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98화 (98/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8

“서, 설마 저게··· 성화(聖火)라고?!”

나이르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극적인 자연의 힘, 성화 혹은 성수가 강력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 지상계가 바로 그 자연의 힘을 근간으로 이뤄진 곳이기 때문이다.

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마기. 나이르는 순간 사고가 정지하는 것 같았다.

마기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 누구를 보든 포식자처럼 깔보듯 했었는데, 이것은 눈앞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천적과 다름없었다.

“완전히··· 마기 덩어리군.”

불쾌감이 가득한 말투.

론이었다.

화인의 상태에 이어 홍염과 일체화까지 되자 마기가 훨씬 선연히 느껴졌다.

코르테즈의 눈과 서클이 마기로 오염됐다면 눈앞의 이들은 신체 자체가 그냥 마기 덩어리였다.

회귀 전 듣긴 했었다.

마기에 오래도록 잠식당하면 신체가 아예 재구성된다는.

그런데 지금 론의 눈에는 그것이 훤히 보였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고, 더 이상 이 땅의 존재가 아니게 된 자들의 모습을.

가만히 있어도 뿜어져 나오는 그 음습한 기운. 이에 론의 불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화르륵.

시시각각 멸마의 불길이 주변의 마기를 소각했다.

“미친!! 이러다 다 죽어!! 어떻게 해서든 죽여!! 죽이라고!!!”

당황한 나이르가 뒤따르던 수하들에게 외쳤고, 그들이 곧 반응했다.

한때는 귀족 작위라는 부귀영화를 꿈꾸며 검투장에 발을 들였으나, 지금은 그저 마기 덩어리가 된 검투 노예들.

“크하아아아악!!!”

나이르의 사생결단 때문이었는지, 그 수하들이 숨기고 있던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선 론의 눈에는 자비가 없었다.

존재 자체로 이 땅의 조화를 어그러뜨리는 마계의 것들.

불길이 돼버린 론의 손이 쫙 펴지는 순간, 그의 몸 주위로 여러 개의 원이 생성됐다.

우우웅.

우우우우우웅.

다중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마법진이 담고 있는 것은,

슈아아악.

파이어 스피어였다.

콰아아앙.

쾅.

“케헥!!”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나이르의 부하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완전한 소각.

멸마의 불꽃이었다.

“이건 뭐 정화도, 일부 소각도 안 되는군.”

적당히 마기만을 없애고 심문하려던 론이었는데, 멸마의 불꽃이 닿자 그대로 신체까지 다 불타 사라졌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여전히 그 불길의 기세를 꺾지 채 론이 말했다.

사실 당장이라도 나이르를 없앨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듣고 싶었다. 브래들리 후작가 혹은 그가 아는 무엇이라도.

왜냐하면 이제 막 브래들리 후작가의 땅에 발을 디뎠을 뿐인데, 생각보다 그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마기에 오염된 사람들이라든가 정기적으로 검투 시합을 통해 데려가는 노예들의 처우 결과라든가 등등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대놓고 물을 순 없었기에 짐짓 여유로운 자세로 말한 것이었다.

“감히 네놈 따위가 차기 브래들리 후작님이 되실 분의 계획을···.”

“흐음? 뭐 네가 떠받드는 자 가문의 유력 후계자라도 되는가 보지?”

애써 심드렁한 반응.

“유력 후계자가 아니라, 차기 후작님이란 말이다!!”

주군의 택함으로 새 삶을 얻게 된 나이르는 그 누구보다 프라비츠가를 위해 헌신했었다.

가문의 후계자는 물론이고 차기 후작까지 되어야 했는데, 그것을 옆에서 볼 수 없게 되자 나이르에게 남아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죽어라!! 어짜피 네놈은 반타 블랙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나이르가 그 말을 끝으로 하박과 어깨, 허리에 보관해 두었던 툴라네스카 거미줄들을 풀어냈다.

툴라네스카.

이 땅에 존재하는 거미류 생물체 중에서 가장 질긴 거미줄을 만들어내는 몬스터이다.

다만 없어 못 구할 정도로 희귀했는데, 나이르의 능력을 아는 프라비츠가가 애써 구해다 준 것이었다.

“네놈이 뭔 짓을 하든! 브래들리 후작가의 대계는 이뤄진다!!”

잔뜩 일그러진 나이르의 얼굴.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론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무거워졌다.

그저 단순히 악이라 칭했던 자들, 이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자들은 실상 그렇지 않았다.

그 이성까지 활용해 이 땅을 지배하려는 모습에 론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쉬이이이익.

이내 곧 나이르의 몸에서 마기의 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후우우웅

서걱!

측면에서 갑자기 불어온 바람.

그 바람의 칼날이 나이르가 쏟아낸 마기의 실들을 끊어버렸다.

새애애액!!

시엘이 어서 없애라고 소리친다.

[오오, 꼬맹이가!]

잠자코 있던 홍염이 반갑다는 듯이 외쳤다.

그리고 덕분에 생긴 빈틈에 론은 불길을 거세게 일으켰다.

화르르륵.

4층을 가득 채울 듯 크기를 키워가는 멸마의 불길.

한참 뒤,

그 불길이 사라지고 났을 땐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새액 새액.

시엘이 론에게 다가왔다.

새애애액.

어서 화인화 상태를 풀라는 녀석의 울음.

‘그런데 방금 그건 신수라서 가능했던 건가.’

보통의 힘으로는 마기에 대항할 수 없는 게 상식이다. 헌데 방금 시엘이 선보인 바람의 칼날은 마기를 끊어냈다.

하지만 시엘은 그저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새액?

그 순진한 모습이 귀여워 론이 손을 뻗었다. 화인 상태로 인해 불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불을 다루게 된 녀석이었기에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엘을 몇 번 쓰다듬고는 론이 고개를 돌렸다.

화인 상태는 무한이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그리고 중간중간 마법이나 크기를 키울 때마다 마나를 소진했기에 서둘러 할 일을 마쳐야 했다.

때문에 론이 향한 곳,

4층에 남아있는 유일한 물체, 검은 액자였다.

‘반타 블랙 이라고?’

인사불성 상태의 나이르가 무심코 내뱉었던 말들. 그중에 분명 ‘반타 블랙’이라고 말했었다.

반타 블랙.

론도 과거에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흡수하는 물질.

그런데 단순히 흡수만 하는 게 아니었다. 일정량을 초과하면 그것은 하나의 게이트가 된다고 했었다.

당시 희미하게 떠돌던 소문.

결국은 자신이 확인해 봐야 했다.

“누가 봐도 마기 덩어리인데···.”

다만 그럼에도 멸마의 불꽃에 소각되지 않는다는 점이 론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믿자. 자연의 섭리를.’

분명 물의 궁전에서 정령왕 오비니트를 만났을 때, 그가 말했다.

아직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니, 자신에게 주어진 조율자의 힘을 전한다고. 그리고 그 힘은 바로 고대의 힘이었다.

땅의 성수 혹은 멸마의 불꽃.

일부 사람들에게는 성수 혹은 성화라 불리는 것들 말이다.

론이 숨을 골랐다.

이 땅의 이치와 순리를 어지럽히고, 붕괴와 혼돈을 야기시키는 마계의 힘.

반드시 소각시켜야 했다.

론은 그 자신이 화인 상태라는 것도 잊은 채 가진바 모든 마나를 풀어냈다.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응집되는 마나들. 이내 그 구심점을 형성하더니 빠르게 주변의 마나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렇다. 바로 체외서클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론이 화인 상태라는 점.

론의 의지로 인해 모여든 마나들이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예의 그 액자, 반타 블랙은 끊임없이 체외서클로 모여드는 마나들을 흡수하고 있었는데, 순간 그 틀이 흐물흐물하기 시작했다.

형체 변형.

수용 범위를 초과해 이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우우우웅.

갑자기 퍼져나가는 검은색 물질은 이내 직경 2미터가량의 원이 되었다.

그리고 론이 그 형태를 인식하게 무섭게 그것에서 무언가 뿜어져 나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미친! 마기가 무슨!”

아지랑이처럼 주위를 어그러트리는 엄청난 양의 마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안 돼!!!”

그 찰나의 순간.

론이 이제껏 모은 체외서클에 손을 뻗었다.

‘반드시 없앤다!’

[소각해버려!!]

론과 홍염의 강력한 의지가 맞닿았고, 그것이 곧 발화점이 되었다.

콰화아아아앙.

건물 벽이 다 터져 나갈 정도의 거대한 불길이 론 앞에서 터져 나왔다.

**

“하아···. 좋아, 그래. 더 해 봐.”

나신의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한 남자.

최근 준비했던 검투 시합이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자 한껏 휴식을 만끽하는 프라하 도시의 행정관, 프라비츠가 브래들리였다.

간만에 근심 걱정들을 모두 내려놓고 쾌락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콰아아아앙.

귓가를 은은히 울리는 폭음과 진동이 그의 향유를 중지시켰다. 평소라면 건물이 무너지든 도시민들이 죽든 신경도 쓰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폭음 뒤 밀려오는 꺼림칙한 기운.

본능적으로 그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행정관님?”

“나으리, 무슨 일 있는 걸까요?”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어요!”

그저 폭발 소리에 긴장한 여인들과 달리 프라비츠가는 점점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나, 나이르. 나이르! 나이르 어딨어?! 나이르!!”

프라비츠가가 허우적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위에 있던 여인들이 의아해했지만,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폭음의 발원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선연히 느껴지는 한 기운.

그 기운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지워버릴 것 같았다.

프라비츠가가 대충 나이트가운을 걸쳐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니 도망치듯 뛰어나갔다.

“나이르 어딨냐고!!!”

자신이 변형시킨 인간 중 가장 쓸만하기에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한 수하였는데, 지금은 그의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부재 혹은,

“주, 죽은 건 아니지? 나이르?”

이제껏 그 누구보다 자신의 말을 잘 따른 수하였다. 때문에 그 비싸다는 툴라네스카 거미줄도 구해다 주고 그랬던 것인데, 지금 그의 곁에는 없었다.

소름 끼치도록 선연한 한 기운만이 느껴질 뿐.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본능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공포.

그런데 그것이 더욱 프라비츠가를 패닉에 빠지게 한 이유는 그의 아버지 브래들리 후작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마계의 힘을 흩뜨리는 조율자들의 개입이 있지 않은 이상, 이 땅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그 조율자들이 나서면 어떻게 하냐고?’

‘그 조율자들이 나설 땐, 이미 마계의 지고한 존재들이 이 땅에 강림하고 난 후다.’

분명 아직 마계의 지고한 존재, 마족들은 강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궤를 달리하는 힘이라니. 프라비츠가는 구분되지 않는 현실과 그 엄청난 힘으로 인해 점점 사고가 붕괴되어 갔다.

“아! 맞다!! 반타 블랙!”

자신들의 힘을 무한히 늘리며, 훗날 마족들의 강림에 발판이 될 반타 블랙은 아주 귀한 아티팩트였다.

일명 마계 게이트.

일정량의 에너지를 수급하면, 그것을 대가로 해서 마계 것을 이 땅에 쏟아내는 아티펙트다.

그리고 그런 반타 블랙의 고효율 에너지원은 바로 인간. 때문에 검투 시합까지 벌여 노예를 구해 바친 것이었는데, 그 가장 중요한 아티펙트를 놓고 갈 수는 없었다.

프라비츠가의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패닉에 빠진 그의 정신은 그곳이 바로 폭음이 들린 곳이란 걸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피부를 녹일 듯한 뜨거운 불길을 마주하고 나서야 프라비츠가는 그 발걸음을 멈췄다.

“네놈, 제 발로 찾아왔구나.”

프라비츠가로서는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불길. 그 미지의 존재가 그 앞에 나타났다.

일전에 그의 아버지 브래들리 후작이 말했던 존재.

“다, 당신이 이 땅의 조율자입니까?”

털썩.

프라비츠가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