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6
론이 흐뭇하게 눈앞을 바라봤다.
자유자재로 나타났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불꽃. 한동안 지속되던 불꽃 퍼레이드가 끝이 나고, 이내 홍염이 다가온다.
[힘이 넘쳐!]
화려한 불 쇼의 주인공이 내뱉는 첫 대사. 그 순수함에 론의 입에서는 피식 웃음이 샜다.
“축하해, 홍염.”
[응! 이제 그 불쾌한 것들 아주 밀어버리자!]
휙휙.
의기 충만한 홍염이 불길을 일으키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 이 정도면 붙어볼 만하겠네.”
단순히 치기 어린 마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은 6서클에 이르는 깨달음과 더불어 얼마 전 물의 정령왕으로부터 물의 이치까지 전해 받았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고대 불의 정령 홍염은 하급 정령으로 진화하며 자유로운 현신이 가능해졌다.
“나도 슬슬 시도할 때가 됐네.”
[응? 뭐가? 이제 가는 거야, 알펜샤 왕국?!]
고국에서 일행들과 헤어진 후 론은 홍염에게 그간 자신이 겪어 왔던 어둠의 세력에 대해 세세하게 말했었다. 흑석이라든가 아이블 마탑, 그리고 고대 괴수 히드라에 대해서도.
물론 회귀에 대해서는 정령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기에 적당히 에둘러댔는데, 다음 목적지가 바로 알펜샤 왕국이긴 했었다.
그러나,
“아니,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
론에게는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었다. 바로 가문에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취하는 것.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바로.
“특급 포션이지.”
**
야심한 밤.
한 인영이 저택을 나섰다.
손가락 사이에 유리병들을 끼운 채로.
[그 두 개면 정말 서클을 늘릴 수 있는 거야?]
‘확실한 건 뭐 해 봐야지.’
홍염과 론이었다.
본래라면 자정이 되기 전 저녁부터 나와 마법 수련도 하고 했을 테지만, 최근 론은 아버지 에레드로부터 가문 비전서를 전달받았다.
스펜서 가문.
예로부터 쭈욱 마법에 정통한 가문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불 마법이 있었다. 때문에 선조들 중 6서클에 올랐던 이들이 남긴 회고록들이 모여 비전서가 되었는데, 그것을 론이 받은 것이었다.
회귀 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도 비전서를 받긴 했지만, 당시의 것은 그저 3서클 이하의 하위 마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반면 이번에 받은 것은 최소 5서클 이상의 고급 정보가 담긴 가문의 정수.
‘원래는 가문에 상당한 공적 혹은 5서클에 준하는 성취를 얻었을 때나 볼 수 있는 건데, 네 녀석이 가문 내 유례없는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하는 바람에 내 손수 금고에서 꺼내왔다.’
그리고 과연 에레드의 말대로 해당 비전서에는 생각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론도 집중해서 읽었던 것인데, 비전서는 비전서이고 따로 할 게 있었다.
저택 뒤편의 야산을 계속해서 들어간 론은 어느 순간 적당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시작해 보자고.”
후웁, 후우···.
들숨과 날숨에 맞춰 마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몸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든 론이었기에 걱정될 것은 없었다.
딸칵.
첫 번째로 열린 붉은 유리병.
만드리안 트롤의 피로 만들어진 특급 포션이 그대로 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약 반년 전 시험용으로 한 번 먹어본 그였기에 이어서 나타나는 신체 반응은 익숙했다.
“흐읍···!”
붉은 액체를 목에 넘기자마자 론의 신체 감각들이 미친 듯이 활성화됐다. 특급 포션으로 인한 각성인 것이다.
‘좋아, 다음은!’
론이 두 눈을 부릅뜨고, 다음 손가락에 끼워두었던 푸른색 유리병을 열었다. 최상급 마나 포션. 이전에 마셨던 중급 마나 포션과 비교하면 궤를 달리하는 양의 마나가 함축돼 있다.
꿀꺽.
지체없이 이를 마신 론은 곧장 정령사의 찬가를 머릿속에 되뇌며 마나 운용에 집중했다.
‘태초에 어둠을 가르는 빛이 밤과 낮을 구분했고···.’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이전에 복용했던 것에 비하면 최상급 마나 포션인데도 불구하고 론은 마나 컨트롤을 하는 데 있어 훨씬 수월했다.
후웁, 후우···.
때문에 론은 내친김에 주변의 마나까지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기이이잉.
마치 쇠바퀴가 돌아가듯 론의 심장에 걸쳐 있던 네 개의 서클들이 미친 듯이 돌아가며 신체 내외의 마나들을 소화해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음···?’
생각보다 다섯 번째 서클에 대한 감이 오지 않았다. 맹렬히 회전하는 기존 네 개의 서클들이 각각 상당량의 마나를 품었음에도 끊임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허···. 더 필요하다고?’
그 구하기 힘들다는 최상급 마나 포션에 이어 마나호흡법을 통해 주변의 마나까지 끌어들였음에도 다섯 번째 고리에 대한 느낌이 전혀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홍염이 불꽃을 일으키며 현신했다.
[나도 도와줄게!]
홍염의 마음은 고맙지만, 서클은 지극히 인간의 몸과 마나에 관련된 것이었다. 정(精)과 정령이 아무리 자연의 섭리라지만, 이들이 마나 자체를 움직일 순 없다. 그저 섭리 메커니즘에 따라 마나들을 움직여 원소화 시킬 뿐.
‘아냐, 괜차···.’
그런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일어난 자연 현상도 그 근본에는 마나가 있는 것 아니냐는. 그리고 만약 해당 원소를 사람이 온전히 취할 수 있다면,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하는.
론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 에레드로부터 받은 비전서에 적혀 있던 한 마법 때문이었다.
『 신체를 완전히 광자화 하게 되면 순간이동이 가능하듯, 신체를 완전히 불에 동화시키면, 불에 대한 완벽한 내성이 생긴다. 즉 화인(火人)이 되는 것이다. 바람과 물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를 커버할 수 있다면 불 마법사로는 최고의 경지라 말할 수 있다···.』
‘화인···. 완벽한 내성을 갖추게 되면 모든 불을 내 것으로 취할 수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짜피 최상급 마나 포션으로는 다섯 번째 서클을 만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론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양손을 가슴팍으로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정십이면체의 복합마법진.
이어서 론은 그저 기초 원소 마법 파이어를 떠올렸을 뿐이지만, 복합마법진의 각각의 면에는 복잡한 식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회귀 전 5서클의 경지에 오를 때도 느낀 것이었지만, 고등 마법은 더 이상 인간의 지식과 인식 체계로 받아들이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느낀바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드러난 자연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것.
화르르륵.
정십이면체의 복합마법진 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순간이동을 하기 위해 자신을 빛에 온전히 담았다면, 이번에는 그저 불일 뿐이었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몸집을 키운 불덩이가 이내 론을 집어삼켰다.
전아(全我).
그가 입고 있던 고급스런 의복이 단번에 타버리는 와중에도 론은 고고히 정신을 유지했다. 그리고 남은 건 살 색의 몸뚱이가 아니었다.
오직 새빨간 불길.
‘성공··· 인가?’
화르륵.
화륵.
론이 불로 바뀐 신체를 휙휙 휘저었다. 몸을 광자화 시킬 때와 메커니즘이 비슷했기에 그리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단번에 성공하니 기분이 떨떠름했다.
‘뭐 순간이동도 한 번에 성공했으니 당연한 거려나.’
[와아! 론, 뭐야?! 너도 불의 정령이었어?!]
홍염이 놀라 외쳤다.
지금 론의 상태는 말 그대로 불 그 자체. 자신이 계약한 자가 불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홍염은 저도 모르게 흥분해버렸다.
화르륵.
일전에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가 그랬듯이 홍염도 그 크기를 키워 론과 같은 인간 형상을 한 채 다가왔다.
[신기해!]
‘그러게···.’
특별히 의사전달을 한 건 아니었으나, 론도 홍염도 궁금하였다. 그 무의식적인 생각이 둘의 손을 움직였다.
탓.
‘아···.’
론의 손끝에 맞닿은 홍염의 불길.
그것은 론이 알고 있는 평범한 그런 불이 아니었다. 창조 목적. 자연의 섭리로서 온전히 존재하려는 그 진의(眞意)가 담긴 불이었다.
‘이게 바로 멸마의 불꽃.’
단순히 눈을 뜨고 마주하는 그런 평범한 자연이 아니라, 태초의 자연에는 그 정순함이 그대로 묻어있었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자연의 기운에 론이 심취했다.
[음? 좋아?!]
자신의 불길을 음미하듯 빨아들이는 론의 태도가 싫지 않은지 홍염은 내친김에 있는 힘껏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퍼어어어엉!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야산에 커다란 불길이 퍼져나갔다.
**
야심한 밤.
스펜서 가문의 저택은 고요했다.
몇몇 대기 중인 하인들도 그 고요함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고 있을 정도로.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얕은 잠을 깨우는 묵직한 소음이 저택을 강타했다.
퍼어어엉.
덜그덕.
그리고 그 파동에 흔들리는 창문까지.
“음?”
자고 있던 에레드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현역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그래도 완숙한 4서클의 마법사였다. 즉, 방금 들려온 소음이 인위적이었다는 것쯤은 쉬이 알 수 있었다.
스르륵.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첫째 부인 쉬르카의 이불 상태를 한 번 봐주고는 그가 방을 나섰다.
‘이 야심한 밤에 누가···.’
갑자기 침실을 나서는 에레드의 모습에 대기 중이던 하인이 놀랐지만, 그는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는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
잠결이긴 해도 소리의 진원지쯤은 그의 감각으로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에레드와 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
드로고 스펜서.
자신의 맏아들이자 소가주였다.
“흠···.”
별생각 없이 확인할 겸 나온 에레드였으나, 긴장된 분위기가 생각을 무겁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근래 포션 사업이 잘 풀리면서 유례없는 관심을 받게 된 스펜서 남작가다.
때문에 괜히 긴장을 한 에레드가 진중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가 볼 테니 너는 영지병들과 오거라.”
“예? 괜찮겠습니까. 아니면 제···.”
허나 에레드의 눈빛은 확고했다.
“그리 걱정되면 네가 빨리 소집해 오면 되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그렇게 드로고를 돌려보낸 에레드는 마나를 풀어내며 감각을 끌어 올렸다.
‘그나저나 여기 뒤쪽 야산은 론 녀석이 자주 가던 곳인데···.’
괜한 불안함이 더해져 왔지만, 그는 믿었다.
‘성년도 안 된 열여섯에 4서클에 이른 천재.’
‘최연소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자.’
‘스펜서 포션의 제작에 참여한 연금술의 천재.’
최근 수도 없이 들었던 얘기들.
그리고 그 얘기들의 주인공은 당연히 그의 세 번째 자식 론이었다.
평민의 자식이라 하나 부족함 없이 대했고, 녀석도 엇나가지 않고 잘 자랐기에 걱정하는 바는 없었다.
다만, 아직 성년도 안 된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버지로서 아니, 그의 성장을 기대하는 자로서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여러 복잡한 생각들을 안은 채 에레드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도 선연히 마나의 파동이 느껴져 왔다.
타닷.
타다다닷.
경계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저 다급히 발걸음을 분주히 했다.
타다다다닷.
그렇게 수많은 경사와 흙길을 지나쳐 다다른 곳.
화아악.
그 실체가 에레드의 눈에 담겼다.
콰화와아아앙.
거대한 불길이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