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1
히드라.
오랜 과거에는 암컷 물뱀이란 뜻이었다.
허나 당시에는 색에 대한 구분도 정의도 미비했기에 그런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저 흰 뱀, 백사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보통의 뱀과는 달리 멜라닌 세포의 유전 질환으로 색소가 결핍된 개체들. 그래서 흰색을 띨 수밖에 없는 뱀. 그 뱀이 바로 히드라의 오랜 과거였다.
뭍 뱀들처럼 피부가 보호색을 띠는 것도 아니고, 눈에도 멜라닌이 없어 입사광량 조절도 불가해 여러모로 취약했다.
기존의 무리와는 상반되는 특징.
때문에 히드라는 무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유전적 결함, 집단에서의 소외, 빈약한 생존능력. 당연히 자연도태되어 사라질 게 예정된 존재였으나, 히드라는 그저 묵묵히 나아갔다. 해가 뜬 낮이면 햇빛을 피해 물속에서라도 이동했고, 어두운 밤에는 보호색도 띠지 못하는 흰 피부로 꾸역꾸역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마주한 존재.
태초의 자연이었다.
유전적 한계를 넘어 생의 의지를 내보인 히드라는 결국 신의 축복을 받았다. 신성(神性). 짐승으로서 마주해야 하는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 이를 초연히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바로 신수(神獸) 말이다.
신의 축복으로 자아(自我)와 이지(理智)는 물론이고 마나까지 다루게 된 히드라. 그런 그가 향한 곳은 뭍 뱀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새하얀 설산.
그곳에서 그는 조용히 태초의 자연을 따랐다. 그들이 이 지상계를 떠날 때까지.
***
샤아아아악!
눈이 번쩍 떠진 백사가 적의를 가득 담아 울부짖었다.
“이, 이게 히드라라고?”
회귀 전 그토록 악명을 떨쳤던 괴수.
대륙 동부를 맹독과 지옥의 겁화로 밀어버렸던 악의 선봉장이자 인류로서는 차마 막지 못한 거악(巨惡)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작다고?’
‘피부색이 하얗다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리고 히드라는 머리가 대여섯 개씩 되는 뱀 아니었나? 이 조그만한 뱀이 맞아?’
회귀 전 조용히 숨어지냈던 론은 당연히 히드라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전해지는 소문만 들었을 뿐인데,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눈앞의 흰 뱀, 백사(白蛇)는 그 악명 높은 히드라와는 확실히 동떨어져 있음은 알 수 있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히드라의 전신을 훑던 론은 이내 놈의 눈과 마주쳤다.
하얀 피부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시커먼 눈동자.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사고가 정지하며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분명 전에도 한 번 경험했던 것이다.
‘심연의··· 마안(魔眼)?’
코르테즈에게 한 번 당해봤던 론이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는데, 그러했기에 그는 피하지 않았다.
환술.
일종의 정신 주박술로 시전자의 정신을 담보로 상대를 현혹하는 것이다.
때문에 론은 오히려 파고들었다.
눈 앞에 펼쳐진 심연 너머에 있을 환술의 주체를 확인해 보기 위해.
어느새 사위를 잠식하기 시작한 어둠.
환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런 어둠 속에서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한 절망과 공포. 역시나 심연이 맞았다.
‘확실하네.’
“후우.”
한 차례의 심호흡 후 론이 집중했다.
끝없이 펼쳐진 절망과 공포지만, 올곧은 신념만 있다면 어떤 한술이라도 아무 짝에 쓸모없음을 아는 그다.
화르르륵.
광활한 심상의 세계 속에 하나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모든 걸 묻어버릴 듯한 어둠이었지만, 론의 정신은 꺼지지 않았다.
히엑?
히드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오랜 생애 동안 수도 없이 마주쳤던 인간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던가.
허약한 신체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이지(理智)와 영성(靈性)으로 운 좋게 먹이 사슬 위로 올라선 자들이었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몸으로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이 땅을 지배하려 했던 놈들이!’
키햐아아아악!!
희미해져 가던 오랜 기억.
허나 그 기억이 히드라의 분노가 치솟게 했다. 곧이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물론이고, 검은 눈동자 주위까지 급속도로 거멓게 물들어갔다.
‘음?’
어둠을 뚫고 나아가던 론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중압감에 멈칫했다.
화르륵.
단순한 물리력이나 중력 같은 것이 아니었다.
‘코르테즈보다 한 수 위라는 건가.’
“크윽···.”
론의 입에서 육성으로 신음이 새 나왔다.
과거의 기억 혹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절망이 아니라 원초적인 그 무언가였다.
종(種)의 영역을 넘어 이 땅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그 덩치를 키워가던 그것이 이내 론의 감각에 잡혔다.
“미, 마친!”
단순한 심연이 아닌 그곳에서 오래도록 타락한 영혼, 바로 히드라의 실체였다.
콰아아아아앙!!
쩌저적.
봉인 마법진이 그려진 땅에 금이 가고, 새하얗던 히드라의 피부는 어느새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아···.”
환술은 일찍이 깨져버렸고, 히드라는 당당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있던 머리 옆으로 튀어나온 수많은 머리. 그 하나하나가 극악의 심연을 담고 있었다. 분노, 원망, 미움, 시기, 질투, 증오 등등.
‘하등한 것들이 감히!!’
슈우우우욱.
갑자기 폐부에 공기를 모으기 시작한 히드라.
‘설마?!’
회귀 전 히드라가 그토록 악명이 자자했던 이유는 바로 그가 내뿜는 맹독과 지옥의 겁화 때문이었다. 닿는 즉시 죽음을 내놓아야 하는 그 치명적인 공격.
“하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분명 싸우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었다. 허나, 실제 그 상황이 펼쳐지니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봉인이건 뭐건 간에 놈이 히드라인 것은 확실하니까.
‘나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론이 똑똑이 눈앞을 쳐다봤다.
놈의 폐부에서는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이내 곧 엄청난 불길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지옥의 겁화.’
본래라면 지금 꺼내야 하는 것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땅의 성수.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의 직감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 굳이 땅의 성수여야만 하는가부터 히드라의 봉인지가 이곳인 이유 등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마주하고 싶다.’
론이 내린 결론이었다.
‘홍염.’
[응? 나?]
당연히 땅의 성수를 꺼낼 줄 알았던 홍염은 자신을 찾는 론에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마주쳐 보자.’
론은 긴말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대로의 마음을 전했다.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고 싶다는.
[좋아!!]
홍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고, 그 불이 론을 집어삼켜 버렸다.
6서클 초인형 불 마법 화인(火人) 그리고 불의 정령. 그 둘이 하나가 되었다.
화아아아악.
[아아···.]
홍염이 나지막이 탄성을 질렀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현상.
본래 정령사와 정령이 하나가 되어 교감을 나누는 것은 아주 지고한 경지이다.
상급 혹은 대정령사가 되어서야 가능한 수준인데, 론은 그 길을 마법으로 뚫어버렸다.
그 감격스러운 상황에 홍염은 자신이 뽐낼 수 있는 가장 열렬한 불꽃으로 화답했다.
콰화아아아앙.
멸마의 불꽃이었다.
땅의 성수와 더불어 태초의 기운을 머금은 원소. 그것이 다시금 이 땅에 피어올랐다.
키햐아아아악!!
그리고 때맞춰 히드라의 머리통에서는 시커먼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
설산의 신수(神獸).
괴수가 아닌 신수라 일컬어짐은 그 행동이 목격자로 하여금 이로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길 잃은 인간에게는 그 지나간 흔적으로 길 안내를 했고, 굶주린 이들에게는 섭리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먹이를 제공했다.
오래전 태초의 자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땅을 운행했던 것처럼 설산의 흰뱀은 그 유지를 따랐다.
허나 모든 인간이 그런 신수를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탐욕에 휩싸인 인간.
그들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설산의 수호신으로 존재하던 백사, 히드라에게까지 다가갔다. 날카로운 날붙이를 들고서.
인간의 탐욕을 피해 숨어보기도 했으나, 끝없는 살육의 연장일 뿐이었다. 제 동족은 물론이고 숲의 생명들까지 가차 없이 해하는 인간들.
그리고 그 모든 어긋남의 근원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여긴 히드라는 결국 머리를 내주었다. 이 모든 탐욕의 분쟁이 끝나길 바라며.
그렇게 히드라는 산채로 그 새하얀 피부가 벗겨졌고, 두 눈 또한 그대로 뽑혔다. 몸 곳곳이 인간의 욕망에 의해 갈가리 뜯겨나갔다. 그 의식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언제였을까.
차디찬 어둠 가운데 무언가가 그를 깨웠다. 매 아침이면 그를 깨우던 새들의 지저귐도 아니고, 은은한 아침햇살도 아니었다.
분노, 원망, 미움, 증오가 어둠 속의 그를 끄집어냈다.
그렇게 다시금 마주한 지상계.
인간의 욕망은 더욱이 하늘을 찔렀고, 그들은 아예 신이 되려 하고 있었다.
‘심판하리라.’
그것이 바로 마족에 의해 부활한 설산의 신수이자 고대 괴수 히드라의 시작이었다.
**
탁하다.
히드라가 뿜어낸 어두운 불길을 마주한 론의 첫 감상이었다.
허나 홍염의 고유 능력인 멸마의 불꽃 덕분에 히드라가 내뿜은 지옥의 겁화는 그대로 소각되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시시각각 어둠의 기운이 사라지자 히드라는 당황했다.
‘어떻게! 어떻게···!!’
완전히 흑뱀이 되어버린 히드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알량한 힘 가지고 섭리 위에 서려 했던 오만방자한 인간이 계(界)를 벗어난 힘을 다루고 있었다.
‘?!’
그리고 동시에 히드라는 자신 또한 지금 지니고 있는 이질적인 힘에 대해 비로소 인지할 수 있었다.
이 땅의 섭리와는 어긋나는 힘.
혼돈과 파괴만이 가득한 기운이 영혼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빌미가 되어서.
‘아···.’
신성(神性)이라는 신의 축복을 받고, 신수(神獸)로서 섭리를 수호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인 타락.
그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 히드라의 영혼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론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단계.
바로 자의식 붕괴였다.
“괜찮아!”
그런 그에게 론이 외쳤다.
누구보다 히드라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 저기서 지면 그대로 나락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다.
“무너지지 마!”
누군가 그랬다.
신은 우리에게 이기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고. 무너지는 것은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지 이기지 못할 시련 때문이 아니라고.
지옥의 겁화를 소각하고 나자 론은 볼 수 있었다. 히드라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한(恨)을.
‘저 한(恨)을 풀어주면, 괴수의 족쇄에서 풀려날 수 있는 건가.’
소생, 부활, 전생, 회귀.
이미 한 번의 삶을 살고 돌아온 론에게 있어 히드라는 남 일 같지 않았다.
때문에 당장이라도 멸마의 불꽃으로 히드라를 소각시켜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치이이익.
그저 히드라의 몸에 있는 마기만을 태울 뿐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말했다.
오래전 그토록 히드라를 분노케 했던 그 인간들을 대신해서.
퍼서석.
심연의 감정들로 가득 찼던 시커먼 머리들이 하나둘 멸마의 불꽃에 녹아 사라졌다. 시커멓게 변했던 피부도 점점 하얗게 돌아오고 있었고.
[이렇게만 해도 괜찮아?]
염려가 가득 담긴 홍염의 질문.
허나 론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의 불길은 진정되어져 갔는데, 그와는 정반대로 바닥의 봉인 마법진은 땅들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아주 오래전, 히드라를 봉인했던 그 누군가도 실은 이런 결과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