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03
깍듯한 자세로 론을 앞장세운 히글라우드.
명백히 상급자를 모시는 자세였으나, 그런 그의 저자세에도 불구하고 론의 온 신경은 뒤의 사내를 향해 있었다.
비수를 찔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
그런데 의외로 그와 같은 일은 한참이 지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을 뿐.
“이쪽은 저기 저 끝의 폐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론이 애써 모른 척 말했다.
“맞습니다, 테르미노님. 바로 저기로 가시면 됩니다.”
너무도 뻔히 보이는 수.
론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히글라우드의 얼굴이 씰룩씰룩 움직이고 있었다.
“하아···. 하여간 좋게 말해주면 항상 이런다니까. 큭큭큭···. 뭐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다 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흣!!”
히글라우드가 한쪽 손을 펼치자 마법이라도 부린 듯 강력한 인력(引力)이 발생했고,
슈우우욱, 탁!
그의 손에는 이내 기다란 나무 막대가 날아와 잡혔다.
마나의 가장 강도 높은 형태, 오러.
이 오러를 만들어 내는 자들만이 일으킬 수 있는 외력이었다.
“오러에 대한 감이 높아지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무기를 따질 필요가 없더라구.”
히글라우드가 폐건물 주변 굴러다니던 나무 막대를 이리저리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명백한 적의.
애초에 가려지지도 않는 가면이었지만, 그가 본심을 드러내자 론 또한 본신의 힘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음습한 기운이 아주 진동하는군.”
론이 이제껏 차리던 공손한 말투는 치워버리고 솔직한 감상을 표했다.
“호오? 말투 봐라? 큭큭큭, 역시 느껴지는 기운 만큼이나 정말 특이한 놈이야. 어디 한 번 발버둥 쳐 봐라. 내가 제대로 맛봐 줄 테니까 말야. 흐아앗!!!”
오러가 덧씌워진 나무 막대가 허공을 갈랐다.
이제껏 누군가를 괴롭힐 때면 항상 히글라우드가 치르는 절차. 바로 다리를 부러뜨려서 도망가지 못 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큭큭, 일단 저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부터 쥐고 폐건물로 들어가 볼까? 아프다고 아마 징징대겠지? 하아···.’
히글라우드는 지금껏 이 같은 짓거리를 수십 수백 명에게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질리지 않았다. 날마다 늘 새로운 상대가 이렇게 찾아오니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온 신경과 생각이 쾌락에 완전히 매몰될 때쯤,
서걱!
나무 막대를 쥐고 있던 오른팔이 통째로 절단되어 버렸다.
“크윽! 무, 무슨 짓을!!”
“고작 이 정도로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건가?”
론의 차가운 눈빛이 당황한 히글라우드의 얼굴을 똑똑이 쳐다봤다.
“본디 오러는 마나 수련을 극도로 수련한 전사들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힘이다. 그런데 넌 그런 자들과 거리가 멀다.”
쉬이이익.
마법진을 요구하는 복잡한 마법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정신 상태가 한쪽에 치우치니 근접전의 제왕이라는 오러 유저도 별거 없구나.”
서걱.
론의 차분한 말과는 상반될 정도로 날카로운 바람이 히글라우드의 한쪽 다리를 썰어버렸다.
“으아아악!!”
오러가 아무리 가장 강력한 에너지 형태일지라도 그 사용자가 빈틈이 많으면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다.
쾌락에 빠져 그저 내지를 줄만 알았던 히글라우드는 첨예한 통찰과 이성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그나저나 대충 전초전을 벌이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있는 거라곤 폐건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러하기에 더욱 괜찮은 조건이었다.
화르르륵.
[소각할 거야?!]
이제 남은 거라곤 소각밖에 없다고 생각한 홍염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론이 놈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놔두는 바람에 여간 껄끄러웠던 게 아니었다.
때문에 당장이라도 멸마의 불꽃을 쏟아낼 기세로 홍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니, 일단 이 외성에 있는 놈들을 다 불러야지.”
[다 불러? 어떻게?]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불길의 기세가 순간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우우우웅.
론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하나의 깨달음. 이제껏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쌓아온 것들과는 달리 처음 전달 받았을 때부터 완전무결이었던 그것이 드러났다.
히글라우드 위로 푸른색 원이 그려지고, 그 안에 새겨지는 마법식들. 바로 기초 원소마법 워터였다.
허나 그 마법진이 쏟아낸 것은 그냥 물이 아니었다.
바로 땅의 성수.
“끄아아아아아악!!!”
팔과 다리가 절단될 때도 크게 소리치지 않던 히글라우드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더 이상 이 땅의 존재가 아니게 된 그에게 있어 땅의 성수는 멸마의 불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모를 일이긴 했다.
히드라. 아니, 시엘처럼 지독한 마기 속에서도 그 심중에 땅에 대한 의지와 애정이 있다면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치이이이익.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성수에 닿는 족족 산화되어 사라져가는 히글라우드의 몸.
마인이 되기 전부터 살인과 쾌락에 빠져 살던 그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으아아아악!! 살려, 살려줘어!! 제바아아알!!”
양심도 없이 내지르는 히글라우드의 비명.
그 전 같았다면 단숨에 해치워버렸을 론이지만, 지금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네 놈 동료들 죗값도 치러야지.”
폐건물가에서 울려 퍼진 히글라우드의 비명은 주변에 있던 다른 마인들이 몰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
“허···. 영주님의 명령이 사실이었다고?”
“이 파장, 분명 히글라우드야.”
“대체 어느 미친놈이 히글라우드를?!”
“정말로 왔나 보군, 마인의 대척점에 선 존재.”
외성 수비대 건물의 간부실.
그 안에 있던 마인들이 상석에 있던 자에게 모두 고개를 돌렸다.
“하···! 아직 대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집합 명령을 내리게 될 줄이야. 하투샤, 외성 수비는 최소한으로 하고 대기 전력들 모두 소집해라. 첫 방문객인데, 제대로 영접해드려야지.”
“예, 알겠습니다.”
마계가 쾌락과 본능으로 점칠 된 곳이라지만, 그렇기에 확실한 위계 서열이 존재했다. 철저한 힘의 논리. 약자는 고개 숙이고, 강자는 군림하는 게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브래들리 후작가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사도 급 마인 중 하나가 지금 이 상석에 앉은 캬밀이었다.
마인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광인(狂人)이 되어 격리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압도적인 힘과 마기를 가졌음에도 본능을 통제할 줄 알았다.
“영주님께서 사도 급 마인들을 전부 외성에 배치했다. 여기 수비대 말고 다른 놈들도 기웃댈 테지. 하지만, 놈은 반드시 우리가 잡는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캬밀. 그가 간부실을 나서며 말했다.
**
폭풍 전 고요란 이런 걸까.
아무리 외성 외곽이라지만, 애초에 성(城)은 한정된 공간이다. 특히나 날로 번영하고 있는 브래들리 후작가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그 상주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폐건물가라 해도 어느 정도의 인적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이루기라도 하려는 건지 다른 존재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니, 그들로 인해 보통의 인간이 오지 못했다 보는 게 맞으리라.
“그만 나오지? 거북할 정도로 느껴지니까.”
참다못한 론이 입을 뗐다.
“놀랍군. 일전에 봤던 정령사와 성직자들은 코앞까지 가서야 알아차리던데, 대정령사 혹은 주교급 성직자라도 되는 건가?”
폐건물가 곳곳에서 마인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그들 중 여유롭게 말을 거는 이.
바로 캬밀이었다.
“정령사와 성직자···?”
생각지 못한 얘기에 론의 머리가 갸웃했다.
“세상 고고한 척하길래 잡아다 놨더니, 그때서야 알아차리더군. 보이지도 않는 신을 부르짖는 게 그래도 꽤나 볼만 했지.”
캬밀이 차분하게 읊조렸다.
과연 마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차가운 이성. 그것이 지금의 캬밀을 만들었다.
“아, 혹시 보고 싶으면 말하게. 지금도 외성 지하 감옥에서 마기에 중독된 채 살아가고 있거든.”
캬밀이 마치 큰 호의라도 베푸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
산 자를 제물로 바치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구속해 강압하는 자들이란 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치가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오로지 마계를 향한 순수한 분노.
그 의지에 자연이 반응했다.
화르르륵.
슈아아아악.
멸마의 불꽃과 땅의 성수가 오라처럼 론의 주위를 넘실거렸다. 이는 최근에 하위 마법들을 펼칠 때 마법진을 생략하던 것과는 또다른 경지였다.
[론···?]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홍염이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론의 존재감에 당황했다.
정(精) 혹은 정령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기본으로 삼는 것이 바로 존재감이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존재감 없는 놈’이라 말할 때의 그 존재감이 맞다.
존재감은 힘이 강해서 혹은 방대한 마나를 보유해서, 또는 상당한 무술과 마법을 지니면서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땅에서 가장 원초적이면서 거대한 존재감은 바로 간섭률이다.
다른 말로는 지상계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정도.
철벅 철벅.
“음? 바닥이 갑자기 이상한데?”
“뭔 같잖은 수를 펼치려고···.”
론을 둘러싸고 있던 마인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 어떤 강력한 힘 혹은 마법을 선보인 게 아니었다. 그저 조금 전까지 마른 땅이던 곳이 순식간에 늪지처럼 갯바닥으로 변하고 있었다.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위화감의 정체를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치이이이익.
“끄아아아악!!!”
“미친!!! 크윽! 뭐야?!!!”
“꺄아아아악!!! 바, 발이 녹고 있다고!!”
그렇다. 마른 땅이 갯바닥이 되도록 흥건하게 만든 건 땅의 성수였다.
“네놈들이 결백하고, 그저 마기에 중독되어 그런 거라면 성화와 성수 앞에 증명해 봐라.”
론의 그 말을 끝으로 시뻘건 불길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시각,
브래들리 후작의 집무실.
“여, 영주님!!”
“알고 있다, 소란 떨지 마라.”
현 브래들리 후작가의 가주 에드원이 급히 찾아온 집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창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군사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북문을 제외하고 동서남 세 곳의 출입문이 훤히 보이는 높은 곳. 그곳 바로 영주 집무실이다.
때문에 에드원은 그 누구보다 방금 전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지켜볼 수 있었는데, 이제껏 담담하던 그의 얼굴이 살짝씩 떨리고 있었다.
‘단순한 불길이 아니다.’
‘이 먼 거리에서도 선연히 느껴지는 꺼림칙함.’
‘사도들의 마기까지 모조리 지워버린 힘.’
에드원이 직접 보며 느낀 것에 대해 냉정히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돌아갔다.
‘이동한다.’
의문의 존재가 가고 있는 방향.
그 끝에는 외성 수비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만 보자···.”
외성 수비대 대장 캬밀.
휘하의 수많은 사도 급 전력 중에서도 가장 냉철한 이성을 지녔던 자. 그래서 누구보다 본능 통제를 잘 하였기에 공직 자리까지 임명했었다.
실제로도 공직 임무를 곧잘 수행했기에 쭉 놔두었었는데, 그런 그가 몇 년 새 흥미로운 보고서들을 내놨었다.
바로 정령사와 성직자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타락.
피식.
이제껏 굳어 있던 에드원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렇지. 응당 선인이라면 사람을 구해야지. 내가 좀 더 괜찮은 무대를 꾸며줘야겠군.”
사악한 간계가 그의 머릿속에 찬찬히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