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5
티발루 왕국의 브래들리 후작가.
그에 대한 정보는 미미하다.
회귀 전 대륙 전체가 흉흉했기도 했거니와 수많은 외국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랜 기억들 중 브래들리 후작가에 대한 것을 뽑아내자면, 그곳은 히드라의 출현 이후 티발루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이었다.
브래들리 후작가의 독립국 선언.
당시는 어둠의 세력들로 대륙 정세가 어지러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당시 그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러려니 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 역시도 다 계획하에 진행된 건가 싶었다.
“무슨···.”
규칙적으로 점멸하던 공중의 빛이 순간 멈췄다. 론이 텔레포트를 멈춘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신형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하강했다.
곧장 후작성으로 향하려 했던 론의 발을 멈추게 한 것. 바로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원형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선연히 뿜어져 나오는 짙은 마기.
[론!]
홍염도 느껴지는지 제 생각을 표출했다.
“아주 미쳤군. 이렇게 대놓고 지랄을 한다고?!”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이른 산지를 넘을 때부터 짙게 느껴져 오던 이유는 단순히 동부의 성좌가 지닌 마기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높디높은 상공.
그곳에 떠 있었던 론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원형 구조물이 하나가 아니었음을.
**
“와아아아아!!!”
“죽여!! 죽이라고!!”
“그래! 두 번만 더 이기면 네놈이 우승이다!!!”
“검은 도끼! 니한테 내 전 재산이 걸렸다고 죽여 씨이바아아알!!”
시끄러운 함성이 밖에서도 선연히 들려온다.
[어서 들어가 보자!]
홍염이 다그쳤다.
그렇다. 지금 론은 조금 전 마주쳤던 그 원형 구조물 앞에 선 것이었다.
지면으로부터 약 오십 미터가량.
웬만한 성(城)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거대하게 지은 이 건물은 지금까지의 정보로 추측하건대 투기장(鬪技場)인 듯했다.
괜한 의심을 피하고자 인근 산에서 착지한 론이었는데, 도시의 경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원형 투기장 앞까지 오는데 그가 한 것이라고는 후드를 눌러 쓴 것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의문의 투기장 또한 완전 개방형 건물. 거대한 건물답지 않게 경비병 하나 없이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우락부락해 보이는 남자들부터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다양했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론.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한 사람을 붙잡았다.
“저기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으응?”
나이 지긋한 노인.
긴 평생을 살았던 론은 안다. 나이가 들수록 찾아오는 괜한 외로움과 공허함을.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 중에서도 한 노인을 붙잡고는 물었다.
“제가 이곳은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여기가···.”
“아직 젖살도 안 빠진 거 같은디 벌써 도전해보러 왔는겨? 여기가 맞어, 그 검투장.”
“아아, 검투장···.”
“귀족 작위에 괜히 혹해서 바로 덤벼들지 말고, 일단 좀 보랑께.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쓰러져 나간 게 한둘이 아니니께.”
“?!”
귀족 작위.
보통은 국왕이나 영주가 가신들에게 내리는 계급이다. 임명되는 즉시 보통의 백성과는 달리 지배층으로 구분되는 그것.
그런데 어떤 유서 깊은 대회도 아니고, 단순히 검투시합으로 작위를 하사한다니.
순간 론은 머리가 띵했다.
“자, 작위 말입니까···?”
“이거 뭐 아무것도 모르는 핏덩이가 그저 이기면 좋다는 얘기만 듣고 온겨?! 쯧쯧쯧···.”
그러면서 노인이 론의 복장을 위아래로 쓱 훑었다. 누가 봐도 여행복이었는데, 그것이 꽤나 깔끔했다.
“내 조언 좀 해줄 터이니 이따 저녁이나 좀 사거라.”
“아, 예예···.”
멍해진 론이었으나 운 좋게 현지 가이드를 받게 됐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별문제 없이 무사히 입성한 거대 투기장.
“와아아아아아!!!”
밖에서 들리던 함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가운데의 검투시합장과 그곳을 감싸는 원형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함성으로 아주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벌써 겁먹은 게냐? 앙? 껄껄걸, 아직 시작도 안 했구마잉.”
론의 표정이 재밌는지 함께 하게 된 노인이 떠들어댔다.
새액 새액.
커다란 함성과 그로 인한 진동으로 심기를 불편케 했는지 결국 시엘이 품 안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괜찮아, 괜찮아.’
론의 벌어진 외투 사이에 빼꼼히 삐져나온 하얀 덩어리. 초롱초롱한 푸른 눈동자가 론을 한 번 응시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바로 옆에 노인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각도 상 시엘이 보이지 않았기에 론도 딱히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내 론의 기분을 꺼림칙하게 하던 그 원흉이 등장했다.
드르르르륵.
시합장 한쪽의 철장이 끌어올려지고, 그 안에서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크하아아아아!!!”
사람이되 사람 같지 않은 괴성.
[저 사람···.]
‘어, 맞어.’
홍염이 짚었듯이 이 투기장에서 풀풀 풍기는 마기의 주인공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번 분기 최고의 행사, 바로 무한 검투 시합의 최종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
“우우우우.”
“쥬드로, 이번에도 다 죽이라고!! 죽여어어!!!”
시합 사회자로 보이는 이의 시작 연설과 함께 검투장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새애애애액!!
다만 그 함성이 불편했던 시엘은 아주 질색을 표했다. 이어서도 색색 궁시렁대던 녀석은 결국 다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시엘을 쓰다듬으면서도 론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고정해 있었다.
마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의문의 사내.
조금 민감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농도였는데, 투기장을 가득 채운 분위기에 압도된 건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빨리 시합이 시작되기를 소리쳐 외쳐댈 뿐.
“다들 처음에는 그라지. 길바닥 출신이던 평민에게 작위는 평생 가도 못 움켜쥘 것이니까 말야. 근데, 그렇게 작위에 눈멀어서는 분명 단명할게야. 끌끌끌···.”
사회자의 진행 중에도 옆에 있던 노인은 심심했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분기마다 시행되는 시합의 참가자는 총 128명. 7번의 결투를 통해 겨우 도전권을 따낼 수 있지. 허나 그 또한 말 그대로 도전권. 그 도전권으로 마지막 최종 시합에서 이겨야 비로소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는 게야.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 하나.
작위라는 엄청난 보상이 걸린 시합을 그저 야망과 배짱만으로 참가할 수 있을까?”
노인의 눈가가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딱 보니 물정 모르는 이에게 설명하는데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허나 답을 모르는 론이었기에 그의 장난에 어울려주었다.
“그것까지는 알아보지 않고 왔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딱 보니 이제 막 젖 뗀 거 같은 게 두리번댈 때부터 내 알아봤다니께! 껄껄걸.”
“······”
뭐가 그리도 좋은지 노인은 한참을 웃어댔다.
그런데 어째 한참이 지나도 문제의 답을 말하지 않자 결국 론이 물었다.
“시합 참여 조건이 따로 있는 겁니까?”
“당연허지.”
어느새 표정을 싹 바꾼 노인.
“신분포기 각서. 탈락 시 노예가 되겠다는 서약을 해야지만 시합에 참가할 수 있지.”
“아···.”
론은 그제야 수긍이 갔다.
귀족 작위를 미끼로 백여 명의 건강한 남자를 노예 삼을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긴 했다.
‘그런데 이거 가능성이 있긴 한 건가.’
당장 눈앞의 사내만 보더라도 웬만한 마나 유저의 전사들은 그냥 찜쪄먹을 수준이었다.
최소 오러 유저는 와야지 상대 가능한 수준.
“자 그렇다면 이번 분기 백여 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올라 온 최종 도전자는···! 바로바로 바우렌 왕국 출신의 도끼 전사! 클라크!!”
드르르르륵.
시합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쪽 철장이 올라가고, 사내 한 명이 튀어나왔다.
“빡빡이 새끼야!!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한 번 이겨 보라고오!!”
“바우렌 촌뜨기 새키야!!!”
“우우우우우!!”
[저 사람 못 버틸 거야.]
홍염이 냉정히 말했다.
허나 이는 론도 마찬가지였다.
쥬드로라는 검투 노예가 풍기는 그 마기로 보건대 마나 유저로는 어림도 없었다. 최소 오러. 오러 유저의 전사가 아니면 필패가 확실했다.
하지만 도전자 측의 사내에게선 몸에서는 일말의 오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마나가 전부.
앞이 훤히 내다보이는 시합을 앞둔 가운데 결국 진행자의 큰 목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럼 경기 시자아악!!!”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뒤덮었고, 그에 맞춰 예의 검투사들이 서로를 향해 뛰쳐나갔다.
시작부터 마나를 운용해 몸을 폭발적으로 움직이는 도끼 전사.
후우우웅.
후웅.
양손에 쥔 각각의 도끼가 쉴 새 없이 바람 소리를 만들어내며 허공을 그어댔다.
단 한 번이라도 걸리는 순간,
모든 걸 박살 내겠다는 각오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주 절실히도 느껴졌다.
“지금까지 저 도끼질에 쓰러져 나간 놈들이 한둘이 아냐. 저 빡빡이 도끼 놈이 무서운 이유는 상대가 막는 순간, 바로 기회를 놓치지 않기 때문이지. 끌끌끌···.”
콰앙!
그리고 때마침 클라크의 왼손 도끼를 검투 노예가 대검으로 받아쳤다.
치이이이익.
턱!
그대로 검날을 따라 검 손잡이까지 내려간 도끼가 갈고리처럼 폼멜 윗부분에 갈고리처럼 걸려버렸다.
명백한 노림수.
그 순간의 찰나를 클라크는 놓치지 않았다. 준비 자세를 마친 반대 손이 빠른 속도로 이미 날아오고 있었다.
만약 저 반대쪽의 도끼가 향한 곳이 상대의 목이라면 확인할 것도 없이 승리다.
‘이렇게 정말 끝난다고?’
마나를 통해 시력까지 높은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콰악!
도끼날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선연히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그렇지, 쥬드로!!”
“이제 네 차례라고!!”
“죽여! 죽이라고!!”
심상치 않은 마기를 품었기에 쉬이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관중들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다.
마치 이러한 패턴을 한두 번 보는 게 아닌 듯했다.
“크아아아아!!”
그리고 그에 부응하듯 쥬드로가 괴성을 내지르며 빠르게 치고 나갔다. 대검을 내다 버린 채.
“대검이!”
“클클클. 이게 쥬드로지. 암, 그렇고말고.”
옆에 있던 노인이 당연하단 듯이 중얼거렸다.
챙그랑.
왼손 도끼로 묶어두었던 대검이 바닥에 떨어지기 무섭게 쥬드로가 이전과는 아예 다른 기세로 클라크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지금만을 기다려 온 것처럼.
후우우웅.
마치 도끼날이 휘둘러질 때처럼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뻐억!
“컥!!!”
쥬드로의 남은 주먹이 클라크의 얼굴에 꽂혔다.
퍽 퍼벅!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쥬드로의 육박전. 도끼에 하박이 찍혔던 왼팔은 주먹 대신 팔꿈치를 꽂아대며 미친 듯이 싸워댔다.
애초에 대검을 왜 들었나 싶을 정도로 육박전.
허나 얼마 뒤 론은 알아차렸다.
관중석을 뒤덮은 뜨거운 열기.
검과 같이 차가운 날붙이로 싸우는 시합도 시합이지만, 맨몸 격투는 그것만의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콰아아앙!
빠각!
“와아아아!!”
기어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나서야 끝이 난 시합.
그렇다.
지금의 투기장은 인간의 충동과 본능을 자극하는 마기와 아주 잘 어울렸다.
마치 처음부터 이를 노리고 만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클클클, 이래도 네 녀석이 참가할 것이냐.”
함성 속에서 노인의 말이 조용히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