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90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시간.
석양의 빛이 이 땅의 모든 걸 아련함으로 덮는 듯하다. 이제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두운 밤이 찾아와 더는 볼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아련함을 누군가 느낀 걸까.
“나, 나도 여기서 잘래!”
수십 번의 망설임 끝에 튀어나온 말.
조그마한 손을 움켜쥔 아이,
소냐로부터였다.
그녀는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행정관의 딸이라며 무조건 떠받드는 어른도 아니고, 은근히 거리를 두는 또래의 아이들도 아닌,
그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소냐.”
론이 소냐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가 맞을 수 있도록.
어리다.
조금 전 그 목소리만큼이나 아직 여물지 않은 그 풋풋함과 순수함이 그대로 어려있는 얼굴.
누군가 그랬다.
모든 생명체가 새끼 때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생존을 위한 자기 보호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귀엽네.’
“여기서 잔다니, 누가 들으면 아주 오해하겠어.”
론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소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내 곧 론의 말 뜻을 이해한 소냐의 얼굴은 아주 새빨개졌다.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앗!! 그, 그냥 나도 집 나와서 여기서 잔다는 얘기인데에!!”
소냐가 제 머리 위에 얹어진 론의 손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소리를 빽 질렀다.
피식.
“꼬마 숙녀님, 아무리 그래도 집을 나오면 안 되지요.”
아까 하산하며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레브가 어떻게 해서 입양되었는지.
무관심한 가족들이 싫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했다.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건 어리광이야. 소냐는 그런 어린 애 아니지?”
“칫! 나도 안다 뭐!”
고개를 획 돌리는 소냐.
그런 그녀를 잠시간 훈훈한 미소로 쳐다보고는 이내 일어났다.
“레브. 돌아오는 길 안내해 줘서 고마웠다.”
월! 월!
알아들었는지 짖는 소리가 아주 커다랗다.
동물과의 짙은 교감.
종(種)의 한계를 넘어선 유대 또한, 또 하나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인 걸까.
론은 소냐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과장된 표현들 속에서도 그 의미를 고고히 드러냈던 것. 바로 짙은 교감.
생각지도 못한 재밌는 숙제를 준 이들에게 감사했다.
“그럼 조심히 가.”
“안 그래도 갈 거야!”
그러기를 한참.
론이 말을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자 소냐는 결국 돌아섰다.
“뭐, 너가 좋다기보다는 나도 산을 좋아하니까. 또 봐···.”
“그래.”
월! 월월!
그렇게 론은 돌아가는 그들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나중에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너무 어렸다.
무언가를 함께 도모하기에는 아직 성장해야 할 나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며 가치관을 성립할 시기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앞날이 불확실한 자신보다 무관심하더라도 든든한 가족의 테두리가 나으리라.
세상을 등지는 석양처럼 론의 마음도 이미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
**
이른 아침.
새들도 아직 울지 않는 그 이른 시간에 론이 여관을 나섰다.
[정말 오늘은 일찍 나서네?]
‘그러기로 했으니까.’
플리트비체 도시 행정관의 딸 소냐.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게다가 그녀와 함께 다니는 대형견 레브는 어떻던가. 이 땅에서는 보기 드문 영물이다.
허나 론이 지금 가는 곳은 그런 아기자기함과는 거리가 먼 곳.
“건량도 충분히 사놨으니.”
어제 저녁, 소냐가 떠나고 론은 즉시 잡화점을 돌아다니며 육포를 비롯한 각종 건량을 사놨다. 이유인즉, 조용히 도시를 떠나기 위해.
대륙 중부의 아들렌에서부터 대륙 북부까지는 그 거리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초장거리 이동식 워프게이트가 시공간의 제약을 허물어주긴 하지만, 먼 이국땅에 성년도 안 된 학생이 돌아다닌단 소문은 이러나저러나 그를 번거롭게 만들 게 뻔했다.
때문에 일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있다 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그 꼬맹이가 분명히 여기 올 텐데.]
‘뭐 특별한 사이가 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어제 엄청 아쉬워 했는걸?]
‘음?’
정령 계약을 통해 영(靈)이 생겨난 홍염은 자유로운 사고와 더불어 공감 능력도 인간 못지않아 보였다. 마치 또 하나의 아인종과 대화하는 듯한 기분.
‘그럼 아쉽지만, 한 겨울날의 추억으로 간직해야지.’
그리 말하며 론은 홍염이 있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 또한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서.
[흐, 흐응···.]
최근 들어 론이 느끼는 것.
홍염은 확실히 자신의 손길을 좋아했다. 때문에 홍염의 기분이 업 될 때까지 쓰다듬은 그가 이내 말했다.
“이제 출발하자.”
[응!]
빠르게 도시를 벗어난 론은 숲속에 이르자 지체 없이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츄아아아악.
슈아아악.
수십 번에 걸친 텔레포트.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전방의 시야가 바뀌었지만, 론의 순간이동 마법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완전히 밝을 때쯤.
론은 텔레포트를 멈췄다.
“이쯤이면 될 것 같은데?”
[응, 하이른 산지 기준으로 플리트비체의 거의 정반대야.]
남다른 후각을 지닌 레브를 의식해 지면을 밟지도 않고 연속해서 텔레포트를 시전한 론이었다. 그런데 생각 외로 그 때문에 순간이동에 대한 감각이 높아졌다.
‘그럼 텔레포트도 설마···.’
화르르륵.
순간 론의 손에서 피어오른 불꽃.
딱히 그가 마나를 끌어오고, 평면마법진을 그리고, 마법식을 새기는 일련의 과정을 하나하나 떠올린 게 아니었다.
그저 ‘불’을 인식했을 뿐.
특정 마법식이 함유된 게 아니라면 론은 이제 즉시 시전. 아니, 즉시 소환이 가능했다.
그것이 바로 고대 불의 정령 홍염이 일으킨 멸마의 불꽃을 통해 마주했던 대자연의 섭리였고, 또한 태초의 자연의 의지였다.
한 번 물길이 튼 곳에 계속해서 물이 흐르듯 6서클을 넘어 7서클의 깨달음까지 얻어버린 론은 이제 숨만 쉬어도 자연의 섭리가 선연히 느껴져 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알펜샤 왕국에서 와서 끊임없이 생각해 오던 것.
고대 괴수 히드라의 봉인지.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초감각이 론의 뇌를 자극했다.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추측.
어느새 내디디고 있는 발걸음 속에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지의 지형과 그로부터 비롯된 대기의 방향, 햇빛이 비추는 정도, 습도, 토지의 수분 함유량, 지하수의 배치도 등 수많은 정보가 머릿속에서 가공되어 하나의 추측을 확신으로 끄집어냈다.
츄아아악.
그리고 순식간에 텔레포트로 이동한 장소.
“여기···.”
[응? 왜?]
한동안 자리에 서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이동해서는 중얼거리는 론을 보며, 홍염이 의아해했다.
그런 홍염에게 론은 또박또박 말했다.
“히드라의 봉인지야.”
[으응? 정말?! 어떻게 알아?]
“그냥···.”
[그냥?]
“그냥 온 자연이 여기를 가리키고 있어.”
인간의 논리적 추론 영역이 아니었다. 오감으로 받아들이고 판단한 정보가 아닌, 그저 자연의 섭리가 보는 그대로 생각을 맡겼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곳.
주위를 두리번대는 홍염과 마찬가지로 론 또한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확인했다.
“아···.”
그리고 가장 먼저는 생각은,
어떤 음습한 비지(秘地)가 아니라는 점.
마치 파브렌 고원의 전망대처럼 이 땅의 광경이 훤히 보이고, 햇볕도 잘 드는 곳이다.
한동안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극지방의 한풍이 옷 사이로 차갑게 파고들었지만, 그러했기에 따뜻한 햇볕이 더없이 잘 느껴졌다.
또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울창하게 자란 숲. 지저귀는 새들과 뛰어다니는 짐승들.
온 자연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
‘이곳인가.’
론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의 의심은 거둔 채 마나의 손길을 뻗었다.
후우우우웅.
이미 확신하다시피 한 론은 마치 체외 서클을 운용할 때처럼 체내의 마나를 아낌없이 풀어냈다.
‘재고 할 것도 없다.’
지면을 파고든 론의 마나가 땅속으로 파고들며 찾는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땅의 성수.
불멸을 없애는 게 바로 땅의 성수라 했던 오랜 전설. 그리고 이를 부인하지 않았던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 그 얘기는 즉, 어떻게 됐든 히드라의 봉인에 땅의 성수가 관여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슈우우우욱.
정령사의 찬가로 다져진 네 개의 서클에서 토해낸 엄청난 양의 마나들. 그것들이 땅속을 파고들며 속속들이 그 정보를 론의 머릿속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론의 마나는 그가 서 있는 산의 전부를 집어삼켰다.
“아···.”
히드라에 대한 어떤 단서 혹은 아뷔메르, 저 심연의 기운을 느낀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깨달음에 론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상계, 땅.
단순히 지면 위의 세상만이 그 전부라 여겼던 것과는 달리 이 땅속에는 생의 기운이 가득했다.
씨앗을 잉태한 흙과 뿌리들로 치열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들,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양분을 제공하는 지대.
론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오래전, 고대 괴수라 일컬어진 히드라가 멸마의 불꽃에 사라진 게 아니라, 왜 봉인이 됐었는지를.
단순한 봉인이 아니었다.
회귀 전 히드라가 그리도 땅의 성수를 꺼려했던 이유. 그것은 땅의 성수에 담긴 힘.
치유와 소생이었다.
지이이이잉.
그리고 그러한 결론이 정답이라는 듯 론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햇빛보다 찬란한 빛이 론을 집어삼켰다.
“윽···!”
눈꺼풀을 뚫을 듯한 강렬한 빛이 이내 사라지고, 다시 론이 눈을 떴을 땐 캄캄한 밤이었다.
“아니, 동굴···인가?”
이전의 쨍쨍한 햇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연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커다란 원형 마법진. 그리고 그 위에 늘어져 있는 길쭉한 어떤 무언가.
가까이 다가가며 느낀 감상은 간단했다.
“하얗고 기다란··· 뱀?”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되짚어 보면, 이곳이 바로 고대 괴수 히드라의 봉인지임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작은 뱀은 뭐란 말인가. 아이들 손목보다도 가늘어 보이는 몸통 굵기. 도저히 회귀 전 대륙 동부를 휩쓸었던 그 히드라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홍염, 어떻게 생각해?”
더 이상의 판단을 보류한 채 론이 홍염에게 물었다. 이곳에 온 뒤로 줄곧 놀람과 호기심을 자아내던 그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음···. 글쎄. 그래도 평범한 뱀 같지는 않네.]
“그렇지. 당연히 평범한 뱀은 아니···.”
론은 그제야 자신이 눈앞에 둔 이 뱀이 보통 짐승이 아님을 깨달았다. 회귀 전 기억에 매몰되어 놓치고 있었을 뿐, 이 하얀 뱀은 분명 단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최소 영물, 아니면···.”
[아니면?]
영물과 신수를 구분 짓는 경계선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기에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자아(自我)를 완성한 존재체들이란 점.
저벅저벅.
론이 원형 마법진을 향해 나아갔다.
자아(自我).
또 다른 말로는 영혼.
그리고 이는 곧 흑마법사들이 네크로맨시를 통해 심연의 어둠을 새겨넣는 그 그릇이기도 했다.
즉, 지금의 그는 그 흑마법사들이 당도하지 않은 시점에 먼저 와 있는 것이었다. 그 안도와 희망이 론을 방심케 했다.
그렇게 무심코 내뻗은 손.
무형의 장막에 닿기 무섭게 하얀 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샤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