 궁전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당시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는 론과 홍염을 경계했었다. 물의 궁전에 쉬이 들어올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얘기가 잘 돼서 물의 이치를 전수받긴 했지만, 홍염은 여전히 싫은 듯했다.

허나 추억에 잠기는 것도 잠시,

기억 속 그때처럼 주변이 짙은 운무로 가득 찼다.

그리고 느껴지는 짙은 물의 기운.

“와주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론이 먼저 인사했다.

지상계를 구성하는 그 근간.

그 자체로 섭리이자 이 땅의 물의 흐름을 조율하는 존재.

“물의 정령왕이시여.”

멋도 모르고 마주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론은 정령왕의 위계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경외(敬畏).

그간 경험하고 깨달은 자연의 이치와 순리, 그 모든 흐름이 정령왕 오비니트로부터 선연히 느껴졌고,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선을 넘었구나.]

과거 그때와 같이 머릿속을 울리는 묵직한 진의(眞意). 오비니트가 론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상에 파고든 마(魔)가 선을 넘었습니다. 전해주신 물의 이치로는 감당할 수준이 아니어서 이렇게 요청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니, 너 말이다.]

“예?”

선을 넘은 마수의 출현으로 인해 론은 이 모든 걸 해결할 존재로 물의 정령왕을 떠올렸었다.

계(界)의 근간인 정령왕만큼 확실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요청에 응한 오비니트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무언가 못마땅한 뉘앙스.

론이 잠자코 있자 오비니트가 말을 이었다.

[백 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낱 인간이 자연의 순리 너머 계(界)의 이치를 깨닫다니. 허···.]

“계의 이치···.”

[이 땅 위에 이뤄지는 모든 것은 조건 대 대가. 자정작용의 율법이 아닌 개인의 의지로 나를 현신시킨바,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법. 이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이제껏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했는데, 그제야 론은 이해했다.

“예.”

짧지만 단단한 대답.

[대가? 무슨 대가? 정령력 말하는 거야?]

잠자코 있던 홍염이 끼어들었다.

오비니트가 나타나고,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궁금해서 더는 못 참은 것이다.

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홍염을 바라봤다.

고대 불의 정령.

생각해보면 홍염과 함께 한 지 고작 3달 남짓이었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레고리 고국부터 해서 마인들과의 싸움, 신수와의 만남, 정령과의 일체화, 그리고 덕분에 경험하게 된 태초의 기억까지.

홍염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들이었다.

“응, 정령력.”

정령을 이 땅에 소환하는 대가로 지불해야하는 정신적 소모값.

허나 론은 그냥 정령이 아닌 계의 근간인 정령왕을 소환하며 지불해야 하는 대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론이 허리 숙여 말했다.

두우우웅.

순간, 일대 울려 퍼지는 강렬한 파동.

“아...”

론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짙은 운무 속에 가려진 이곳은 그가 방금까지 떠 있던 브래들리 후작성의 외성이 아님을.

지상으로부터 격리된 곳.

바로 오비니트의 심상 세계였다.

[좋다. 나 또한 섭리의 일부, 그 순리의 부름에 응하리라.]

슈우우우욱.

배수구로 물이 빠져나가듯 주위의 모든 수분이 소용돌이치며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에 있던 모든 수분이 뭉치자,

촤악!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가 현신했다.

**

하룻밤 만에 천이 넘는 인간들이 살육당한 땅.

마기가 그득그득 잠식해버린 그 재앙의 땅 위로 물기둥이 솟구쳤다.

태초의 기운을 그대로 머금은 물.

즉, 땅의 성수가 곳곳에서 치솟았고, 주위에 그물처럼 퍼져있던 마기를 단숨에 끊어버렸다.

[네 놈이, 그 삿된 마물이구나.]

브래들리 영주성의 외성 상공,

론과 똑같은 형체로 빚어지는 물 덩어리.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였다.

그리고 그런 오비니트의 강렬한 시선을 감지한 대마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주위에 있던 마인들을 모두 취하고, 이제는 땅의 생명체들을 통해 그 공복을 채우려 했는데, 갑자기 거대한 자연의 기운이 나타난 것이다.

“크르르르···.”

대마수가 피의 흡수를 멈추고, 오비니트 주변으로 마기를 퍼뜨렸다.

에드원의 고유능력, 마기 통제.

다만, 놈이 대마수로 진화하며 거기에 그 능력 또한 한 층 진화했다.

폭식(暴食)-공간 섭식.

“음?”

론 또한 오비니트 옆에 있었기에 대마수의 기행을 똑똑이 지켜볼 수 있었는데, 무언가 조금 달랐다.

영주성에 있을 때 느꼈던 그 중압감이 아니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육안으로 드러났다.

주변을 잠식하는 마기.

그것이 주위로부터 론 일행을 격리시켰다. 새벽을 조금씩 밝히던 여명의 빛도 차단되어 점점 시야가 어두워졌다.

쉬이이이.

그리고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

론이 호기심에 마나를 뻗어 보았는데, 순식간에 분해되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 안에 가두고 완전히 녹여버리겠다 이건가?’

단번에 대마수의 능력을 꿰뚫어 본 론.

허나 이를 알 리 없는 홍염은 그저 대마수를 경계하며 론을 감싸 안았다.

[론!]

화르르륵!

홍염이 빠르게 몸집을 키우더니 주변의 가스를 몰아냈다.

그런데 그보다 강렬한 움직임이 있었다.

[삿되도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오비니트의 차가운 진의(眞意).

서걱!

그 의지가 들리기 무섭게 주변의 어둠이 순식간에 쪼개져 버렸다.

[계(界)의 율법이자 그 근간인 조율자가 이 땅에 현신했으니, 마땅히 그 할 일을 해야 할 터. 네 놈이 그 시작이다.]

콰과과과과광.

순간 엄청난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으윽···. 세상이 찌그러지는 거 같아···.]

홍염이 놀라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드러난 굉음의 결과.

“키헤···!!”

세상을 찌그러뜨릴 듯 밀려오던 것은 그저 수분이었는데, 그것이 대마수와 놈의 마기를 한점에 압착시켜버렸다.

[사라져라.]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대마수.

놈이 땅의 성수와 함께 그 자리에서 단숨에 산화해버렸다.

끝이었다.

[황폐하구나.]

오비니트가 대마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시선을 돌린다.

참상으로 얼룩진 땅.

내성이 텅 빈 공간이 되어버렸다면, 외성은 피로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다.

곳곳에 핏자국과 시체들이 즐비했다.

“하···.”

오비니트의 곁에 있던 론도 복잡한 심경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가 아는 이도 있었다.

“라나! 라나!! 아이고, 라나야···. 흑흑···.”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있었던 이들.

어린 나이에 환자들을 살피던 꼬마 라나가 창백한 얼굴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심장에 구멍이 뚫린 채로.

‘라나···.’

론은 저도 모르게 물의 이치에 담긴 기운에 대해 떠올렸다.

치유와 소생, 자정(自淨)과 진정.

물론 그중에서도 바로 소생이었다.

[과하다.]

론의 생각을 읽은 오비니트가 말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그 어떤 존재보다 자유의지를 누리는 인간에게 변명의 여지는 없다. 무지 또한 그들의 몫이다.]

얼음판처럼 차가운 반응.

론은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허나 같은 인간이기에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아무리 인간이 자유의지의 존재라지만, 그러한 의지를 꺾는 게 바로 인간 사회의 법도라는 것을.

바로 계급의 권위.

고작 핏줄로 결정되는 족쇄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짓고, 복종할 뿐이다.

그리고 이곳 브래들리 영지는 그러한 인간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이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마(魔)에 손을 댄 선장과 그 배에 탑승한 무지한 승객들.

“하···.”

론의 입가로 탄식이 새 나왔다.

[때가 됐구나.]

오비니트의 단출한 한마디.

허나 론은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자그마치 계(界)의 근간인 정령왕.

단번에 대마수를 지워버릴 정도의 존재를 언제까지고 붙잡을 순 없었다.

그리고 홍염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정령왕을 부른 그 대가 또한 지불해야 한다는 것까지.

“제 목숨입니까?”

론이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연의 순리에 대해 누구보다 깨달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친히 제 몸을 희생해 정령왕을 부른 그였다.

아쉬움은 있으나 후회는 없었던 선택.

그런데 순간 론의 형상을 띠고 있던 물덩어리의 입가가 살짝 휘어졌다.

아무도 보지 못한 오비니트의 미소.

론의 선한 의지가 오비니트의 마음에 닿은 것이다.

‘이 또한 받아 가마.’

계(界)의 이치를 깨달은 론이었음에도 차마 알지 못했던 천기(天機). 거기에 오비니트의 의지가 조금 더해졌다.

‘다만 나를 현신시킨 대가는 어쩔 수 없느니라. 그리고 너라면 분명히···.’

화아아아앗.

순간 허공에서 피어난 새하얀 빛이 브래들리 후작성 일대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

“새로운 영주님의 취임이다!”

“와아아아!!”

“축하드립니다!!”

“먹고 마시자!!”

“세금도 줄여주시고, 밀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곳곳에 울려 퍼지는 환호성 소리.

브래들리 후작성이었다.

오비니트가 현신하고 약 보름이 지난 시간.

탐욕에 눈먼 에드원의 자식들이 후작성을 노리고 찾아왔었다. 하나같이 마인화를 거친 이들이었고 적잖은 마인들을 끌고 왔지만, 결국 홍염의 불꽃은 꺾지 못했다.

영주와 그 자식들까지 다 죽어난 브래들리 영지.

그렇게 브래들리 영지는 혼란의 땅이 되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마인화를 거치지 않은 자식이 한 명 남아 있었다.

바로 에드원의 서자이자 지방 서기관이었던 셋째 아들.

몇몇 방계 귀족들의 말이 좀 있긴 했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결국 그는 새로운 영주로 추대됐다.

‘마(魔)의 구렁텅이에서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한 자인데, 그래도 좀 낫겠지.’

딱히 간섭할 마음은 없었다.

결국 모든 건 인간 개인의 몫이고, 자유의지에 따른 책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차례 참상을 목도한 이로서 잘 되길 바랄 뿐이다.

“이제 가는 거예요?”

긴 회상이 막을 내리듯 한 소녀의 목소리가 론을 불렀다.

바로 라나.

대마수의 공격으로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녀는 살아났다.

그리고 그녀뿐만 아니라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던 이들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오비니트의 자비였다.

물론 완전히 혼이 빠져나가고 그 육신이 망가진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축복.

‘그렇게 칼같이 계산할 것처럼 말하더니...’

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축복을 빌었다.

“응, 가야지.”

이제 브래들리 영지에서의 일은 끝이 났다.

타도시에 남아 있던 반타 블랙도 기어이 찾아가 말소했고, 마기 중독 환자들도 교국에서 먼저 파견 나오는 바람이 일이 쉽게 풀렸다.

정말 끝이 난 것이다.

“아저씨, 가다가 길 잃으면 안 돼요! 길 잃으면 꼭 우리 집으로 돌아와요!”

“그래, 길 잃으면 네 집으로 찾아갈게.”

외모로 보나 뭐로 보나 애 취급받을 나이는 아니건만 라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이 바로 론이 지불해야하는 섭리의 대가였다.

체내의 마나 서클은 모두 사라졌고,

물기가 가득한 신체 기관인 눈이 사라졌다.

‘가자.’

[응!]

새액!

“홍염도 시엘도 잘 가아~! 안녀엉!”

“조심히 가십시오, 나으리!”

“조심히 가세요.”

라나의 가족들이 손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시각이 아닌 열(熱)의 움직임과 마나의 흐름으로.

7서클에 이르는 마나감응력과 홍염의 공감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허나 살았으니 된 것이다.

그렇게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론은 브래들리 후작성의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아홉 번째 달인 열매 달 중순,

애타게 론을 기다리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는 그도 꼭 가고 싶었던 곳.

바로 골든스태프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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