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04
동화를 넘어선 일체.
평평한 땅이 늪지가 되고, 마른하늘에 시뻘건 불길이 뒤덮자 가장 놀란 것은 마인들이 아니었다.
바로 홍염.
고대 불의 정령으로서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내 온 홍염은 지금 선연히 느끼고 있었다. 그 오래전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태초의 의지를.
[아아···.]
수많은 존재들이 가지는 결함. 완벽하지 않기에 개성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러한 개성들이 상호작용하고 순환하여 온전함을 갖추는 곳이 바로 이 땅, 지상계다.
지상계를 이루는 근간.
그 자연의 순리에 론이 닿았다.
억압과 강압으로 점칠 된 마기를 성화와 성수가 되돌리기 시작했다.
고통과 절망, 악의로 응집된 기운들은 흩어지고, 그 위로 기쁨과 희망이 자리 잡는다.
새액?
새애애액.
론의 품 안에서 태초의 의지를 만끽하던 시엘이 주위에서 풍겨오는 기운에 그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새빨갛던 하늘은 다시 푸르름을 되찾았고, 땅에는 전에 없던 풀들이 가득 자라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은은한 태초의 기운들.
새애애애액.
시엘은 자신이 자연의 기운을 먹고 사는 신수(神獸)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론의 품을 나와 풀 속을 기분 좋게 오갔다.
[괜···찮아?]
허나 홍염은 염려 섞인 질문을 했다.
줄곧 함께해온 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괜찮아.”
론이 허공에 떠 있는 불꽃에 손을 뻗었다.
놀람, 당황, 걱정, 불안.
평소 같지 않은 감정들이 전해졌지만, 론은 그저 미소 지으며 쓰다듬을 뿐이다. 물의 이치 중 하나인 진정의 기운을 담아서.
[응···.]
그 뒤로 몇몇 개별 활동을 하는 마인들이 다가왔지만, 이미 사도 급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캬밀도 당한 마당에 론을 막아설 자는 없었다.
‘이게 바로 자연의 순리란 건가.’
차분한 론의 눈동자 너머로 살아 숨 쉬는 자연이 그대로 느껴졌다.
각각의 개성들이 치밀하게 맞물려 만들어 낸 거대한 운행. 그것이 이 땅이었고, 작게는 이곳 브래들리 후작성이었다.
다만 그 속에서도 명백히 위화감을 자아내며 조화를 어긋 내는 것들이 존재했는데, 바로 그 마기를 향해 론이 걸음을 옮겼다.
**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수천, 수만 년 동안 오감을 지닌 채 진화해 온 인간이지만, 그 인식의 수준을 벗어나면 인간은 감지하지 못한다.
한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이 세계의 땅덩어리, 세계를 거니는 바람의 냄새, 자연을 운행하는 정령들의 속삭임 등등처럼 말이다.
그런데 한낱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
론 스펜서.
평소와 같은 모습, 평소와 같은 걸음걸이였지만, 성내에서 그를 인지하는 이는 없었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이들조차도 론의 앞에 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비켜 갈 뿐이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모르는 론은 그저 제 갈 길을 갔다. 끊임없이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덩어리를 향해서.
그리고 얼마 뒤,
“웨, 웬 놈이냐?!”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한 간수가 말했다.
벽에 걸린 횃불이 제법 어둠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런 가시적인 모습으로 존재를 인지한 게 아니었다.
강렬한 자연의 기운.
어느 순간 지하 감옥 전체를 장학한 그 기운에 간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시시각각 온몸이 분해되어져 가는 기분.
“여길 지키는 건 네놈들 뿐이냐?”
“크윽···!”
차분한 음성이 간수의 고막을 뚫고 뇌 속에 꽂혔다.
“으, 음파를 다루는 놈이다! 모두 전투 준비해!! 심상치 않은 놈이야, 무조건 죽여!!”
피아식별이 끝나기 무섭게 즉살 명령을 내린 간수였으나, 뒤이어 들리는 건 동료들의 소리가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끄아아아악!!”
칙칙한 어둠을 밝히는 성화가 외성 수비대 지하 감옥을 훤히 밝혔다.
“어떤 새끼야!!”
“분명 순번을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다시 영주성으로 끌려가고 싶어?!!”
“하아···. 씨이바알···! 저년 지금 아주 맛탱이 가서 제대로였는데···. 어떤 십새끼야!!”
감옥 안쪽에서 불쾌함을 비롯해 온갖 부정적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더 이상 입을 더 열지 못했다.
“네놈들이었구나.”
론의 서늘한 음성을 끝으로 지하 감옥에 다시금 성화가 피어올랐다.
**
간수 짓거리를 하던 마인들을 단숨에 소각해버리고 론은 지하 감옥의 최하층에 도착했다.
더럽게 얼룩지고 찢어진 복장.
산발이 된 머리카락.
피부 곳곳에 새겨진 상처 자국.
그리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
지하 감옥에 있는 자들의 공통점이었다.
[으으···. 너무 불쾌해!]
새애애액!
그리고 오래도록 찌든 마기와 음습한 파장들이 홍염과 시엘을 절로 자극했다.
물론 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정말 미친 새끼들이군.”
마인들이 저질러 놓은 작태에 절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슈우우우욱.
론의 주위로 갑자기 생겨난 물길.
마기로 얼룩진 벽과 바닥을 씻어내고, 제정신이 아닌 자들을 뒤덮었다.
땅의 성수였다.
감옥에 갇힌 이들이 마기에 중독된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들이 마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살 수··· 있을까? 하아···.”
저도 모르게 염려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약육강식은 이런 게 아니다.
생존경쟁, 자연의 순리는 이렇게 괴랄한 게 아니란 말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땅의 성수가 이곳 지하 감옥과 여기 갇힌 사람들을 씻어내고 있었지만, 그들 내면에 생겨난 끝없는 절망과 공포는 깊었다.
“주, 죽여줘···.”
“흐, 흐윽!! 살려 주세요!! 흐아아아아악!! 귀신이 쫓아 온다구요!!!”
“으헤에···. 신은 죽었습니다하아···.”
“아롤! 이 사기꾼!! 이 땅은 원래 더러운 곳이라고!! 정령이라더니 내게 무슨 계약을 한 거야!! 으아아악!!”
한참을 지우고 또 지웠다.
마기의 기운은 단 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이곳에서 마인들의 괴롭힘을 당한 이들은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발!! 제발 죽여줘!! 이 절망의 땅에서 날 지워달라고!!”
머리 깊숙이 자리 잡은 절망이 그들에게서 기쁨과 희망을 모조리 앗아가 버렸다.
“미안합니다.”
메마른 대지처럼 갈라지고 공허해진 그들의 마음에 절로 론의 마음이 갔다.
빈 곳을 채우는 움직임.
순환이자 상호작용이었고,
자연의 순리였다.
론이 그들을 안고는 묵묵히 지상으로 올랐다.
가감 없이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
오랜만에 보는 것인지 밖으로 나오자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가리는 그들이었지만, 이내 곧 그들은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호기심에 이리저리 손을 뻗는 그들.
그런데 론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그들 마음속 조그맣게 피어난 희망이 말이다.
다만, 아쉬운 건 그런 그들을 언제까지고 보모처럼 계속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서둘러 브래들리 후작성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내야 했다. 지금도 성내 어딘가에서는 이와 같은 피해자들이 절망을 호소할지 모를 일이었다.
때문에 론은 마기의 잔향이 남아 있는 외성 수비대 건물을 뒤졌다.
남아 있는 마기를 다 씻어내고는 그곳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은 챙겨 나온 론은 곧장 거리로 향했다.
지상계의 간섭률.
즉, 자연의 순리에 대한 일체감이 높아지자 확실히 전과는 다른 것들이 느껴지는 그였다.
기쁨, 행복, 만족, 여유, 지루함, 질투, 미움, 서러움 등등.
감정의 파장들이 선연히 느껴져 왔다.
그리고 그런 론이 향한 곳은 그중에서도 기쁨과 여유가 가장 넘치는 곳이었다.
“압빠!”
파란 헤어밴드를 머리에 두른 꼬마가 제 아버지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라나.”
“엄마가 라나한테 파랑색 머리띠 줬어요!”
“으응, 잘 어울리네. 우리 라나 아주 예쁘다.”
“진짜 예뻐?!”
“응, 우리 딸 아주 예뻐.”
“진쨔루?”
“그렇다니까.”
“흐응···.”
딸아이의 머리띠 자랑에 아버지인 프레드릭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를 더 바라는 듯한 표정.
“이리 와, 라나.”
“응!”
통나무를 조각하고 있던 프레드릭의 품 안으로 라나가 쏙 들어간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품에 안고 곧잘 작업을 해왔었기에 서로에게 익숙한 자세였다.
무릎에 위에 올라앉은 라나의 머리를 프레드릭이 쓰다듬었다.
“재밌는 얘기 해주세요.”
“재밌는 얘기?”
“응! 재밌는 얘기.”
이제 곧 일곱 살,
또래 아이들과 정신없이 어울려 다닐 만도 하건만, 어째 라나는 그의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아빠, 이번에는 뭘 조각하는 거야?’
‘그 부엉이도 날 수 있어?’
‘이 거북이는 왜 물을 못 먹어?’
‘나무가 조그만 나무가 됐어!’
‘그럼 나무가 사람도 될 수 있어?’
제법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할 무렵 라나의 엄마는 포목점 재단사로서 맞벌이를 시작했다.
때문에 라나는 집에서 작업을 하는 제 아버지와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라나는 프레드릭의 무릎에 올라앉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언제고 들려주던 동화 속 이야기.
그런데 프레드릭은 다른 부모들보다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의 손을 거쳐 통나무들이 각종 동물과 요정, 신수로 바뀐 것이다.
라나의 마음속에 또 다른 세계를 심어주었고, 그녀의 순수함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수함에 론의 감각이 닿았다.
**
“어···. 그러니까, 잠시 묵고 싶으시다구요?”
“예, 피치 못 할 일이 생겨서 잠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염치 불구하지만 사례비도 드리겠습니다.”
프레드릭 앞으로 내밀어진 묵직한 주머니.
론이 조금 전 외성 수비대 건물을 청소하며 가지고 나온 것들이었다. 티발루 왕국 화폐부터 해서 각종 귀금속들.
사실 단순히 사람을 보는 거라면야, 큰돈을 주고 일반 여관에 부탁해도 될 일이었지만, 론은 묘한 감각에 이끌렸다.
수많은 감정들 속에 오래도록 지켜져 온 순수함.
보통 아이들이 갖는 순수함과는 달리 라나의 그것은 좀 특이했다. 감정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짙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허의 구멍이 뚫린 이들에게 더없이 알맞아 보였기에 론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존재감을 최대한 지운 채 말이다.
“남는 방이 한 군데밖에 없어서···. 오셔도 한방에서 묵어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프레드릭은 론이 데리고 온 다섯 명의 남녀들을 보며 말했다.
거절보다는 걱정어린 반응.
론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잘 됐다!]
처음부터 잠자코 지켜보던 홍염도 긍정적인 반응에 제 기분을 표출했다.
“어···?”
그런데 지금껏 프레드릭의 다리 뒤에 숨어있던 라나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말도 하네···.”
조용히 중얼거리며 신기하게 쳐다보는 라나. 그런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정확히 홍염을 향해 있었다.
‘뭐지? 그게 그런 의미였나.’
자연의 이치에 대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론의 가치관에서 바뀌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정령사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회귀 전에는 그저 염세주의자 혹은 세상에 무관심한 자들로만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누구보다 이 땅,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거대한 자연을 인지하는 자들.
그 순수함이 홍염에게도 전해진 걸까.
이제껏 마인을 제외하고는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홍염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화르르륵.
[으음···. 내가 느껴지는 건가? 안녕?]
홍염이 호기심을 가득 담아 라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새액 새애애애액!
론의 품 안에 있던 시엘이 자신도 있다며 덩달아 튀어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