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02
티발루 왕국의 브래들리 후작가.
추정 거주 인구수만 100만을 넘어서는 거대 영지다. 규모만 놓고 보면 티발루 왕성과 국왕 직할령의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때문에 당시 브래들리 후작가는 왕실 관료 및 지방 영주들의 견제를 수없이 받아야 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순 없는 법.
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하나여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귀족들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브래들리 후작들은 끊임없이 영지 발전 사업을 꾀했고, 그 번영 수준은 티발루 왕국 내에 더 이상 따라올 곳이 없었다.
내전 혹은 반역.
당연히 티발루 왕국 내 영주들과 인접국들은 곧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측했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권력의 정점은 바로 ‘왕’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예견했던 전쟁을 벌어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를 먹기 위해 손을 잡겠지.’
탁월한 영지 발전 사업으로 번영을 이룬 선대 브래들리 후작은 이를 꿰뚫어 보았다.
영지전을 비롯한 내전 등은 단순히 당사자들 간의 전쟁이 아니다. 온갖 협정 협약이 오가며 동맹 및 용병들이 끼어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익이 되니까.
그리고 정세상 브래들리 후작가는 너무도 먹음직스러운 땅덩어리였다.
왕권을 노리고 전쟁을 펼쳤다가는 자칫 티발루 왕국 내 모든 영지와 전쟁을 벌일 수도 있었는데, 동맹들에게 점령지 수익을 나눠준다고 해도 효율적 측면이나 정통성 측면에서 너무나도 불리했다.
군사력이 부강하여 떠오른 영지도 아니고 사업을 통해 번영한 영지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티발루 왕국 전체를 상대해서 그저 그런 보상을 얻느니, 브래들리 후작가를 상대해 그 이상의 수익을 나누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말이었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번영한 시기, 브래들리 후작가는 티발루 왕성에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내전 혹은 반역이라는 말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벌써 40년도 더 된 얘기지만···.”
각진 등받이가 위로 우뚝 솟은 의자. 그곳에 앉은 중년 사내가 말했다.
눈가에 살짝 걸친 주름을 제외하면 이십 대라 봐도 무방했으나, 그의 나이는 이미 육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당대 브래들리 후작,
에드원 브래들리였다.
선대 브래들리 후작의 굴욕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사내.
가장 눈부셨던 가문의 영광을 제 손으로 가려야 했던 후계자.
한 영지의 군주라기보다는 타 영지 혹은 타국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던 영주.
그 씁쓸한 과거에 에드원 브래들리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날부로 단 한시도 잊지 않고 칼을 갈았었다. 그런데 결국 네놈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말이렷다? 총관.”
한쪽으로 치솟은 에드원의 입꼬리가 쉴 새 없이 꿈틀거렸다. 내심 차분한 목소리를 내뱉었으나, 그 속은 뒤집힌다는 얘기였다.
“예, 영주님.”
그리고 이를 익히 봐 온 총관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명을 기다렸다.
“프라하와 플로라의 피해 사태 보고, 사도 급으로 보내서 샅샅이 확인해서 보고하도록.”
“사도 급으로. 예, 알겠습니다.”
일전에 코르테즈가 입에 담았던 사도.
성좌 아래 그 성좌를 보좌하는 자들을 사도라 일컬었는데, 그 개개인의 힘은 6서클 마도사의 수준을 상회하는 정도였다.
“쓸모없는 것들···. 이 브래들리 가문의 핏줄이란 것들이!!”
표정은 일그러질지언정 언성만큼은 차분히 하던 에드원의 목소리가 결국 치솟았다.
이틀 만에 멀쩡하던 두 대도시가 지워져 버렸다. 사실 도시민이나 주거지 및 생활 필수 건물들은 그대로였지만, 행정관 관저와 대형 검투장이 통째로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이를 맡겼던 두 아들까지도.
대형 검투장이 무엇인가.
최근 브래들리 후작가에서 야심 차게 계획한 사업이었다. 겉으로는 만인이 즐길만한 행사였으나, 그 실상은 마기의 대량 수급이라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올해로 5년이 됐지만, 그 성과는 이미 확실했다.
오랜 유물에서 발견한 흑마법으로 반타 블랙을 비롯한 각종 마계의 힘들을 이 땅에 끌어왔다.
에드원 그 또한 가장 앞장서서 마기를 수용했고, 이제는 6서클 마도사를 넘어 대마도사, 혹은 오러 마스터가 온다고 해도 밀리지 않을 힘을 갖추게 되었다.
때문에 티발루라는 북부의 조그만 왕국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씹어 먹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재가 뿌려졌다.
중요한 마기 수급처인 두 곳이 박살 난 것. 그리고 죽어버린 두 아들이 가지고 있던 반타 블랙은 마기 수급의 핵심 아트팩트였다. 그런데 그 반타 블랙마저도 회수 여부가 불분명했다.
“그런데 말야, 다른 곳도 아니고, 검투 시합이 열리는 프라하와 플로라의 행정관 관저와 검투장만 확실히 박살냈다라···.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야.”
분노를 곱씹던 에드원이 눈을 얇게 떴다.
“총관.”
“예, 말씀하십시오.”
프라하와 플로라 도시의 반파는 집무 이래 역대급 사건이었기에 긴급 보고를 마친 총관이 서둘러 사태 수습을 위해 움직이려 했었다. 그런데 영주 집무실을 나가려던 그를 에드원이 붙잡았다.
“게으른 돼지들 중에는 마기를 감별할 자가 없다. 라스카 교국 아니면 독자 세력일 터, 현 시간부로 사도 급 전력을 모두 성벽 수비대에 편성시켜라.”
“예?”
이제껏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총관의 얼굴에 당황함이 깃들었다.
브래들리 후작가의 현 전력은 과거 굴욕의 때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였다. 마인화 작업을 통해 수많은 마법사 및 전사들이 마도사 혹은 오러 마스터 급의 전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국의 군대쯤은 아무렇지 않게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걸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에드원의 대처.
허나 십수년간 그의 곁에서 보좌해 온 총관은 그저 묵묵히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미친놈일지 모르니 출입문도 항상 예의 주의하도록.”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총관이 깍듯이 부복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두 도시의 파괴자가 정말로 정문을 통해 발을 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흐음, 재밌는 놈이 왔군···.”
잠자코 외성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한 사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성벽 아래를 쳐다봤다.
출입문 앞에 늘어선 기다란 대기줄 속에서 유독 그의 감각을 곤두세우는 자가 있었다.
외모는 아무리 많이 쳐줘도 십대 후반일 것 같은 청소년. 그런데 그런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 주변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순수했다.
“얼굴도 제법 반반하게 생겨서 말야, 재미 좀 볼 수 있겠는 걸? 스읍···.”
5년 전 브래들리 후작성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검투 시합에 참가했다가,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었던 자. 그리고 다시 마인화를 거쳐 오러 유저로까지 올라선 히글라우드가 입맛을 다셨다.
“잠시 순찰 좀 갔다 오지.”
“어디 또 괜찮은 녀석이 눈에 들어오셨나 봅니다, 히글라우드님?”
“뭐 제법 반항해도 맛있을 거 같아···.”
히글라우드의 기괴한 성벽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던 성벽 경비대 간부는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현재 브래들리 후작가에는 후작 직속 특무대가 있다. 그들의 역할은 영지 소속 기관의 감찰과 영지 보호 등 다양했는데, 히글라우드는 꽤 오래전부터 외성 수비대를 자주 드나들었었다.
가진 바 막대한 권한이 있음에도 강짜를 부리기는커녕 오히려 편의를 봐주기에 수비대 간부들 입장에서도 나쁘진 않았는데,
딱 하나.
기괴한 점을 꼽자면,
바로 성벽이었다.
지금도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뜬 그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동성애였다. 그리고 그 동성 중에서도 유독 어린 남자에 미치는 그가 어느새 성벽에서 사라졌다.
**
“흠흠~ 첫 만남은 항상 경건해야지.”
히글라우드에게 있어 외성 출입문은 아주 중요한 만남의 장소였기에 그 위병소에는 그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곳에서 말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가 곧장 옆 건물인 별관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총관을 통해 예상치 못한 명령을 받긴 했는데, 성벽 수비대는 그에게 늘 있는 일이었다.
“성직자 혹은 정령사같이 순수한 힘을 다루는 자를 포박해 간다라···. 영주님. 그래도 영주님 앞에 대령하는 것인데, 제가 한 번 검사는 해 봐야지요. 큭큭큭···.”
딱히 목숨을 해할 마음은 없었다.
이제껏 그런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저 그런 자들의 순수함을 짓이길 때마다 차오르는 쾌락은 도저히 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히글라우드는 이곳에서 마인으로 각성한 뒤 처음 느껴볼 정도로 커다란 순수한 기운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마치 전투를 벌일 때처럼 신속했다.
그렇게 단 몇 분 만에 주파한 별관.
현재 검투 시합 참여자 대기소로 쓰이는 만큼 수용 인원은 상당했는데, 히글라우드의 감각은 정확하게 론의 위치를 꼬집어냈다.
“히, 히글라우드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히글라우드의 얼굴을 알고 있던 한 위병소 병사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경례를 했다.
“아, 뭐 그냥, 아니, 영주님께서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야.”
성벽 위에서 볼 때만 해도 남다른 기운의 소유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코앞 거리에 이르자 생각보다 그 기운이 훨씬 순결했다.
마기와는 대척점에 선 듯한 기운.
숨을 들이쉬는 족족 마기로 변형된 신체가 비명을 질렀지만, 히글라우드에게는 그 고통마저도 쾌락이었다.
“스읍···.”
적당히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론을 빼가려던 히글라우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아, 예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이름이나 인상착의라도 알려주시···.”
“아니, 괜찮네. 자네는 그냥 있게나.”
“아, 예 그러면···.”
뻘쭘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는 병사를 뒤로하고는 히글라우드가 바삐 안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 사이마다 방들이 있었지만, 그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단 한 곳.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 선명한 기운으로 자신을 미치게 만들던 그 자가 있는 방.
그곳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껏 움찔움찔하던 표정은 어느새 얼음장처럼 굳었고, 지극히 공적인 어조로 돌변한 히글라우드.
거사 직전, 항상 상대를 방심시키던 그의 오랜 수법, 포커페이스였다.
“뉘, 뉘신지···?”
외모와 분위기에 압도되어 방에 있던 자들이 말을 더듬었다. 불과 몇 분 전 세상 무서운 것 없다는 태도로 론에게 면박을 주던 덩치의 사내도 눈치를 봤다.
“테르미노, 혹시 너를 찾는 건가···?”
론의 옆에 있던 엘가딘이 일전에 그가 소개했던 가명을 언급하며 말했다.
“예, 맞습니다. 테르미노님,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히글라우드가 다시 한번 론에게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는 놈이지?’
론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잠입을 생각하고 있던 그였는데, 어떻게 안 것인지 영주 측에서 먼저 다가왔다. 그것도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인을 통해서.
[론!]
홍염의 경고가 론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또한 품 안의 시엘도 꼬리를 달달 떨며 경계를 표했고 말이다.
허나 그런다고 해서 물러설 론이 아니었다. 피할 이유도 없었고.
“예, 가시지요.”
론의 날 선 감각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차분해 보이는 저 중년인의 얼굴 안에는 지금 마기가 아주 날뛰고 있음을.
“그럼 이쪽으로.”
깍듯한 예법으로 자연스럽게 론을 앞장서게 한 히글라우드. 그가 음습한 미소를 숨긴 채 뒤에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