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100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문의 존속을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위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그렇게 수많은 자들이 목숨 바쳐 어둠의 세력에 저항했었다.
하지만 만사에는 다 때가 있다라는 걸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매번 한 발짝씩 앞선 어둠의 세력은 결국 아틀란샤 대륙을 집어삼켰다.
기득권들은 제 것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탐욕에 물든 이들은 친히 어둠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완전히 기울어버린 운명의 시계추.
더 이상 이 땅에는 기회가 없었다.
저항하는 곳은 불모지가 되었고, 이 땅의 그 모든 것이 마계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
“그 후론 어떻게 되었을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론이 무심결에 내뱉었다.
회귀 전 절망으로 가득 찼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곳의 풍경이 절로 비교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플로라 도시의 명소 노을 언덕.
저녁 무렵 이곳에 오르면 그 이름대로 석양의 빛을 가득 담고 있는 분지의 도시가 눈에 훤히 들어온다.
곳곳에 화사하게 핀 꽃들과 그 향기는 이곳이 그 척박한 북부라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할 정도였다.
새액 새액! 새애애액.
갑작스럽게 들리는 시엘의 울음소리.
[꼬맹이가 또 장난치나 봐!]
홍염이 론을 다그쳤다.
사실 하는 말이나 행동은 누가 꼬맹이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지만, 홍염은 늘 어른 행세를 하며 시엘을 대한다.
지금도 짐짓 어른인 척 말하고 있지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분은 아주 신나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현신하지 않았을 뿐.
[론, 빨리 가보자!]
피식.
‘그래.’
마기를 소각하며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더러운 현실, 그리고 추악함. 그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순수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껏 무거워지려던 론의 머릿속은 시엘과 홍염을 따라다니느라 어느새 가벼워지고 있었다.
***
프라하 도시에서 그랬던 것처럼 론이 행동을 개시한 시각은 밤이었다.
기습과 침입에 유리한 시간.
그리고 브래들리 후작이 만들어 놓은 이 검투 시합 문화로 인해 사실상 대낮에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공분까지 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착잡함을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때문에 론은 단순히 느껴지는 마기에 반응하며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저택과 그 울타리. 프라하 행정관의 관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여긴가.”
론의 서늘한 눈동자가 일대를 훑었다.
그리고 마기가 느껴지는 생명체는 약 사십여 명. 느껴지는 마기의 크기도 프라하 도시와 대동소이했다.
론이 거침없이 울타리 안으로 파고들었다.
“누구냐!”
“웬 놈이 침입했다!!!”
“순찰조는 집결하고, 대기조를 호출해라!!”
‘윈드 애로우.’
슈우우웅.
“컥!!”
“끄르르륵···. 치, 침입자가···.”
“조, 종을···.”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몇몇은 가벼운 공격으로 기절만 시킨 채 나아갔다.
프라하의 행정관 프라비츠가로부터 들었던 반타 블랙의 사용법. 가장 고효율 에너지원인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는 그 사실 때문에 론은 더 서둘렀었다.
하지만, 여기 플로라 도시도 이미 늦은 것인지 행정관 관저 내에는 그저 마기만이 풀풀 풍길 뿐 평범한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 분기 검투 노예들은 벌써 제물이 된 건가···.”
일전에 프라하에서 한 노인에게 설명 듣기로 모든 도시가 동일하게 총 여덟 번의 검투 시합을 벌인다고 했었다.
그 얘기인즉, 분기마다 어느 도시든 백여 명이 넘는 검투 노예가 생긴다는 말이었는데, 이곳 플로라 행정관 관저에는 그만한 무리의 인간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다다다.
그저 간간이 달려오는 몇몇 사람들.
아니, 마인들이 있을 뿐이었다.
화르르륵.
어두운 밤을 가르며 쏘아진 불의 창이 마인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렸다.
인간의 욕심과 기대를 미끼로 수많은 이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넣은 자들. 화인 마법을 시전한 것도 아니었으나, 론의 주위로 불길이 일었다.
마기에 대한 강력한 분노.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분쇄 의지가 멸마의 불꽃으로 형상화되었다.
“행정관을 불러와라.”
콰아앙.
“행정관.”
쾅.
콰앙.
퍼어어엉.
론이 내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으나, 그들은 그러한 자비를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 미친놈이!! 죽여!! 어떻게든 죽이라고!!”
그나마 이성을 간직한 몇몇도 있었지만, 없는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마인의 소각은 물론이었고, 론은 행정관 관저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사람의 목숨값으로 부와 명예를 쌓아 올린 곳이었다. 절대로 다른 누군가가 답습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결국 다다른 마지막 건물.
“웨, 웬 놈이냐?!”
판이 박힐 정도로 익숙한 행동 양식과 지니고 있는 마기가 그가 누구인지 설명해 주었다. 바로 플로라 도시의 행정관.
관저 곳곳에서 폭음이 들리고, 마인들이 사라져가니 아마 깜짝 놀랐으리라.
하지만 그런 행정관의 놀람과는 별개로 론의 분노는 빠르게 형상화되었고,
후우우웅.
슈아아아악.
퍼억.
허공에 불꽃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그대로 행정관의 다리에 꽂혔다.
“끄아아아악!! 내, 내 다리!!!”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건 신경도 안 쓰면서 제 다리는 악착같이 지키려는 그의 모습에 론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래서 몇 명이나 바쳤지?”
“뭘 말하는 게야?!! 이 미친놈이!!”
고통과 분노로 점칠 된 행정관이 발악했으나, 론의 불꽃이 더 빠르고 강력했다.
치이이이익.
“으아아악!!”
“지금껏 반타 블랙을 비롯해 몇 명의 인간들을 바쳤냐고 물었다.”
물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홍염과의 일체화를 통해 멸마의 불꽃을 다루게 된 론이었기에 그는 자유롭게 불을 끌어냈고, 그대로 행적관의 사지로 향했다.
“아아악!! 제바아아알!!!”
**
아침 햇살이 어둠을 밀어낼 때쯤, 플로라 행정관 관저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아, 아버지께서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단말마라 하기에는 지독한 저주가 담긴 표현. 그것으로 행정관은 끝이었다.
[쬐끄만한 게 입만 살아가지고!]
맡은 바 소임을 다했기 때문인지 홍염이 한껏 고양된 감정을 표출했다.
새액 새액 새애애액.
그리고 어느새 그 곁으로 간 시엘. 대충 들어보니 홍염과 비슷한 얘기를 떠들어댔다.
고대 불의 정령과 신수.
둘 모두 이 땅의 섭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개체들이다. 그 존재 이유가 더 할 수 없이 순수하고 지고하기에 보통의 인간들은 교감할 수 없는 것들.
그런데 문득 론은 그런 홍염과 시엘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딱히 어둠의 세력을 옹호한다거나 멸마의 의지를 꺾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 마인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순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전 세계에 마계의 씨앗은 퍼졌다.’
‘추종자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니 새끼 혼자 날뛴다고 해서 대세가 바뀔 거 같아?!!’
‘네 놈이 그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 의지를 꺾지 않았던 플로라 행정관. 그는 수많은 사람을 바쳐 이곳 플로라 도시를 마기에 얼룩지도록 만든 장본이었지만, 그 또한 이 땅의 사람이었다.
이루지 못한 부귀영화의 꿈.
그리고 그것에서 비롯된 시기, 질투, 탐욕.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이 땅의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단지 그러한 자들에게 옷을 입히고, 이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무기를 쥐여 준 게 마계였을 뿐.
그렇다면 마계를 떠나 그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인간은 이 땅의 존재로서 합당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어가는 이 자연의 역사에서 과연 인간은 순리인가 아니면 모순인가.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듯 문득 떠오른 의문이 론의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그리고,
[론! 아침이야!!]
새애애액 새액!!
그 못지않게 론을 정신없게 하는 두 녀석. 빨리 다음 지역으로 가자고 보채는 것이었다.
“그래 가야지.”
원래라면 해가 뜨기 전 도시를 떴겠지만, 오늘은 좀 늦장을 부렸다.
‘때아닌 사춘기도 아니고···.’
이내 무거운 생각을 떨쳐버린 론이 머릿속으로 찬란한 빛을 떠올렸다. 티 없이 맑은 빛.
화아아아앗.
이윽고 실체화된 빛이 론을 그대로 집어삼켰고, 그 자리에는 그저 건물의 잔해만이 있을 뿐이었다.
**
우우웅우웅.
우우웅.
높디높은 상공.
플로라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론이 복합마법진을 펼쳤다.
‘복합마법진도 오랜만이군.’
히드라 봉인지를 찾으러 알펜샤 왕국에 들렀을 때부터 줄곧 체외서클과 기초 원소마법 파이어만 사용했던지라 오히려 복합마법진이 어색한 론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명상과 깨달음이 헛수고가 아니라는 듯 이전보다 훨씬 단단한 내구성의 정팔면체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복합마법진의 내구성은 가용 마나 용적과 직결된다.
원소변환, 중첩, 밀도, 속도, 집약, 폭발, 확산, 융화. 각각의 면에 새겨진 마법식들이 미친 듯이 마나를 빨아들였다.
‘이 정도면··· 5서클 수준이 아닌데?’
그 생소한 감각이 론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마기니, 마인이니 뭐니 해도 결국 론은 마법사다. 현상의 법칙을 깨우치고 다스리는 게 지루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론은 어디 한 번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체내의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윽고 빛을 발하며 회전하기 시작한 복합마법진.
‘파이어 레인!’
불과 몇 개월 전 아카데미의 플라델 미로에서 연습 삼아 펼쳤던 것인데, 그때와는 아예 다른 마법이 튀어나왔다.
미로에 있던 당시에는 공간이 제한되고, 바로 코앞에다가 시전할 수 없었기에 4서클 광자화 마법까지 겹쳤었다. 즉, 중첩마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그냥 바로 아래로 쏘면 되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아앙!
본래라면 폭발과 함께 2서클 파이어 애로우가 빗줄기처럼 쏟아져야 했는데, 지금은 그 폭발부터 규모가 달랐다.
고막을 울릴 정도의 폭음과 진동이 일대를 채웠고, 이어 작은 불화살이 아닌 커다란 불덩이들이 대형 검투장으로 쏟아졌다.
콰앙.
콰아아앙.
콰아앙.
놀란 도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제껏 살아오며 이런 일은 처음일 것이다. 마른하늘에 불벼락이라니.
하지만 확실히 경고할 필요는 있었다.
멋대로 사람들을 바치고 마계의 것을 이 땅에 가져오는 자들에게 말이다.
이른 아침.
대형 검투장 내에는 사람이 없지만, 주위로 사람이 다니기에 내부만을 노린 것이었는데, 불과 몇 분 만에 반파되어버렸다.
“아이고, 이게 무슨 말세야···.”
“프라하 도시의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구먼! 아아···.”
“대, 대흉악범이다!!!”
“저기 저 하늘에 떠 있는 자가 범인이다!!”
“대악마! 살인자!!”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브래들리 후작가의 악행과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론이 분투노력하고 있음을.
그저 손가락질할 뿐이었다.
[왜 너한테 뭐라 하는 거야!]
새액 새액!
그런 시민들의 부정적 반응이 불쾌했는지 홍염과 시엘이 도리어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론의 표정은 그저 차분하기만 했다.
‘뭐 이것도 다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바람 마법으로 공중 부양을 하고 있던 론이 고개를 돌렸다. 브래들리 영지에서 가장 강력한 마기를 보유한 곳.
“그러니 빨리 끝내자.”
브래들리 후작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