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6
경쟁자들을 꺾고 검투 노예를 이겨라.
그러면 작위를 하사하리라.
그 단순한 문구와 피 튀기는 혈전은 뭍 사람들의 본능을 자극하기 아주 용이했다.
론이 생각하기에도 이는 꽤나 자연스러운 방법임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마기에 스며들게 한다 이건가···.’
시합은 끝났음에도 투기장의 열기는 여전했다.
“역시 쥬드로야.”
“그 광전사 새끼,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큭큭큭.”
“그놈 덕분에 분기마다 아주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해.”
“다른 도시의 검투장에는 매번 최종 검투 노예가 바뀐다던데, 쥬드로가 대단하긴 해.”
“지금 이곳 프라하에서 벌써 2년째지?”
“캬아, 2년 동안 계속 쥬드로한테 풀 베팅했으면 인생 피는 건데 아깝다. 하···.”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 몰린 검투장.
때문에 시합이 끝난 후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서 어뗘?”
“예?”
“아직도 참가할 생각이 확고한겨?”
줄곧 론 옆에서 설명을 늘어놓던 노인이 빠져나가는 줄을 기다리며 묻는다.
“좀 더 보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껄껄걸, 그래. 일단은 좀 보는 게 좋을 게야. 특히나 여기 프라하는 쥬드로가 2년째 독식하고 있는 곳이니까 말야.”
‘그나저나 들어와 보길 잘했네.’
딱히 큰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닌데, 심심한 노인과 더불어 주변의 관중들이 쉴 새 없이 정보들을 쏟아냈다.
잠시간 생각을 정리한 론.
“그럼, 여기 프라하에서는 이 검투 시합이 몇 년 전부터 열린 겁니까?”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출현 시기였다.
검투 시합의 규율상 시합에서 패한 참가자는 이곳 프라하, 즉 브래들리 영지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해당 검투 노예 중 최고로 꼽힌 자는 마기에 찌든 채 최종 시합에 나왔었고.
분기당 백여 명이 넘는 검투 노예들이 거둬들여지고, 그들 중 1할만 마기에 노출시킨다 가정해도 상당히 많은 인원이 오염되는 것이었다.
“한 5년 됐제. 7년 전 새로운 행정관이 부임하고, 2년 내내 꼬박 지어서 완성한 게 대형 검투장이었으니까 말이여.”
곰곰이 생각하던 노인이 오랜 기억을 끄집어내며 말했다.
‘5년. 1년이 4분기니까 그럼 지금까지 총 20번의 시합이 있었던 건가.’
처음부터 이 규정이 적용됐다고 가정하면 거둬들인 노예만 벌써 2천여 명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최소 1할만 마기에 노출됐다고 가정해도,
‘2백 명. 허···.’
물론 1할이라는 가정은 지극히 론의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지금 브래들리 영지에서 풀풀 풍기는 마기를 보면 마냥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대형 투기장이 이곳 프라하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
“아직 어리지 않느냐. 그러니 다른 도시들 시합도 더 둘러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게야. 이곳 프라하가 다른 도시들 일정보다 빨리 치러진 거니께 말여.”
노인 역시도 그 점을 짚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으응?”
그런 그에게 론이 쥐여준 것은 대륙 북부의 공용 화폐였다. 말동무가 되어주는 대신 저녁을 사라고 했던 노인.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듯했다.
“말씀하신 대로 바로 다음 곳에 가볼까 해서 말입니다. 하하.”
그리고 지금 당장 봐야 할 사람도 있었다.
**
저녁 어스름.
프라하 투기장에서의 열기가 각종 술집으로 번져나가는 동안 한 곳만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래서 대충 쓸만한 것들 좀 추려봤나?”
“예, 행정관님. 일곱 명의 대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번에 노예 중에는 골격이나 신체 구조도 월등한데 마나 유저이기까지 한 녀석도 있어서 제법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 그 라흐만인가 하는 떠돌이 용병?”
“예, 맞습니다. 본인도 고아라 출신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으나 추후 훌륭한 자원으로 거듭날 것 같습니다.”
“아직 대가리 굴리는 걸 수도 있으니, 마인화(魔人化)시키고 나서 다시 한번 족쳐 봐. 정말 괜찮은 출신 성분을 발견한 거면, 쥬드로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른 형님들을 벌벌 기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인화 후 다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창백한 피부에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당대 브래들리 후작의 가장 짙게 물려받았다는 프라비츠카 브래들리였다.
꽤 오래전부터 왕권 수립이라는 야망을 키운 브래들리 후작가였는데, 주변국들의 정세상 함부로 티발루 왕국의 수도를 침공할 수가 없었다.
한쪽에 총공세를 퍼부으면, 그 빈자리를 득달같이 차지하려는 게 현실의 기득권들이었다.
때문에 압도적인 힘,
그것이 필요했다.
대륙의 정세고 뭐고 완전히 판을 깨부술만한 힘 말이다.
그런데 당대 브래들리 후작은 그에 대한 답을 결국 찾아냈다. 바로 이 땅이 아닌 곳에서.
**
펄럭펄럭.
매서운 바람에 깃발이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 깃발에 그려진 문양은 프라하 도시를 뜻하는 여덟 개의 풀잎 모양. 그렇다. 바로 프라하 행정관의 저택이었다.
그런데 그 저택을 멀리서 바라보는 론의 표정은 매서운 바람만큼이나 차갑기만 했다.
‘맞네.’
[응, 마기가 모두 여기에 집중되어 있어!]
대형 투기장을 나온 뒤 론이 찾아온 곳은 간단했다. 바로 행정관이 사는 그 저택.
그런데 그 외형은 이전에 방문한 도시 플리트비체의 그것과는 차이가 심했다. 일단은 둘러쳐진 담장의 규모부터 상당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했는데, 건물도 단순히 하나가 아니었다.
결국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릴 때까지 론은 기다렸다.
그곳이 어떻든 간에 그에게서 마기는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새애애액!
투기장에 있는 동안 심심했는지, 관저 인근의 산에 오르자마자 시엘은 론의 몸에서 빠져나갔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돌아온 녀석이었는데, 그 입에 무언가가 물려있다.
툭.
론 앞에 놓이는 조그마한 덩어리.
야생 토끼였다.
새액 새액!!
먹으라는 뜻이었다.
“······”
플리트비체 행정관 저택에 머무는 동안 저녁때쯤 항상 푸짐하게 무얼 먹곤 했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으니 걱정이 됐나 보다.
새액···?
론이 가만히 있자 시엘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슨 문제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이고···.”
저도 모르게 피식거린 론이 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야생 토끼를 집어 들었다.
‘이거 시엘 눈치를 봐서라도 끼니는 잘 챙겨 먹어야겠군.’
[쪼끄만한 게 걱정은 많아가지고.]
화르르륵.
조그만 불꽃으로 현신한 홍염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시엘에게 다가갔다.
화르륵.
화륵.
새액 새애애액!
순간 불길이 오가고, 시엘은 그것을 피하며 물을 쏘아댔다. 요새 가끔 시간이 나면 둘이서 하는 장난이다.
“스읏! 여기서 그러는 건 위험해.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자.”
새액!
[왜?!]
동시에 불만을 표출하는 두 녀석.
허나 론이 토끼를 집어 들고 먼저 산 안쪽으로 들어가자 둘은 못이기는 척 뒤쫓아갔다.
**
[와아, 론. 너 구시대 인간 같아.]
“구시대 인간? 그건 무슨 뜻이야.”
[구시대 인간이 구시대 인간이지. 짐승들 잡아다가 불에 구워 먹고 얼굴에 검댕이 막 묻히고 다니는 그런.]
“······”
시엘의 마음을 받아주기 위한 행동이 졸지에 구시대 인간의 모습이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론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가자. 날도 충분히 어두니까.”
[그래!]
새애액!!
홍염이야 그 고유 능력이 멸마의 불꽃이라 마기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했는데, 시엘은 그저 론과 홍염이 가니 그냥 따르는 것이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다.
참고로 시엘은 그 모습만 뱀이지, 뱀의 식성을 따르지는 않았다. 이제껏 음식이라곤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잘 살펴보니 마나를 양분으로 삼는 듯했다.
그런데 론과 홍염은 가진바 그 마나가 엄청 방대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따라다니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새액 새액.
그렇게 시엘이 평소처럼 론의 품 안에 파고들었고, 그는 그대로 행정관의 저택으로 향했다.
야심한 밤,
프라하 행정관 관저의 한 건물.
중년의 사내가 침상이 줄줄이 늘어진 곳에 들어섰다.
“생체 반응은?”
“선별자 일곱 중 다섯은 괴사였고, 두 명만 양성 반응이 나왔습니다.”
“쯧! 영 시원치 않군. 그래서 그 두 명 중에 라흐만은 포함된 건가?”
“예, 음성입니다. 이쪽에 있습니다.”
“후우, 그나마 행정관님께 보고할 면은 서겠군.”
프라하 도시 행정관의 직속 집사이자 검투 노예단의 총책임자 나이르.
그가 연구원의 안내를 받으며 한 사내 앞에 섰다.
발가벗겨진 사내의 몸은 전체적으로 푸르뎅뎅하게 변해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괴병을 앓다 죽은 시체 아니냐 착각할 정도의 상태다.
그런데 나이르의 눈빛은 침상에 누운 사내, 라흐만의 심장을 지긋이 볼 뿐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귀를 가져대 것도 그렇다고 손이나 청진기를 댄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라흐만의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범인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능력.
그 또한 마기로 인해 신체 변형을 한 번 거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법 쓸 만은 하겠군. 내일 바로 작업 시작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다른 노예는···.”
“알아서 작업하고 결과만 보고해.”
“예, 단장님.”
피곤함이 가득한 나이르의 반응.
무한 검투 시합이 열리는 분기 말이면 늘 있는 일이었다. 삼 일 간격으로 실시되는 시합 일정과 시합마다 발생하는 검투 노예를 선별하는데 적잖은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최종 시합이 끝난 날.
선별 인원 중 마기에 양성 반응이 나온 자가 둘밖에 없었지만, 간만에 마나 유저라는 괜찮은 노예를 얻는 바람에 한시름 놓은 나이르였다.
때문에 평소보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검투 노예단의 병동을 빠져나가는 그였는데, 그런 그를 멀리서 살펴보는 자가 있었다.
[저 사람한테도 마기가 느껴져!]
‘그래, 확인했어. 그런데 저 사람보다는 이 건물이 훨씬 더 수상한데···.’
방금 지나간 나이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은 마기가 풍겨 나오는 건물.
론이 눈을 감고 차분히 마나를 풀어냈다. 그러고는 그 뻗어나가는 마나에 감각을 실었다.
‘입구에는 경비병 둘, 각 층에는 순찰하는 놈들이 두 명씩. 음? 그런데 4층은 뭐지?’
조용히 이 일대와 건물 내부까지 훑은 론이었는데, 4층은 마기가 가장 짙게 풍겨 나오는 곳이었음에도 인간이라 판명되는 존재는 없었다.
[가자!]
고민할 틈도 없이 말하는 홍염.
그런데 녀석의 말이 맞았다.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면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맞다.
그리고 론은 미리 생각해 둔대로 대놓고 입구 쪽 경비병 앞으로 다가갔다.
부스럭 부스럭.
몇몇 떨어진 나뭇잎들이 그의 출현을 그대로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속을 나오자,
척!
예의 두 경비병은 기다렸단 듯이 창을 내세웠다.
얼핏 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외양. 허나 조금만 집중해서 본다면, 이 밤중에도 그 차이는 확연했다.
이지(理智)를 상실한 눈빛이 은은한 달빛 속에 여실히 드러났다.
“당신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원초적인 질문.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말이 아닌 날카로운 창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