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7
97화
“당신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간밤에 몰래 잠입한 이가 내뱉은 말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생뚱맞은 말.
하지만 론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그와 같이 생뚱맞게 생각한다면, 욕이라도 할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허나 론의 눈앞에 있는 사내들은 그렇지 않았다.
과거 마셔스 수림에서 코르테즈의 환술로 꼭두각시가 되었던 자들과 똑같이 개인의 의지와 생각은 사라진 듯했다.
후우우우웅.
그저 말없이 내질러오는 창끝.
그렇지만 론은 피하지 않았다.
화르륵!
코앞까지 다다른 경비병들의 머리 위로 현신한 홍염이 그대로 직격해버렸기 때문이다.
“커헉!”
“큭···.”
끝내 론에게 닿지 못한 창이 그들의 손에서 떨어지고, 그들 또한 쓰러졌다.
“어때?”
[머리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마기가 퍼져있어.]
이윽고 홍염이 피워 낸 멸마의 불꽃이 경비병들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의 몸에서 환한 불길이 사라지고 났을 땐, 이전의 마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숨은 붙어 있어.]
“고마워, 바로 움직이자.”
원래라면 그들의 상태까지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만, 지금은 촉박했다. 당장 건물 내에서 순찰 돌 듯 돌아다니던 이들도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론은 쓰러진 경비병들을 적당히 눕혀놓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
생존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
하나같이 자연 생태계를 이루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인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종교와 신, 평화와 각종 이념으로 고귀한 척 애써보지만 인간 또한 생태계를 이루는 하나의 동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어떤 동물보다 동족상잔을 흔히 일으키는 존재들.
털썩.
건물 안에서 순찰하던 마지막 경비병이 쓰러졌다.
총 여섯.
허나 그럼에도 각 층의 마기는 자욱했다. 이유인즉, 각 층에 환자들처럼 누워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무슨 치료소도 아니고···.”
차라리 병을 치료하는 치료소라면 다행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대놓고 사람들에게 마기를 주입하는 곳이었다.
시커메진 피부의 사람부터 하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해진 사람까지.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공통점은 마기에 중독돼 있다는 점이었다.
“후우···. 아까처럼 부탁할게, 홍염.”
[응!]
화르르륵!
1층의 순찰 경비병을 상대하는 동안 위층의 경비병들도 내려오는 바람에 한 번에 처리했었는데, 덕분에 론은 한층 한층 중독된 이들의 마기를 멸마의 불꽃으로 소각시키며 올라갈 수 있었다.
‘한 층당 누워있던 사람들의 수는 열 명 남짓.’
‘체내에 쌓인 마기의 농도는 제각각.’
‘하지만 층별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
‘시기의 차이라고 가정하면···.’
‘설마 분기별로 노예 삼은 이들 중에 추린 사람들인가?’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론의 직감은 그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문제는 그 이전 분기의 노예들은 어떻게 되었냐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서둘러 3층까지 마기의 소각을 마친 론은 더 둘러볼 것도 없이 곧장 4층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새, 새애애액!!
이제껏 조용히 있던 시엘이 잔뜩 긴장한 울음 내뱉었다.
명백한 경계.
“왜 그래, 시엘?”
론이 한쪽 손을 품 안에 넣고, 불안해하는 시엘의 몸을 쓰다듬었다.
새액 새액 새애애액.
하지만 멈추지 않는 시엘의 소리.
[뭔가, 뭔가··· 이상해. 저건 이 땅의 것이 아냐.]
홍염과의 일체화 연습을 통해 론 또한 마기를 느끼게 되었지만, 지금 홍염만큼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마기가 아니라고?’
경계하는 시엘과 주저하는 홍염.
문득, 론은 저도 모르게 마셔스 수림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생애 처음 마주했던 흑마법사. 함께 했던 아카데미의 아이들이 처참하게 쓰러졌었다.
단순한 선의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그들.
목숨을 내놓아야만 한다.
슈아아악.
론이 시엘을 쓰다듬던 손을 빼자 그의 양손에 천천히 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초 마법 워터.
하지만 그의 손에서 피어난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다.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로부터 전수받은 물의 이치, 땅의 성수였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홍염. 시엘. 너희는 물러나 있어도 돼.”
론의 눈빛이 초연했다.
죽음을 각오한 결의.
[뭐, 뭐라는 거야아! 누가 안 간데?! 가자!]
새액! 새애애액!
론의 강렬한 의지를 전달받기라도 한 건지 홍염과 시엘은 이전의 나약한 모습을 털어냈다. 아니, 털어내려 애썼다.
“그냥 위험한 게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는데?”
[뭐라는 거야! 계약자가 가는데 정령이 당연히 따라가야지! 갈 거야!]
새액! 새액!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치는 시엘.
“그런 악덕 조항을 너희한테 강요한 적은 없긴 한데···.”
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녀석이 앞다퉈 나섰다.
피식.
‘굳이 비장할 필요는 없는 건가.’
둘 덕분에 은연중 피어났던 긴장도 풀렸다. 그렇다. 한 번 사는 인생, 뜻한 바대로 미련 없이 산다면 후회는 없는 것이다.
그 각오와 의지, 그리고 함께 하는 이들이 그의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그렇게 오른 4층.
처음 느낀 감상은 휑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임시 건물을 보는 듯한 현장. 건물 외벽과 중간중간 기둥이 전부였다.
아래층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론은 더욱 경계하며 주위를 훑기 바빴다.
‘뭐지?’
아무리 뒤지고 뒤져봐도 생명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구조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빈 층.
[론!]
그런 그에게 홍염이 한 곳을 가리켰다.
창문을 통과한 한밤의 달빛이 훤히 비추는 한쪽 벽면. 그곳에는 웬 시커먼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아···.’
건물 밖에서도 선연히 느껴지던 마기의 집약체, 그 정체였다.
딱히 어떤 환술의 함정은 아니었는데, 그 묘한 검은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엄청난 마기를 풀풀 풍기는 와중이었음에도 론은 멍하니 그 액자를 쳐다봤다.
화르르륵.
[어서 없애자!]
결국 보다 못한 홍염이 먼저 나서자 그제야 론은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그래.”
멸마의 불꽃으로 현신한 홍염이 의문의 검은색 액자에 그 불을 뿜어댔다.
화아아아악.
그 느껴지는 마기가 방대했던 만큼 홍염도 그 피워 낸 불길의 크기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런데 론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쉬이 일이 끝날 거 같지 않다는 그런 예감.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 이상해···. 없어지지가 않아!]
홍염의 말대로 검은색 액자는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
어찌해야 할까 당황하는 사이,
새액 새애애액!
품 안에 있던 시엘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울음소리를 냈다. 누군가 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눈앞의 검은 액자에 정신이 팔려 누가 오는지도 깜빡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곧 그들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다다다다.
본래라면 건물 밖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느껴지는 마기로 몇 명인지를 판단했을 텐데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언제부턴가 어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마기가 퍼져나가고 있는 4층.
“젠장!”
결국 파악하기를 멈춘 론이 자리를 옮겼다. 검은 액자와 놈들이 올라오는 계단이 동시에 보이는 곳으로.
‘뭐지? 어떻게 그사이에 마기의 양이 더 커질 수가 있지?’
4층에서 한 것이라고는 그저 잠시 둘러보고, 홍염이 멸마의 불꽃으로 지져댄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 몇 분 만에 마기는 배 이상으로 덩치를 키우더니 론의 감각을 흩트려 놓았다.
‘잠깐, 설마···.’
하지만 론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떤 쥐새끼인가 했는데 사람 새끼였네. 그것도 시퍼런 애새끼라고?”
발소리에 이어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낸 이들. 그리고 그 이십여 명의 사람들을 이끄는 중년의 사내.
프라하 검투 노예단의 총책임자 나이르였다.
하대와 무시, 조롱을 가득 담아 내던진 말이었지만, 나이르는 속으로 감탄을 마지않았다.
‘선별자들의 마기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게 고작 저 애송이라고?’
마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지금껏 브래들리 후작가의 유력 후계자를 따라다니며 날고 긴다 하는 엘리트들을 많이 봐왔었다.
왕국의 천재 검사, 마탑의 유망주, 제국의 엘리트생 등등.
허나 잘났다는 그들도 결국 마계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그저 잡일과 심부름꾼 노릇을 하던 나이르. 그런데 운 좋게 자신이 섬기는 프라비츠가 브래들리로부터 권유를 받았다. 상차원, 마계의 힘을 받아보라는.
그 후로 그의 삶은 바뀌었다.
누구보다 마기에 대한 수용력이 높았던 그는 빠르게 신체를 재정립했고, 프라비츠가의 직속 집사가 되었다.
강력한 힘은 여유를 주었고,
그 여유는 생각의 한계를 허물었다.
그렇게 한낱 하인에 지나지 않던 나이르는 후계 구도의 끝자락에 있던 프라비츠가를 1순위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런 나이르의 능력은 마기 컨트롤. 마기에 대한 수용력이 높았던 만큼 그것을 다루는 감각 또한 뛰어났는데, 그 능력으로 그는 프라비츠가의 가장 신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쉬이이이익.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던 게 아니라면 결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소리가 나이르의 손끝에서 퍼져나갔다.
투명한 실,
바로 거미줄이었다.
이 땅에서 가장 단단한 물체라 하면 강철 혹은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런 강철보다 단단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질기고 유연한 물체가 바로 거미줄이다.
마기에 대한 컨트롤이 남달랐던 나이르는 수많은 무기를 손댔지만, 그에게 가장 적합한 것은 그런 날붙이가 아니었다.
쉬이이이익!!
수많은 거미줄이 그의 몸에서 뻗어나갔다. 마기로 힘과 속도를 싣는다면 무엇이든 단번에 절단할 수 있는 게 바로 그의 거미줄이었다.
“이, 이게···.”
허나 그 사실을 모르는 론은 그저 생소할 뿐이었다.
실 같은 것을 타고 날아오는 마기들.
허나 한 무리의 수장씩이나 되는 놈이 되지도 않는 얕은수를 쓰지는 않을 터.
과거 마셔스 수림에서 코르테즈에게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론은 본신의 힘을 최대치로 발현했다.
화인(火人).
생각과 동시에 론의 몸이 불타올랐다.
새애액!!
몸에 걸치고 있던 옷들이 순식간에 불타 사라지고, 졸지에 불구덩이에 매달려 있게 된 시엘도 당황한 듯 론의 몸에서 떨어졌다.
일전에 론과의 훈련으로 불에 대한 감을 익힌 시엘이지만, 그래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끼어들 판이 아니란 걸 직감한 시엘은 그대로 물러났다.
‘홍염!’
[응!!]
그리고 론의 외침에 홍염이 화인이 된 그에게 붙었다. 단순한 불이 아닌 멸마의 불꽃으로 이뤄진 화인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사방으로 파고들던 마기의 거미줄이 금세 타버렸다.
“크으윽!! 뭐, 뭐야?!!!”
나이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거미줄은 물론이고, 상당량 실려 있던 마기가 그대로 사라졌다. 아니 불타버렸다.
“설마 저게···.”
프라비츠가의 심복인 나이르는 우연히 그의 아버지, 브래들리 후작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마계의 힘을 흩뜨리는 조율자들의 개입이 있지 않은 이상 이 땅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조율자들의 힘이란 바로 마계의 힘에 대항하는 극적인 자연의 힘이었다.
바로 성화 혹은 성수 같은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