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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가 마법사의 회귀-88화 (88/115)

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8

플리트비체 도시의 한 여관.

도시를 돌아다니다 대충 괜찮아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론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왔다.

[하얀 산이 보여!]

창가 앞에서 서성이는 홍염.

그 일렁이는 불꽃을 잠시 보고는 론이 짐을 풀었다.

‘개학까지는 약 한 달 반.’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 일정에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 고국에서의 일을 통해 홀로 초연해지는 법을 깨달은 그였다. 더 이상 천재니 뭐니 하는 것들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골든스태프 대회도 영지를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말이다.

즉, 론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어둠의 세력뿐이었다.

‘일단 히드라에 대한 것부터 마무리 지어야 겠지···.’

코르테즈가 성좌라 칭했던 브래들리 후작부터 해서 회귀 전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당장은 과거 이 동부 땅을 폐허로 만들었던 그 원흉이 먼저였다.

고대 괴수 히드라.

회귀 전 하도 흉흉한 소문이 많이 돌았던 지라 론은 땅의 성수 때만큼 조사할 필요는 없었다.

알펜샤 왕국 동부의 플리트비체 도시 옆에 있는 하이른 산지가 그 히드라의 봉인지였다. 더없이 확실한 정보.

“워터.”

우우우웅.

슈우욱.

순식간에 펼쳐진 마법진 위로 물이 솟구쳐 나왔다. 2서클의 기초 원소마법 워터가 맞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그 물이 아니었다.

바로 땅의 성수.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로부터 전수 받은 물의 이치(理致) 덕분에 단순한 물 마법에도 땅의 성수를 담아낼 수 있게 된 론이다.

[으으···. 그때 그 미친 정령의 물이잖아···.]

어느새 다가온 홍염이 질색을 표한다.

‘그래도 히드라의 불멸의 꺾는 건 이 물의 성수니까···. 음?’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다.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의 얘기와 그가 전해준 물의 이치에 따르면, 이 지상계를 지키는 힘이 바로 태초의 자연으로부터 받은 고대의 힘이었다.

그것이 물의 경우에는 땅의 성수였는데, 그렇다면 고대 불의 정령인 홍염의 멸마의 불꽃은 무엇일까. 그것도 고대의 힘이 아닌가. 멸마의 불꽃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걸까.

사실 전에도 히드라에 대해 홍염에게 물어보긴 했었지만, 정(精)일 때는 영(靈)이 없기에 사람처럼 특정 사건을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저 긴 세월을 인지하는 게 다일 뿐.

‘땅의 성수와 멸마의 불꽃이라···.’

여러모로 궁금한 주제.

허나 그 스스로는 결론을 낼 수 없는 내용이기에 론은 이내 곧 상념을 지웠다. 그러고는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홍염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 홍염. 너가 최고야.’

[흐응···.]

그래도 그의 쓰다듬는 손길이 싫지는 않은가 보다.

**

론과 홍염이 본격적으로 히드라의 봉인지를 찾아 나선 것은 다음 날부터였다.

플리트비체 도시에 오기까지 마차행만 일주일 가까이했던 터라 여독을 풀어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물의 궁전으로 인도해 주었던 홍염과 정령왕 오비니트로부터 전수받은 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을 앞설 순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하이른 산지가 넓다곤 해도 론과 홍염이 내딛는 그 행보는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레고리 고국의 서부 수림만큼 넓은 건 아니니까.”

단조로운 패턴이 이어졌다.

수많은 봉우리를 하나씩 오르며 확인하고, 순간이동으로 빠르게 귀가하는.

그러기를 약 일주일.

플리트비체 인근의 봉우리는 다 확인한 그가 제법 깊숙한 위치의 봉우리에 오르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일주일간 대략 5분의 1 정도 둘러본 건가···. 정말 다 둘러보고 마지막에 찾는다고 가정하면 대충 걸리는 시간은 한 달 정도겠군.’

푹 푸욱.

치이이익.

론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홍염은 주위의 눈을 보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길쭉한 모양의 불길을 눈 속에 콕콕 찌르니 그 뜨거운 열에 증기가 솟아올랐다.

“재밌어?”

[응! 신기해! 내가 물의 섭리를 일으키고 있어!]

차가운 눈이 녹아 물이 되고, 그 물이 불의 열기에 못 이겨 증발하는 과정. 불의 정(精)일 때는 쉬이 경험해 볼 수 없는 걸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으키니 아주 신이 나 있었다.

그런 홍염을 잠시간 지켜보던 론은 이어 체내의 마나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웅우웅.

단순히 기감을 위한 용도를 넘어 서클에 담긴 모든 마나를 풀어내자 엄청난 에너지의 파장이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응? 시작하는 거야?!]

장난을 치던 홍염도 어느새 불길을 거둬들였다. 론이 봉우리 정상에 오를 때마다 매번 하던 것.

체외서클이었다.

후우우욱.

끝없이 뻗어나가는 마나들을 이내 한 점에 빨려 들어갔다.

7서클의 기반이 되는 체외서클은 지극히 자아성찰적 영역인 6서클과는 달리 마나컨트롤에도 엄청난 숙련도가 필요했다. 때문에 아무도 없는 정상에 오르고 나면, 이렇게 마음껏 마나를 풀어헤치고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구후우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 중의 마나까지 한 점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체내에 가지고 있던 4개의 서클.

그 안에 담긴 마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마나가 선연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그 양을 늘려가고 있었다.

“흐읍!”

상식적으로 보나 뭐로 보나 이미 인간의 한계치를 넘은 상황. 허나 론은 눈을 질끈 감고는 버텼다.

플라델의 미로에서 플라델이 보여줬었던 것처럼.

피에타 유적에서 사티넬이 그랬던 것처럼.

누가 봐도 인식 밖의 현상이었지만, 그것을 이루는 자는 분명 있었다.

그래서 버텼다.

플라델도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

“크으윽!!”

그런데 영겁과도 같은 긴 시간을 가르며 홍염의 생각이 들려왔다.

[오오, 좋아! 지금 3분 지났어!]

‘어제 기록은 경신···.’

심리적 허들을 넘어섰다는 안도.

그 달콤함이,

순간 실낱같은 빈틈으로 파고들었다.

쿠후우우우웅.

인식 너머의 어딘가로부터 균형이 무너지고, 체외서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퍼어어어엉!

“커허어억!”

마치 무거운 돌덩이를 받치던 손이 순간 절단이라도 된 듯 컨트롤하던 손끝의 감각이 사라졌다.

후우우우우웅.

그리고 이어서 밀려오는 엄청난 마나의 파동은 마치 강풍과도 같았다.

[와아, 엄청난 마나야···.]

“하아, 하아···. 조금, 조금만··· 쉬었다 하아···.”

털썩.

밀려오는 탈력감에 결국 론이 바닥 쓰러졌다.

**

“아가씨! 오늘은 행정관님께서 귀가하시는 날입니다!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으으, 시끄러워! 가자, 레브!!”

월!

뭔가 다급함이 느껴지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와 귀찮음이 가득한 소녀의 목소리. 그리고 커다란 짐승 소리가 한 저택 입구에서 터져 나온다.

그리고 이내 커다란 덩치의 개도 그 입구에서 튀어나왔다.

월! 월!

“이제 갔으니 좌판 깔아도 될 듯 허이.”

“껄껄걸, 농장의 닭만큼이나 매번 정확하구먼. 영업 시작하세나 다들.”

“어째 레브, 저 개는 점점 더 크는 거 같어.”

“영물(靈物)이니 당연한 거 아녀. 새삼스럽게시리.”

플리트비체 도시 행정관의 막내딸 소냐. 그리고 그녀의 반려동물 레브. 그들이 아침마다 저택 앞에서 일으키는 소동은 도시민들에게 이제 일상이었다.

그렇게 도시민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이.

‘오늘은 정말 집에 안 돌아 갈 거야!’

이 소동의 주인공 소냐의 양 볼은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유인즉 하루가 멀다 하고, 귀족 사교 모임에 빠진 자신의 아버지, 플리트비체 행정관 때문이었다.

대니 모리츠.

소냐의 아버지이자 모리츠 자작가의 삼남이었던 그는 일찍이 후계 경쟁에서 물러나 행정관 자리를 어필했었고, 덕분에 그는 이른 나이에 플리트비체라는 나름 도시급 규모 영지의 행정관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이른 나이가 문제였을까.

대니 모리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 부인과 함께 사교 모임 및 파티를 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자기 딴에는 자식들이 사리 분별 혹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아이도 아니었기에 그런 것이었는데, 문제는 바로 어제가 그의 막내딸 소냐의 생일이었다는 점.

저택에 남아 있던 형제자매와 집사들이 그녀의 생일을 챙겨주긴 했으나, 소냐는 이제 열한 살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관심받고 싶고 이쁨받고 싶은 그런 나이 말이다.

결국 토라질 데로 토라진 소냐.

그런 그녀의 서운함이 양 볼에 고스란히 담겨 아주 빵빵하다.

“레브, 오늘은 아주 도시를 벗어나자. 집에 안 돌아갈 거야!”

끼히이잉 히잉···.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애!”

빠르게 달리는 중은 아니었으나, 소냐가 갑자기 레브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이 큰 개를 영물(靈物)이라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덩치 때문만이 아니다. 오랜 시간 같이 자라 온 레브는 소냐와 소통이 가능했다.

“레브만 있으면 괜찮아!”

때문에 소냐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 그녀의 반려견 레브에게 전했다.

월! 월월!

그리고 이를 고스란히 느낀 레브.

힘차게 짖어댔다.

“힛, 레브. 그래도 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레브의 등허리에 착 붙은 소냐가 목덜미를 쓰다듬자 레브가 기분이 좋은지 그르릉 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지···.’

플리트비체가 목재와 조각 사업이 발달한 곳이라 도시를 둘러보기만 해도 볼거리들이 꽤나 많은 편이지만,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소냐에게는 사실 식상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포근한 레브의 털에 파묻힌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귀족 평민을 떠나 또래라고 있는 아이들은 레브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소냐도 딱히 그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흐응···.”

그렇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소냐.

“어?”

그녀가 갑자기 한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관 건물을 빠져나와 하이른 산지로 향하는 붉은 머리의 한 남자.

분명 며칠 전에 도시를 질주하다가 만난 외국인이었다. 플리트비체에 관광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소냐에게 있어 저렇게 짙은 적색 머리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소냐의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그녀가 호기심이 생길 때마다 나오는 습관이다.

“레브, 오늘은 산에 가보자.”

평소엔 잘 가지 않던 산을 얘기하자 레브의 고개가 기울었다.

“잘 들은 거 맞아. 저기 앞에 산, 하이르 산지에 가자!”

월! 월!

어느새 제법 기분이 풀린 듯한 그녀의 분위기에 레브는 그저 좋아할 뿐이었다.

***

헥 헥헥 헥···.

별생각 없이 시작한 산행.

하지만 목표는 확실했다.

바로 붉은 머리의 남자.

그런데 왜소하다고 느낀 체구와는 달리 그 나아가는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중간중간 시야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레브의 민감한 후각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뻔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쫓아온 소냐와 레브.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오! 레브, 그런데 여기 진짜 맞아?”

소냐가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며 묻는다. 여전히 그녀의 시야에는 붉은 머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헥헥.

레브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레브의 후각은 분명히 이 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여기서부터는 그 사내가 천천히 등반했다는 점이었고.

월! 월월!

레브의 생각을 알아들은 소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브의 등허리에서 내려왔다.

꾸웅?

츄릅.

그런 그녀의 볼을 핥는 레브.

“괜찮아. 여기서부터는 그 사람도 걸어 올라갔다니, 나도 걸어가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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