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3
대애앵.
대애앵.
도시 한 가운데의 첨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각 6시, 하루의 일과를 마치는 알림이었다.
“이 소리였구나.”
매번 하이른 산지 봉우리에서 체외 서클 수련을 하다가 이 소리를 듣고 하산하곤 했었는데, 직접 도시에서 들으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마치 플리트비체 소속 영지민이 된 듯한 기분.
저벅저벅.
그런데 앞에서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절로 귀 기울이게 될 정도로 묵직한 발소리. 가진바 그 중량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마나가 인위적으로 변형된 형태, 오러로 인함이었다.
‘오러 유저?’
그 무위를 직접 확인해 본 것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대충 굴러다니는 칼잽이 수준은 아니란 것이었다.
론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시엘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응, 왜?”
당황해 눈을 똥그랗게 뜨는 소냐.
“누가 온 거 같아서 말야.”
“으응?”
이내 눈썹을 찌푸린 소냐가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리고 마주친 한 남자. 그녀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피코스?”
척.
경갑 차림의 말끔한 사내가 제 오른손을 가슴팍에 올리며 묵례했다.
“아가씨, 저녁 식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친구분과 함께 모시고 오라는 행정관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흥, 웬일이야. 아빠가 피코스까지 보내고.”
“다 아가씨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해서겠지요.”
“알았어.”
그리 말하고는 소냐가 론을 쳐다봤다.
“들었지? 지금 가자.”
“지금?”
“응!”
오러 유저에 대한 경계가 끝나기도 전 벌어진 갑작스런 상황.
허나 론은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삼인방과 개 한 마리.
“그런데 그 흰 뱀은···.”
“시엘이야.”
“아아, 시엘! 시엘은 네 품에만 있는 거야?”
소냐는 혹시나 시엘이 고개를 내밀지 않을까 기대하며 론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음···. 일단 지금은 그렇네.”
“우웅, 그렇구나. 뭐 그럴 수 있지. 시엘도 시엘 생각이 있으니까.”
‘오···.’
열한 살.
마냥 귀족가의 테두리에서 어리광만 부리며 자란 건 아닌가 보다. 어린 나이임에도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모습이다.
‘영물을 데리고 다니는 테이머는 역시 다르다 이건가.’
그렇게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소냐의 옆에 있자니 어느새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담장에 있는 깃발이 플리트비체의 상징을 펄럭인다.
행정관의 저택이었다.
“드시지요.”
앞장서서 정원을 지나던 피코스.
그리고 이내 현관에 다다르자 그가 소냐에게 손짓했다.
“피코스가 안내해줄 거야. 조금 이따가 봐.”
소냐가 론에게 손을 흔들고는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레브와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데, 피코스가 이내 론을 불렀다.
“자네는 날 따라오게.”
대륙의 북부.
매서운 자연환경으로 인해 대륙 중남부보다는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교류의 최소화는 문화에서도 차이를 빗어냈다.
당장 아들렌 왕국과 비교했을 때 보다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의 격식이 북부에는 아직 남아있다.
신분에 대한 인식은 더욱 뚜렷했고, 때문에 그로부터 비롯된 예법 또한 중요시했다.
“현 모리츠 가주님의 직계 삼남이셨으며, 최연소 도시 행정관으로 부임하신 분이 대니 모리츠 님이시···.”
제 모시는 상관에 대해 줄줄이 연설하는 피코스.
론은 묵묵히 이를 들었다.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법도가 있는 법. 이방인에게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가뜩이나 초대받은 몸이니 초대받은 자로서의 격식을 갖추면 될 뿐이었다.
‘그나저나 오래는 못 있겠군.’
플리트비체에서 시엘과 시간을 조금 보내려던 론이었으나, 도시 행정관까지도 안면을 트게 되면 왠지 불편해지리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예법 교육이 끝나고, 론은 저택의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환한 조명과 조각.
색감있는 테이블보가 북부만의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네가 그 론이구나.”
그리고 그런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중년인. 소냐의 아버지이자 이 곳 플리트비체의 행정관이었다.
“행정관님을 뵙습니다. 론 스펜서입니다.”
이들의 예법에 맞춰 인사했다.
이국의 것이라지만, 론 또한 아들렌에서는 귀족이었기에 그 행함에 미숙함은 없었다.
오히려 그 특유의 여유로움과 기품이 대니 모리츠의 눈길을 끌었다.
“스펜서?”
“예.”
대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름 뒤의 성.
자신이 귀족임을 당당히 밝히는 말이었다.
즉, 이방 땅의 귀족 자제가 정말 홀로 플리트비체에 왔다는 말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었는데···.’
불분명한 출신.
답지 않은 기품과 여유.
그리고 소냐로부터 전해 들었던 내용들.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 대니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생각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론! 시엘도 데려왔어?”
“······”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소냐가 나름 조용히 말한다고 입을 가렸으나, 이 공간에서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누가 막으랴.
“그래, 소냐가 조금 전 그리 얘기하던데. 너도 테이머인 게냐?”
대니도 궁금하단 듯이 되물었다.
‘후우, 뭐 결국 알려질 일이었으니까···.’
잠시간 생각을 정리한 론이 입을 뗐다.
“테이머라기보다는 그냥 사육자입니다. 테이머는 제가 아니라 행정관님의 따님 같은 분이겠지요.”
최대한 겸양을 내보이며 소냐를 가리켰으나 대니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보고 싶군.”
명령은 아니되 네 글자에 담긴 은근한 뉘앙스. 결국 론은 코트 단추를 조금 풀고 말했다.
“시엘.”
새액.
조만간 그의 품속에서 솟아올라오는 하얀 덩어리. 시엘이 머리를 내밀고 혀를 날름거렸다.
“히이익!!”
“시엘!”
소냐의 언니 사가르타는 기겁하며 의자를 뒤로 뺐으나, 소냐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자리에서까지 일어나며 소리쳤다.
‘정말··· 백사군.’
잠자코 보고 있던 대니의 눈이 깊어졌다. 소냐로부터 얘기는 들었지만, 막상 실제로 보니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백사는 그 자체로 영물 취급받는 동물.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론의 품에서 나온 백사의 흰 피부는 상당히 우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맑은 하늘색 눈동자. 마약 인신매매범과는 전혀 매칭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쪽 부류는 아닌건가...’
한시름 걱정을 내려놓은 대니.
“크흠, 잘 봤네. 그럼 앉게나. 음식들도 들이고.”
“아, 아버지!”
“예.”
둘째 사가르타는 뱀이 무서운지 질색을 표했지만, 그는 손을 들어 일축했다.
자그마치 영물을 다스리는 사육자, 테이머였으니까 말이다.
이후 식사 시간은 한층 더 부드러웠다.
신문하는 듯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은근히 플리트비체를 자랑하기 시작한 대니.
“알펜샤 왕국에서 이곳만 한 곳이 없지.”
“세금도 가장 적은 축에 속할뿐더러 나 또한 장인들에게는 대우를 확실하게 하니까 말야.”
“참, 자네. 내 딸 소냐가 데리고 다니는 엘리아툰 레브를 봤나?”
‘너’라는 하대가 어느새 ‘자네’로 바뀌고, 거기에 느끼한 눈빛은 덤이었다.
[저 사람 아까랑 느낌이 달라.]
사람의 감정을 조금씩 살피게 된 홍염마저도 분위기가 달라진 대니를 의식했다.
“나는 자네가 내 딸 소냐와 같이 이곳에서 테이머로서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야.”
“?!”
달그닥.
순간 이어진 대니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오오, 좋아!!”
물론 그 의미를 모르는 소냐는 마냥 기뻐했지만, 잠자코 식사하던 장남과 둘째의 표정은 굳었다. 아무리 말괄량이 막내라 하지만 제 혈육이다.
그런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에게 혼담과도 다를 바 없는 말을 꺼내니 당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론이라고 모르지 않았고.
“크흠, 흠.”
론이 서둘러 입안을 비웠다.
적당히 대답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행정관님,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이곳의 사람이 아닙니다.”
“껄껄걸, 뭐 어떤가. 가족같이 잘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면 이곳이 제 집인 거지.”
“저 또한 한 가문의 한 일원입니다.”
“흐음? 안 그래도 궁금하긴 했었네. 자네 가문에 대해 한 번 얘기해 주겠는가.”
누가 봐도 확실한 영입 제안이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며 자신의 가문을 내세우니 행정관 대니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다. 그저 그런 몰락 귀족은 아니란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아들렌 왕국의 스펜서 남작가. 그곳이 제 가문입니다.”
이제껏 귀찮아질까 봐 함구했던 내용이 결국 론의 입에서 술술 튀어나왔다.
“아들렌 왕국의 스펜서 남작가? 아들렌··· 마도왕국 아들렌의···.”
론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대니.
묘한 기시감에 그가 말을 멈추고 론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시 집중해서 보니 미성년의 나이에, 확실히 영특해 보이는 눈빛. 그리고 특유의 여유로움.
최근 파티에서 대니는 분명 들었었다.
근래 유통되고 품목 중 아주 핫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물건. 바로 스펜서 포션이었다.
이미 고착화된 포션 시장에 파란을 일으키며 새롭게 등장한 그 포션은 대륙 전역에 퍼지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포션의 원산지는 다름 아닌 마도왕국 아들렌의 스펜서 가문.
그런데 귀족들의 입에 그리도 오르내렸던 이유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해당 가문의 자제가 올해의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자라는 점이었다.
마법사보다는 전사들이 많은 게 북부라지만, 지금 이 시대에 마법사들의 대축제 중 하나인 골든스태프의 위상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하기에 더욱 귀한 게 마법사였는데, 눈앞의 소년이 그 스펜서 남작가의 자제란다. 대니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혹시··· 자네가 골든스태프 대회의 본선 진출자라는 그···.”
“예, 맞습니다.”
“허···.”
엄청난 거물.
그저 그런 몰락 귀족이 아니었다.
“응, 골든스태프? 갑자기 마법사들 대회가 왜?”
소냐는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해했고, 다른 두 자식은 제 아버지의 대화에서 그 의미를 알아챘는지 그들 또한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 그랬구만. 하, 하하하···.”
“하이른 산지와 플리트비체가 유명해서 여행차 방문한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후 식사 시간은 일가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지는 바람에 소냐와 론의 목소리만이 식탁을 채웠다.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욕조.
론은 지금 아주 호화스러운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본래 저녁만 먹이고 축객령을 내리려던 대니였는데, 론의 정체를 알고 나니 최대한의 극진한 대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왕 쉬러 온 거 푹 쉬다 가게나.’
‘온천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이른 산지의 약수가 유명하니 뜨겁게 데워 목욕하면 아주 좋을 걸세.’
‘우리 둘째 사가르타가 마법을 배우고 있어서 말야. 매우 반가워 하더군.’
‘뭐 그냥 마법 관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거 같기도 해서 말이야. 껄껄걸.’
어떻게 해서든 인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 모습이 너무 훤해서 오히려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좋은 일 있어?]
새액.
론의 미소에 홍염과 시엘이 반응했다.
“그냥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진 않아서. 그나저나 따뜻하고 좋다. 고마워, 홍염.”
홍염이 현신하여 욕조의 온도를 유지해주고 있었던지라 론은 아주 제대로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흐응, 뭐 이런 것쯤이야!]
기분이 좋아졌는지 홍염이 괜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새애액.
그리고 숫제 사람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시엘도 이 온탕을 즐기고 있었다. 줄곧 론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시엘은 욕조에 들어가자 아주 제집이라도 찾은 건지 아주 축 늘어졌다.
지금도 온탕 위에 둥둥 떠다니는데 그 표정이 세상 만족스러워 보인다.
“그래도 마냥 쉬면서 있을 순 없는데 말이지···.”
론은 배까지 훤히 드러내며 떠다니는 시엘을 유심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