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2
여전히 탁한 빛을 띠는 한 쌍의 눈동자.
히드라가 지긋이 론을 쳐다봤다.
어떤 언어도 표정도 울음소리도 오가지 않았으나, 그 눈빛만으로도 론은 마음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교감(交感)이었다.
그런데 그런 히드라가 원하는 것은
‘멸마의 불꽃.’
큰 고심 끝에 놈을 살리기로 한 것이었는데, 도리어 녀석은 그 심판의 불꽃을 애원했다.
결연한 눈빛.
결국 론은 홍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르륵.
그렇게 그들 앞으로 하나의 불꽃이 피어올랐고, 히드라는 주저 없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
콰득.
“아야, 아프다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론은 갑작스런 손등의 통증에 움찔거렸다.
이유인즉,
[야! 하지 마!]
화르륵.
참다못한 홍염이 현신해버리자 론의 손등을 물고 있던 하얀 뱀이 화들짝 놀라며 론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렇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론과 힘겨루기하던 그 히드라다.
[칫! 별것도 아닌 게 자꾸 까불어.]
시에에엑.
어느새 론의 허리를 감싸고 턱 끝까지 올라 온 히드라가 고자질하듯 앓는 소리를 냈다.
고대 괴수 히드라.
아니, 이제는 완전히 마기가 소각된 흰 뱀이 론에게 착 달라붙었다.
“뭐 이것도 다 인연인가···.”
초연히 멸마의 불꽃을 집어삼켰던 히드라.
당연히 죽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탁하기만 했던 눈동자가 아닌 푸르른 하늘색의 눈동자가 그 증거다. 게다가 새끼 뱀처럼 크기도 작아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녀석은 론을 졸졸 따라왔다.
히드라의 과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의 섭리 속에서 평안히 지내길 바랐다. 그토록 원했었으니까. 그런데 녀석은 마치 막 태어난 새끼처럼 론을 따랐다.
“알았어, 안 놓고 간다니까.”
지금도 론의 말을 읽었는지 제 머리를 비비적댄다.
“신수는 신수인가 보네.”
단순한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무의식적으로 마나로 제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나저나 계속 히드라, 히드라 하고 부르긴 좀 그렇고. 뭐라고 불러주면 좋을까.”
시엑?
무슨 뜻이냐며 눈을 맞추는 흰 뱀.
순수하다.
과연 사람들에게 거악 혹은 재앙이라 불리던 그 히드라가 맞나 싶다.
그렇기에 론은 더욱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다시는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시엘.”
새액.
무슨 뜻이냐며 머리를 까딱이는 백사.
“하늘 또는 여자를 뜻하는 말이야.”
오래전 암컷 물뱀이라 불리던 전설과 백사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지은 이름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히드라, 아니 시엘이 론의 목을 감싸고 올라가 그의 이마에 머리를 맞댔다.
색색.
작은 울음소리에 고마움이 아주 한가득이다.
**
화아아앗.
화아앗.
밝은 대낮,
하이른 산지가 반짝였다.
바로 텔레포트로 인한 빛 때문이었다.
“이게 메스 텔레포트인가.”
히드라 봉인지에서 플리트비체 도시까지는 상당한 거리였기에 당연히 텔레포트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시엘.
둘 이상을 한 번에 이동시키는 마법은 하나밖에 없다.
메스 텔레포트.
현대 마법의 선구자이자 빛 마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대마법사 칼 하이젠베르크의 유산이다.
그 대마법사로 인해 메스 텔레포트 마법이 이 땅에 보급된 것은 물론이고, 초장거리 다인 이동 장치인 워프게이트까지 개발하면서 마법사라면 누구나 아는 그런 대마법사였다.
때문에 론 또한 그의 자서전을 읽었었다.
거기서 그는 말한다.
다인 이동 마법의 핵심은 인지와 지배라고.
5서클 몰아(沒我)의 경지를 거쳐 6서클 전아(全我)를 성립하게 되면, 자신을 자연 그 어디에 두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처럼 메스 텔레포트는 자신 이외의 대상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이지.”
론이 고개를 떨구자 그의 코트 안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시엘 보였다. 혹시나 또 두고 도망갈까 걱정하는 건지 론의 허리를 몸통으로 아주 꽉 두르고 있는 중이다.
[쪼끄만한 게 겁은 많아가지고, 흥.]
어느새 다가와 론과 같이 시엘을 쳐다보는 홍염. 이전에 론과 일체 되어 시엘의 과거를 보았어서 그런지 시엘에게 그리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근데 쟤는 언제까지 자는 거야.]
오히려 장난칠 대상이 생겨 좋아하는 것 같다.
“크기도 작아지고 한 거 보면, 진짜 새끼 뱀처럼 잠이 많아졌나 봐.”
[새끼 뱀? 그런가···.]
“응,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그 브래들리 후작가에 가기로 했잖아.]
“그러긴 했지. 그런데 뭔가 좀 애매하네.”
알펜샤 왕국 하이른 산지에서의 일정은 끝이 났다. 본래 목표였던 히드라 제거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는데, 어찌 됐든 그것도 해결한 건 맞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였다.
지금도 숨이 좀 벅찰 정도로 허리를 조이고 있는 시엘. 이 녀석을 데리고 곧장 브래들리 후작가로 갈 상상을 해보니 좀 이르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브래들리 후작.
회귀 전 이 아틀란샤 대륙을 집어삼킨 그 마계 집단에서 4명 밖에 없다는 동부의 성좌다.
코르테즈 같은 수하들은 물론이고, 그 본신의 힘 또한 이제껏 만난 이들과는 궤를 달리할 터였다.
“일단, 좀 상황을 지켜보자.”
[그래.]
**
다시 돌아온 플리트비체.
평소와 같은 저녁 무렵이었다.
여느 때처럼 하이른 산지를 탐색하고 돌아온 그가 조용히 도시 외곽의 여관에 들어가려 했다.
“야!”
딱 들어도 앳된 목소리에 론은 애들 장난이려니 했다. 그런데 이윽고 들린 소리에 론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월! 월월!
우렁찬 개소리.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썰매견 레브였다.
피식.
“꼬맹이, 그리고 레브 안녕.”
론이 미소로 답했다.
헌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소냐의 입술이 잔뜩 삐져나왔다.
“짐도 다 빼고! 어! 말없이 간 줄 알았잖아!”
“아아···.”
그러고 보니 여관을 나온 지 하루밖에 안 되었음을 깨달았다. 혹여나 봉인지에 위험이 있을까 싶어 소냐를 두고 건량까지 사다가 도시를 떠난 것이었는데, 고작 하루 만에 히드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좀, 그럴 일이 있었네.”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짓는 론.
그런데 이어진 소냐의 말에 그의 얼굴이 그만 굳어버렸다.
“우리 아빠가 오래.”
“켁!”
안 그래도 시엘이 허리를 움켜쥐고 있는데, 소냐까지 생뚱맞은 소리를 해버리니 순간 침이 기도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콜록콜록.
최대한 조용히 있다 가기 위해 숙소도 외진 곳의 여관으로 잡은 것이었는데, 현 플리트비체 최고 인사의 초대라니. 조용히 있다 가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시엑?
그리고 좀전의 요란한 반동에 놀랐는지 품 안에 있던 시엘이 잠에서 깼다. 궁금했는지 코트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녀석.
론이 뭐라 말릴 새도 없이 그의 깃 사이로 흰색 뱀의 머리가 튀어 올라왔다.
시엑.
론의 얼굴을 한 번 훑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엘. 그런 흰 뱀의 두 눈동자가 소냐와 마주쳤다.
‘어어···.’
론은 머리가 하얘졌다.
안 그래도 지방 귀족에게 불려가게 되어 번거로워진 마당에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흰 뱀까지 알려주게 됐다.
월! 헥헥.
레브 또한 궁금한지 다가왔다.
“그러니까 말이지···.”
딱히 신분을 감출 마음은 없었다.
다만 머나먼 타국 귀족의 자제가 홀로 이곳에 왔다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의심을 살 수 있기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귀엽다아!”
헥! 헥헥!
“······”
그런데 그런 론의 염려와는 달리 해맑은 소냐와 레브. 한달음에 다가온 그들이 가까이서 시엘을 구경했다.
“만져봐도 돼?”
소냐가 눈을 반짝였다.
“어, 그래···.”
아이들의 순진무구함에 압도되어 버렸다.
“안녕, 반가워.”
소냐가 조심스레 손끝을 내민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처음부터 쭉 쳐다보던 시엘이 다가온 손바닥에 머리를 대주었다.
“와아, 귀여워어.”
차마 조그만 시엘이 놀랄까 봐 큰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삭이듯 소리치는 소냐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는 레브 또한 꼬리를 연신 흔들며 흥미롭게 보고 있었고.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전에 얘기를 들어보니 소냐와 자신의 나이 차이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겉으로는 아들렌 아카데미의 차석이다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자다 뭐다 하지만, 결국 아직 미성년인 것이다.
충분히 어린 척해도 될 나이였다.
그렇게 대충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나자 굳어 있던 론의 표정도 차츰 풀어졌다.
“맨날 산에 갔던 게 이 뱀 때문이었어?”
“응, 설산 좋아할 거 같아서.”
귀족들에게 있어 사유지 및 재산에 관한 것은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론은 이곳 하이른 산지에서 시엘을 만나게 됐단 얘기는 일부러 뺐다.
“아하!”
말만 하면 맞장구치는 소냐 덕분에 얘기는 편하게 진행됐고, 론도 대충 말할 거리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 시각,
플리트비체 행정관의 저택.
“그러니까 소냐가 새로 사귀었다는 꼬맹이가 이 도시 아이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행정관님. 애어른 할 것 없이 론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은 플리트비체에는 없었습니다.”
“백 퍼센트 이방인이란 얘기군.”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꼬맹이가 많고 많은 아이 중 하필 우리 소냐와 만난 것이고?”
“크흠···! 그 따님이 전부터 워낙 자유분방하기도 하고, 또 데리고 다니는 엘리아툰이 영물이기도 해서···.”
“틸켄.”
“예, 행정관님!”
잠자코 대답하던 중년의 집사 베른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가문의 영애를 대함에 있어 소홀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파티에 다니다 보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더군. 그게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트렌드, 최신 동향이다. 그런데 요새 대륙 곳곳에 흉흉한 소문 돌고 있지. 유괴, 마약, 습격 등등. 뭐 전부터 줄곧 있었던 얘기지만, 문제는 그 표적이 바로 귀족 자식들에게도 쉬이 일어난다는 점이야.”
“죄송합니다! 앞으로 가문의 자제분들을 대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틸켄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잘 주의하도록 하고, 그 식사 준비나 좀 한 번 더 확인해 보게. 홀로 타 영지에 온 걸 보면 귀족 같지는 않고. 평민이 볼 줄 아는 거라고 해봐야 식탁 테이블 말고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집사 틸켄이 대답을 마치고도 그대로 자리에 머물러 있자 행정관 대니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그···. 셋째 따님을 데려오도록 따로 병사들을 풀까요?”
피식.
한차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대니 모리츠가 말했다.
“영지에 돌아오자마자 피코스를 붙여 놨네. 정 걱정되면 타종(打鐘)이나 한 번 확인하게. 타종 시간에 소냐를 데려오기로 했으니까.”
“아! 예, 알겠습니다.”
피코스는 플리트비체의 수석 기사다.
때문에 행정관의 이번 파티행도 그가 수행했었는데, 그런 그를 소냐에게 붙여줄 줄은 집사 틸켄도 예상치 못했었다.
대외적으로는 파티에 취해 사는 것처럼 보이나 누구보다 대륙 정세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자. 그게 바로 플리트비체의 행정관 대니 모리츠였다. 젊은 나이에 도시급 영지의 행정관이 된 그다. 당연히 방계에서는 말이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열심히 대외 정세를 파악하고, 도시 내 사업 확장과 투자 등 여러 가지 운영 수익을 내는 것밖에는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도시민들은 그런 전체적인 부분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대니 모리츠도 이번만큼은 소냐가 데려오는 그 친구가 얼마나 큰 거물일지는 가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