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7
순수(純粹).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을 뜻한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자연의 극의에 다다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현상을 깨우치고 지배하려는 자들.
그런데 론은 다다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무엇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상태가 바로 태초임을.
고대 불의 정령 홍염을 통해 론은 그 오랜 자연의 향취를 느꼈다.
오랜 고마법사들이 수많은 연구와 노력, 기연을 통해 겨우 얻을 수 있는 그 희미한 깨달음의 영역. 그것을 지금 론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신과 그 신을 보좌하던 태초의 자연이 아직 지상계에 머무를 적의 향기를 맡아보는 듯했다. 직접 대면을 한 것도, 대화를 한 것도 아니었으나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현상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마나로부터 뻗어나가는 원소들이 훤히 눈에 들어온다.
‘굳이 내 안에 담을 필요가 없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들이 새로운 깨달음에 의해 재정립되었다.
화인(火人) 상태에서 받아들인 엄청난 양의 멸마의 불길. 론에게 있어서 이는 마치 엄청난 양의 마나를 얻은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전처럼 체내에 서클을 만들려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6서클 초인형 불 마법 화인(火人)의 상태가 풀어지고,
구후우우웅.
론이 손을 뻗자 주위에 있던 불길과 마나들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콰화아아아앙.
처음의 미약하던 움직임이 순식간에 광풍처럼 돌변했다.
회귀 후 적잖이 봤던 현상.
대마도사 플라델과 사티넬을 통해 봤을 때는 눈앞에서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해의 수준을 넘어 자신이 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로 체외 서클이었다.
**
“후웁, 후우···. 후웁, 후우···.”
긴 심호흡.
딱히 탈진이나 체력 고갈로 인한 피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쉬이 감당할 수 없는 깨달음의 홍수가 밀려왔다. 때문에 이를 하나하나 곱씹기 위해 론은 깊은 명상 속에 호흡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
론 이외에도 조용히 숨을 쉬는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허···.”
에레드 스펜서.
스펜서 가문의 현 가주이자 론의 아버지.
눈앞을 가득 채우던 불길에 저도 모르게 허겁지겁 달려 온 그는 지금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거대한 불길 속에서도 형체를 유지하던 한 인간, 바로 그의 자식 론을.
믿기지 않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청년 시절 소가주로 내정 받은 그였지만, 가문의 일은 내팽개치고 마법에만 몰두했던 그였다. 수많은 고위 마법사들의 자서전과 가문의 비전서들을 미친 듯이 파헤쳤었다.
재능의 영역이라 불리는 5서클에 다다르기 위해.
허나 끝내 그 한계를 뚫지 못한 그는 결국 책을 접었다. 5서클을 넘어 6서클 7서클까지 소망했던 젊은 날의 에레드는 바로 거기서 멈춘 것이었다.
“그런데, 너는 나아갔구나.”
그가 조금 전 그 현상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저 작열의 불구덩이 속에서 오롯이 서 있던 제 아들 론의 모습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열여섯에 화인(火人)이란 말인가···. 장하다.”
묵묵히 론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레드가 얼마 뒤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식사.
허나 테이블 상석에 있는 에레드의 표정은 무거웠다.
그리고 이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드로고.
‘셋째 녀석이 수련 중이더구나. 내가 호들갑을 떨었지, 뭐냐, 껄껄껄. 내려가자.’
불과 몇 시간 전 에레드의 명령에 따라 영지병을 이끌고 뒤늦게 야산에 올라온 첫째 아들 드로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에레드와 같이 하산을 했다.
아까는 분명 별일 아니라며 넘어갔는데, 어째 지금 아버지의 표정은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다. 허나 식솔들이 모두 있는 이 자리에서 물어볼 순 없었기에 드로고는 그저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잠시 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식기들 소리만 오가던 테이블 위로 가로지르는 한 목소리.
론이었다.
“흐응? 오빤, 그렝고리 왕국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놀러가아···? 맨날 놀러만 다녀어···.”
반쯤 감긴 눈의 레비가 론의 목소리에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가뜩이나 이번에 사티넬이 놀러 오지 않아 심심했는데, 론이 혼자만 또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괜히 심술이 난 것이다.
“그렇게 됐네.”
귀가한 뒤로 줄곧 찡얼대던 레비. 그 심정을 모르지 않는 론이었지만 미안한 표정 외에는 해줄 게 없었다.
‘그래도 가야 하니까.’
[응! 꼭 가야지!]
“뭐 다 네 생각이 있겠지. 그리하거라.”
“음? 예?”
잠자코 포크 질을 하던 드로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대체 아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무리 골든스태프 대회 본선 진출자라지만, 여행은 정말 아니었다. 안 그래도 론 녀석으로부터 시작된 포션 사업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터라 일손이 부족한 시점이었다.
스펜서 포션이 무엇이던가.
본가의 일원 에레드, 드로고, 론. 이 셋만이 제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가롭게 여행을 간다고?! 이 밀린 주문량은 어쩌시려고?!’
“아버지?!”
드로고가 에레드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으나, 그는 식사 자리가 끝날 때까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한 해의 일곱 번째 달.
타오름 달이 무르익고 있었다.
들판의 곡식들은 따사로운 햇볕의 양분을 통해 열심히 성장하고, 스펜서 가문의 론 또한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중간에 맏형 드로고가 찾아와 포션 사업의 진행 상황을 얘기하며 아쉬워했지만, 미리 준비해 뒀던 사업 지분율 조정안을 통해 잘 설득했다.
그리고 이제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출발해야 하는 날.
“뭐 아들렌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자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공식 일정도 있고 하니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예, 걱정 감사합니다.”
핼쑥한 얼굴의 드로고. 마음 같아서는 가문의 사업에 동조하고 싶지만,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치! 노는 것밖에 안 하는데 오빤데 왜 그렇게 다들 챙겨주는 거야.”
레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양 볼을 부풀렸다. 그런 동생이 귀여워 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내고 있어.”
“뭐, 뭐 하는 거야아!!”
한때는 가문이라는 테두리를 든든한 우군이라 생각했으나, 실제 흑마법사와 맞부딪쳐 보니 그리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상대는 일신의 모든 걸 바쳐 어둠의 힘을 얻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뭣도 모르는 이들을 불러다가 자신의 편의대로 대동하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선의라는 목적 아래 오만하게 대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갔다 오너라.”
웬일인지 무뚝뚝해진 아버지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으나, 이내 가족들에게 묵례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타오름 달 중순.
앞으로 개학까지는 두 달도 채 안 남은 시점이었지만, 지금의 론은 그 무엇을 마주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6서클을 넘어 자그마치 체외 서클의 힘을 얻었다.
사실 론이 고위 서클의 체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가 고국에서 심연의 환술, 즉 죽음 뚫고 나왔을 때부터 이미 완연한 6서클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고대 불의 정령 홍염을 통해 현상의 경계마저 허물어 버렸다.
바로 7서클의 대마도사들이 이르는 경지.
그리고 이 과정을 멀리서 지켜본 에레드는 그 압도적인 광경을 그저 함구할 뿐이었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건 고작 6서클의 초인형 마법 화인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걸 열여섯의 아이가 해버린 것이었다.
마법사 사회에 알려지면 아주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일.
때문에 에레드는 그저 묵묵히 뒤에서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나마 가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여러 감정이 뒤섞인 공간을 뚫고 론의 마차는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
예로부터 북부는 강추위와 매서운 자연환경으로 인해 중앙집권 국가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철혈의 군주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런 왕국의 정세 말이다.
그리고 이는 대륙 북동부에 있는 알펜샤 왕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다만 타 왕국들과 비교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였는데, 그러다 보니 왕국 내 출입이나 이동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곳이었다.
“확실히 북부가 다르긴 하군.”
아들렌 왕국의 서부 거점 도시 수에즈에서 워프게이트를 타고 곧장 알펜샤 왕국 수도로 넘어 온 론이었는데, 주변의 날씨가 현 위치를 실감케 해주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대륙 중부와는 달리 제법 선선한 날씨의 알펜샤 왕국. 덕분에 중간중간 마차를 타고 가는 길이 제법 편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른 목적지.
알펜샤 왕국의 동부 하이른 산지.
“여기서부터는 제법 쌀쌀하네.”
마차에서 내리고 얼마 뒤 홍염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화륵.
불의 정령의 힘으로 계약자의 체온을 유지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상행 마차 내 승객들의 눈치를 보느라 줄곧 조용히 있느라 심심했었나 보다.
[와아, 저기 봐! 산꼭대기가 하얘!]
조그만 불길이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로 꼭대기만 하얀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게.”
그러면서 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들렌의 도시들에 비하면 건축 양식이나 건물 배치들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타났다.
“여기가 플리트비체 도시라 이거군.”
일전에 아들렌 아카데미 역사학 수업에서 보어헨 교수가 말했었다. 플리트비체에는 고대 괴수 히드라에 대한 봉인 전설이 있다고.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럴 듯했다.
딱 보기에도 큼직큼직한 크기에 건물들 사이사이로 각종 조각품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알펜샤 왕국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보니 확실히 이해됐다. 인간 형태의 조각상은 물론이고, 각종 동물, 심지어 괴이한 형태의 생물 조각품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론이 찾는 것도 있었다.
[론, 저기 봐!]
“안 그래도 보고 있었어.”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뱀 형태의 괴수. 히드라였다.
‘이게···. 내가 이제 만날 놈이란 건가···.’
그저 상상 속에 만들어진 조각품이었지만, 도시의 분위기에 빠져 론은 멍하니 히드라 조각상을 쳐다봤다.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에 론의 고개가 돌아갔다. 홍염은 자연스레 사라졌고.
“레브, 달려어!!!”
월! 월!
사람의 목소리와 그보다 훨씬 큰 개소리. 그런데 그 커다란 개소리가 워낙에 큰 바람에 정말 개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위화감이 심했다.
“개, 개가 맞아?”
타닥 타닥 타닥.
휘이이익.
놀라 어물쩍대는 사이 거대한 개가 론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론은 앞서 들었던 사람 소리의 정체가 개 위에 타고 있던 사람임을 알아챘다. 그 정도로 말이 안 되게 컸다.
북부의 썰매견이 대형견으로 유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방금 그것은 그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허···. 신수(神獸)라도 되는 거야, 뭐야?”
일전에 사티넬이 품고 있던 알에서 부화한 거북이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긴 했다.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
론의 표정이 어느새 굳어갔다. 고국에서의 일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밀려오는 여러 복잡한 생각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론은 저 개를 한 번 더 볼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방금 그 위에 타고 있던 건 꼬마였던 건가···.”
[응! 꼬마애 맞아! 여자아이!]
론이 한동안 그 커다랗던 개가 지나간 곳을 멍하니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