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05
시작은 마법이었다.
현상을 깨우치고 지배하는 자들의 권능.
마른하늘에 구름을 불러와 뇌우를 쏟아지게 하고, 가뭄이 든 곳에 물을 끌어오며, 꺼지지 않는 불길을 소환하는 자들.
본신의 무력으로 초인에 이르는 전사들도 있었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건 마법이라 여겼었다.
그렇기 때문에 론은 80년 세월을 거슬러 회귀했을 때도 주저 없이 마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런데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저씨, 아줌마들 저 따라오세요.”
“둥근 막대기는 스푼, 요렇게 수프를 떠먹는 거예요. 그리고 끝이 뾰족한 막대기는 포크! 고기나 감자, 채소 같은 거를 찍어 먹는 거예요. 이렇게 와앙.”
“화장실 갈 때는 항상 문 앞에서 노크를 똑똑하고요,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잘 때는 떠들면 안 돼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어리광부리는 모습이 더 익숙해 보이는 어린아이. 그 아이가 마기에 중독됐던 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라나였다.
그녀의 순수함이 환자들의 공허를 조금씩 채워간다.
만물은 각자의 존재 이유를 자각할 때 빛을 발한다.
여전히 조그마한 라나지만, 그녀는 메마르고 지친 이들의 마음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각각의 결함이 빚어낸 개성,
그리고 그 개성들이 모여 이루는 완전함. 자연의 순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꼬맹아, 방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웅! 고마워!”
홍염이 현신한 것도 아니었으나, 라나는 그 존재를 인지했다. 그리고 인지 수준을 넘어 소통까지 가능했고.
새액 새애애액.
“알았어, 시엘. 시엘도 착해. 옆에서 지켜줘서 고마워!”
게다가 언제 친해진 건지 시엘도 라나의 곁에서 제 머리를 비비적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
“라나가 이렇게 잘 대해줄 줄은 몰랐습니다.”
프레드릭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저는 이제 아이 좀 재울게요. 저 그런데··· 저기 저 하얀 뱀은···.”
“괜찮습니다. 좋아서 라나를 따라다니는 거니까요.”
프레드릭 옆에 있던 여성, 그의 아내에게 론이 대답했다.
해 질 무렵 포목점에서 귀가한 그녀는 갑자기 늘어난 사람들을 보고 꽤나 놀랐었다.
하지만, 프레드릭이 그녀를 설득했다.
이제 곧 일곱 살, 아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성장기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한 것이었다.
바로 론을 통해서.
“얼마나 있다 가실 겁니까?”
외관은 잘 쳐줘 봐야 이제 겨우 성인이 될까 말까 한 앳된 외모의 론이었지만, 프레드릭은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정령사이자 신수를 부리는 테이머였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당황했던 첫 만남 때와는 달리 프레드릭은 오히려 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괜히 물었나···.’
허나 그런 그의 염려와는 달리 론의 생각은 단순했다.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는 대로 데려가겠습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옛, 예?”
그가 생각하는 곳은 수도원이다.
전에 마인이 말하길 이들 중 성직자도 있다고 했으니, 적당히 잘 얘기를 하면 될 듯싶었다.
“그리고 받아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한 론은 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대충 거실 겸 부엌이자 식당으로 쓰이는 공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브래들리 후작성에 대한 것밖에는 없었다.
옆에서 프레드릭이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이 간밤에 마인들이 침입하는 것보다 중요치는 않으리라.
***
“영주님, 밤이 늦었습니다. 잠시라도 쉬시지요.”
자정이 넘은 시각.
불침번을 제하고는 모두 잠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에드원 브래들리를 비롯해 수뇌부들은 삼 일째 밤을 새우고 있었다.
“오늘도 안 온다고?”
에드원이 멍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소위 기세라는 것이 있다.
소규모 전투를 비롯해 왕국 간의 대전쟁을 보더라도 한 번 승기를 잡은 쪽은 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이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복구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창밖은 고요했다.
이틀 전 외성에서 피어올랐던 거대한 자연의 기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주변의 마인들을 지워버렸었기에 당연히 곧장 내성으로 향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때문에 아쉬움을 무릅쓰고 내성에 거대 제물소환진을 계획한 에드원이었다.
외성과 달리 내성을 구성하는 이들은 대부분 귀족이다. 대부호부터 수많은 인력을 거느린 그들을 그저 제물 대의 한 인간으로 바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엄청난 손해.
아무리 마인이라지만,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빠삭한 에드원이었기에 더없이 아쉬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내성 성벽에 제대로 근무를 서고 있는 거 맞아? 놈들이 정말 안 온다고?!”
“예, 10분 단위로 보고를 받고 있는데 놈들의 움직임은 따로 없습···.”
“10분?! 5분, 아니 3분 단위로 보고하라 해!”
“알겠습니다, 영주님.”
삼 일간 잠은커녕 휴식도 내놓은 채 대기한 에드원.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총관이 나가지 않았다.
“총관, 내 명령 못 들었어?”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굳어진 총관의 표정.
좋은 소식이 아니란 걸 직감한 에드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해.”
“프라하와 플로라 두 곳 모두 반타 블랙이 전소됐다는 보고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총관이 허리를 푹 숙였다.
본래 에드원을 잠시라도 쉬게 한 뒤 보고하려 했던 총관이었는데, 그럴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뒤늦게 보고한 것이다.
쿠구구구궁.
“죗, 죄송합니다학! 커헉!!”
에드원으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 마기가 총관을 짓눌렀다.
“하아···. 땅의 조율자라도 납셨다 이건가.”
땅의 조율자.
지상계의 근간을 이루는 존재이나 그렇기에 더더욱 드러나서는 안 될 존재였다.
바로 각 원소의 정령왕들.
그들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이 어그러진다. 즉, 현신하는 것 자체만으로 계의 율법에서 어긋난다는 얘기다.
그 때문에 에드원도 이제껏 마음 놓고 활동한 것이었다. 마족이 강림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현신할 명분이 없으니까 말이다.
누구보다 마기를 받아들였고, 마족에 버금가는 힘을 얻은 그였다.
헌데 무언가 점점 어긋나고 있었다.
범인이라면 감히 손댈 수조차 없는 반타 블랙이 전소되었다.
“소환해내는 데만 자그마치 삼백의 인간을 갖다 바쳐야 하는 아티팩트이거늘!! 감히···.”
네크로맨시(강령술)을 비롯한 흑마법은 제물소환이 기본 베이스다. 지성과 끈기, 이성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산 사람들을 갖다 바치고 얻는 힘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 대업을 막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대형검투장과 행정관 관저, 반타 블랙 등을 부숴가면서 말이다.
“총관.”
“옛, 예···.”
에드원이 몰아치던 기세를 낮추자 총관이 겨우 대답했다.
“놈들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끝이다. 당장 실시해.”
“제물···소환진 말입니까?!”
“그래.”
“지, 지금 펼치시면 내성에 있는 모든 귀족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날이 밝고 평민들이 들어오면 그때 하시는 게 어떠실지···.”
총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또한 마인이었지만, 누구보다 에드원의 대업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일국을 넘어 대륙을 제패하려는 대업.
그 과정에 있어서 귀족은 필수다. 평민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 귀족만큼 아주 효율적인 수단은 없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첨언한 것이었는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고개를 들자 서늘한 안광이 그를 비출 뿐이었다.
“바, 바로 실시하겠습니다!”
총관이 허겁지겁 집무실을 나가고, 에드원은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조율자라면 한 번 막아 보라고.”
**
제물소환은 선을 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살아있는 동족의 피로 소환진을 만들고,
그 안에 마계어를 새기는 것.
여기서 동족이라는 말은 그 활용 범위가 넓다. 인간에게는 인간, 사자에게는 사자. 이런 방식으로 모든 존재에게 허용된다.
그런데 지금 브래들리 후작가의 총관이 만들어야 하는 제물소환진은 그리는 데만 인간 수십의 피가 필요했다.
“정말 미쳤군. 하아···.”
마계 게이트라 불리는 반타 블랙도 그 제물소환진을 그리는 데 인간 열 명의 피를 필요로 했었다. 그리고 그런 제물소환진 위로 바쳐진 인간이 삼백인 것이었고.
즉, 지금 총관이 그리려 하는 거대 제물소환진은 규모부터 아예 다른 것이다. 완성된 소환진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제물로 빨아들일지는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치솟는 입가를 멈출 수 없었다.
“흐, 흐흐. 히히이익!!”
마인.
애초에 본능과 쾌락에 미쳐 사는 자들이다.
브래들리 후작 앞에서는 그 압도적인 마기에 억눌려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뜩이나 대업을 위해 거대 제물소환진을 반대했던 그지만, 상관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이의는 필요 없었다.
그저 본능이 원하는 대로 살육을 벌이면 되는 것이었다.
“감옥에 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끌고 와! 흐으···.”
“예, 총관님!”
총관을 따르는 부하들이 부복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살육과 제물소환진은 그들에게 있어 끊기 어려운 유희거리였기 때문이다. 없어서 못 하는 것일 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외인들에게는 브래들리 영지가 치안이 좋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유인즉, 범죄자들을 항상 제물소환진의 제물로 쓰다 보니, 보이는 족족 그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출현과 동시에 즉결 처분.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해도 부족한 인원들을 무고한 평민들을 통해 수급했다는 것을.
영지를 벗어나는 자들을 비롯해 음지에 있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자들을 교묘하게 잡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지금껏 제물로 바쳐진 이들이 수천, 수만이었다.
그리고 이 밤,
브래들리 후작성 내성에는 전에 없던 제물소환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마족에 준하는 수준의 마수라···. 큭큭, 놈이 그 조율자인가 뭔가 하는 놈하고 안 싸우면 영주님과 붙는 건가. 하아···. 빨리 보고 싶군···. 빨리빨리 움직여 이 새끼들아!!”
“예!”
총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제물소환진을 통해 불러내는 것은 말 그대로 거대 마수다. 특정 마수를 지정해 불러내는 것이 아닌 마기의 규모만을 정해놓고 불러내는 방식이었기에 어떤 마수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때문에 브래들리 후작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순간 엄청난 사달이 일어난다.
애초에 상대를 땅의 조율자라 상정하고 계획한 것이다. 소환된 즉시 서로가 알아채고 싸우도록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대 마수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브래들리 후작, 바로 에드원이 될 것이다.
말 그대로 혼돈과 파괴.
“큭큭큭, 뭐가 됐든 간에 난 재밌게 잘 관전해 주지.”
“총관님! 죄수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부하들이 감옥에 있던 자들을 모두 끌고 나왔다.
“사,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빵을 훔치지 않겠습니다!”
“모, 모르고 부딪힌 것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귀가 안 좋아서 귀족 나으리들의 말씀을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경범죄를 비롯한 귀족법에 어긋난 자들. 그들이 바로 오늘 제물소환진의 재료가 될 자들이었다.
“어이, 거기 붓쟁이. 시작해!”
광기 어린 총관의 눈동자가 한쪽 구석에서 달달 떨고 있는 한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