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4
모두가 잠든 새벽.
온종일 땅을 비추던 태양도 하늘을 벗어났기에 어둠만이 만연하다.
그 가운데 론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명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였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면 깨어있다가 이 시간을 맞이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쩝쩝.
품에 안긴 채 잠든 시엘.
녀석이 잠꼬대인지 입맛을 다신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녀석은 줄곧 그래왔던 대로 다시 론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무게감이 살짝 더해졌을 뿐 불편한 것은 딱히 없었기에 그런 시엘을 그냥 뒀었는데, 문제는 밤이 되자 녀석이 피곤해한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론은 녀석을 재우려다가 저도 모르게 같이 잠들어 버렸었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응, 가자!]
조용히 시엘을 조용히 몸에서 떼어낸 론은 녀석에게 베개를 대신 밀어 넣어 주고는 방을 나섰다.
딸칵.
론도 홍염도 자리를 비운 접객실.
은은한 달빛만이 비추는 그곳에 잠시 후 반짝이는 한 쌍의 무언가가 떠졌다.
모리츠 자작령의 변경이자 알펜샤 왕국의 변경인 플리트비체 도시.
말만 들으면 영지와 왕국의 변경이 겹쳐 군사 병력이 집중 배치되어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근방 전체가 두꺼운 하이른 산지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도 조금만 들어가면 고국의 마셔스 수림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연이 우거져있다.
즉 명상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뜻.
저벅저벅.
행정관 저택을 나온 론은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나아갔다.
심연의 환술로 죽음을 경험하며 6서클의 벽을 허물고, 고대 불의 정령 홍염과의 일체로 7서클의 경지에 다다른 그였기에 서클을 늘리기 위한 행동보다는 그저 자연을 맞댈 뿐이었다.
사락 사락.
우후우우웅. 우후우웅.
찌르르 찌르르.
고요하기만 할 것 같은 밤에도 제 존재를 내뿜은 생물들은 많았다. 야행성 동물부터 이 땅을 훑는 대기, 그런 대기를 맞이하는 숲들.
인간으로서는 온갖 기연과 행운이 겹쳐야 겨우 맞이할 수 있는 경험을 론이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화르르륵.
의지와 함께 그의 몸이 불타올랐다.
순식간에 타버리는 고급스런 의복.
행정관이 차려 준 것이었으나,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바란 게 없으니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한들 집착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 론이 오로지 직시하는 것은 단 하나.
완전무결의 결정체이자 그 자체로 완벽한 이 땅의 섭리였다.
백 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미물로 태어나 거대한 자연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기쁨이자 흠 없는 충만함이었다.
당대 7서클의 대마도사 럼블도 끊임없는 명상과 운을 통해 겨우 맛볼 수 있는 경지를 론은 홍염과의 일체를 만으로 쉬이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본다면 아주 경을 칠 일.
“그나저나 브래들리 후작이 확실한가 보군.”
이 땅의 이치에 다다르면 다다를수록 론은 저절로 알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기운을.
지금 론이 지긋이 쳐다보는 저 산맥들 너머에는 바로 브래들리 후작가가 있었다. 마셔스 수림의 비동에서 발견한 단서들이 가리킨 곳.
‘음? 그런데 그냥 이대로 넘어가도 안 될 건 없잖아?’
순간 고개를 갸웃거린 론이 생각했다.
괜히 브래들리 후작가의 소속국인 티발루 왕국에 입국 절차를 거쳐 흔적을 남기느니 텔레포트로 후다닥 갔다 오는 게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뭐 시엘도 메스 텔레포트로 함께 이동하면 되니까.’
새액!
‘그치.’
“음?”
순간 뒤에서 들려온 시엘의 소리에 론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분명 자고 있는 거 아니었···.’
새액 새액!
새애애애액!
언제 쫓아온 걸까.
시엘이 그의 뒤에 있었다.
다만 불길 때문에 달라붙지는 못하고 그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어 꼬맹이, 일어났네.]
화르르륵.
론의 어깨에서 홍염이 툭 삐져나왔다.
새애액!!
자신은 접근조차 못 하는데 홍염은 론과 착 붙어있자 시엘은 아주 안달이 났다. 몸을 1자로 일으켜 세워보지만, 다가오지는 건 매한가지.
[꼬맹아, 소리만 내지 말고 와 봐!]
홍염이 그런 시엘을 살살 놀렸다.
내친김에 시엘이 그랬던 것처럼 불길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화인이 된 론의 몸을 휘감았다.
새액 새액!!
초롱초롱한 하늘색 눈동자가 아주 억울하다.
그 모습에 불길로 변한 론이었음에도 입가가 휘어졌다. 한동안 그 모습을 재밌게 보던 론이 말했다.
“시엘.”
론이 활활 타오르는 손을 내밀었다.
새애애애애액!!
움찔거리며 물러난다.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한때 그 뜨거운 지옥의 불덩이까지 뱉어내던 녀석이다. 물론 지금은 마기도 사라지고 크기도 줄어들었지만, 신수임에는 틀림없는 녀석.
론은 시엘의 눈을 마주한 채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영 반응이 없기에 그만 장난치고 화인의 상태를 풀려고 했는데, 녀석으로부터 어떤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으음?’
그리고 서서히 바뀌는 주변 마나의 흐름. 론이 흥미롭게 쳐다봤다.
화르르륵.
처음에는 무형의 마나 장막을 만들어 불길을 밀어내려고 했다. 인간으로 쳐도 상당한 수준의 마나 컨트롤이었는데, 허나 상대는 7서클의 론이었다.
단순한 마나 장막으로는 불길을 걷어낼 수 없었다.
그러자 잠시 후 꺼내 든 것은 뜨거운 불을 없앨 물이었다. 상성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좋았으나, 이번에도 역시 상대가 안 좋았다. 결국 또 실패.
하지만 시엘의 눈빛은 꺼지지 않았다.
이어서 녀석은 바람도 끄집어내고 흙도 만들어내면서 갖은 수를 다 썼다.
‘이 정도라고···?’
론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시엘이 한때, 히드라라고 불린 거대 괴수였다 쳐도 지금은 이제 막 눈을 뜬 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연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물, 바람, 흙, 빛, 번개.
갖가지 원소들을 아무렇지 않게 소환해 낸 시엘.
본래 신수란 어떤 존재인가.
영물 중에서도 지고(至高)의 경지에 오른 몇몇의 개체들에게만 허락되는 게 바로 신수다.
그런데 그런 신수들도 온갖 원소를 다룬다는 얘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특정 환경 혹은 원소에 특화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영물이고 신수인데, 지금 시엘은 확실히 그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고대 괴수로까지 활동한 연륜이라 이건가. 아니지, 그냥 고대 신수인가.’
허나 시엘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자신과 론 사이를 가로막는 저 불이.
‘할 수 있어.’
그런 시엘을 론이 똑똑이 쳐다봤다.
새애애액!!
우렁찬 울음소리.
후우우웅.
녀석의 입 앞으로 모여든 마나들이 뜨겁게 타올랐고, 마침내 피어올랐다. 뜨거운 불꽃이.
시엘은 그것을 그대로 쏘아냈다.
화르르르륵!
손끝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불길.
론이 흡족하게 쳐다봤다.
단순히 불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길 바랐는데, 시엘은 그 수준을 넘어서 갖가지 원소들을 끄집어냈다. 가히 엄청난 잠재능력.
“정말 잘했어.”
곧장 화인 상태를 푼 론이 시엘에게 다가갔다.
새애액!!
기다렸단 듯이 그의 몸을 휘감고 올랐다.
츕츕.
혀로 핥고, 비비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도 수준이면 나중에는···.’
론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시엘을 쳐다봤다.
***
행정관 저택에서 머무른 지 나흘째.
원래는 초대받은 다음 날 즉시 도시를 뜨려고 했으나, 시엘의 성장도 있고 해서 론은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소냐의 아버지 행정관 또한 크게 귀찮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무슨 똥 마려운 개 마냥 어쩔 줄 몰라 하던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
‘휴양하러 왔다 생각하고 푹 쉬다 가게.’
‘내 딸이 알펜샤 왕국 종합 아카데미 졸업반인데 그래도 졸업은 해야 할 텐데 말야···.’
‘사가르타가 마법사를 그리도 좋아하지 뭔가.’
‘마법사를 지망하는데 말야, 적성에 맞는지 모르겠어.’
바로 사가르타였다.
“그러니까 마법에 대해 궁금해서 오셨다구요?”
“아 넷, 네!”
론이 머무는 접객실에 찾아온 행정관의 장녀 사가르타. 긴장한 기색이 아주 가득하다.
허나 열여덟, 성인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를 마치 아이 대하듯 나서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법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길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론은 그저 편안한 자세로 맞이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도 지금 마법을 배우고 있··· 히이익!!”
접객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안절부절못하던 사가르타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
이유는 시엘.
새액.
요 며칠 론과 부대껴 훈련하다 보니 이전처럼 마냥 어리광부리는 모습은 사라졌다. 지금도 론의 몸이 아니라 옆에 있던 침대 이불 속에 슬며시 빠져나왔다.
새애액.
보드라운 재질이 마음에 드는지 이불 위를 왔다 갔다 하던 시엘이 이내 쭈욱 늘어졌다.
아주 편할 때마다 나오는 자세다.
“배, 배, 뱀이···!”
“괜찮습니다. 교감하는 동물이라 인간에게 해를 가하거나 물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맑고 푸른 눈동자의 흰 뱀.
솔직히 론의 입장에서는 시엘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가르타가 겁을 먹으니 내심 아쉬웠다.
‘애교 부리는 모습을 보면 좀 풀리려나.’
이불 위에 배까지 드러낸 채 퍼질러진 시엘에게 론이 손을 뻗었다. 배를 살살 쓰다듬은 뒤 품에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콰득.
시엘은 그런 그의 손을 물어버렸다.
“히이이익!!”
털썩.
사가르타가 그만 졸도해버렸다.
새액?
무슨 일이냐는 듯 시엘이 물고 있던 론의 손을 놔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마법 배우기 싫은가 봐.”
결국 하인을 불러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후의 일과는 단순했다.
소냐와 레브와 조금 어울려 준 뒤 저녁부터는 시엘이 피곤해 쓰러질 때까지 훈련했다.
전에 탐방 갔을 때 사티넬이나 크루딘과 그랬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어느새 시간은 여덟 번째 달인 생명 달 말엽이었다. 다음 달이면 아카데미는 새 학기다.
“그리고 얼마 뒤면 골든스태프 대회지.”
회귀 전에는 별생각 없이 맞이했던 일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곳곳에 똬리를 튼 채 때를 기다리는 그들.
이제는 확실했다.
어둠의 세력들이 양지로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 신호탄이 될 골든스태프 대회.
아들렌 아카데미만 해도 유력 후보자를 제거하기 위해 흑석을 사용한 놈들이었다. 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아마 말 못 한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을 터였다.
‘어디 과연 생각대로 되나 보자고.’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마계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는 자들에게 절대 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론의 다음 목표는 확실했다.
시엘도 어느 정도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론은 지체 없이 플리트비체를 떠났다.
**
잠입과는 거리가 먼 한낮.
플리트비체에서 티발루 왕국의 브래들리 후작가 사이로 빛들이 연달아 점멸했다.
텔레포트로 인한 빛.
그 주인공은 당연히 론이었다.
허나 브래들리 후작가 또한 플리트비체처럼 험준한 하이른 산지를 변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경계 병력은 많지 않았다.
물론 있었다 하더라도 론의 신위를 잡을 사람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슈아아악.
슈아악.
구름들 사이로 빛이 꺼질 때마다 론의 신형이 나타났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느껴지는군.’
지면이 아닌 공중에서 텔레포트를 시전하고 있던 론이었기에 그의 눈에는 저 멀리까지도 훤히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별한 파장을 일으키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요 며칠간 시엘만 특훈을 한 게 아니다. 홍염과의 일체화는 자연의 이치뿐만이 아니라, 마기에 대한 감(感)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그대로 후작성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