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5
마법사들의 서클.
그 처음은 오러를 다루는 전사들과 비슷했다. 그들이 하나의 코어를 키우는 것처럼 마법사들도 하나의 서클을 만드는 게 전부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신들이 이 땅을 떠나고, 그들로부터 비롯된 고대 마법 또한 사라지자 인간의 마법은 서서히 퇴보하기 시작했다.
고대 마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던 조악한 마법만이 남은 이 땅.
오래도록 마법의 퇴보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여겼었는데, 어느 순간 이를 부정하듯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바로 복합마법진.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과 새로운 체계는 조악하기만 하던 마법 수준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단일마법진의 수준을 넘어 더 복잡하고, 더 다양한 마법이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인 성공 가도가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마법진이 늘어나면서 필요로 하는 마나의 양은 늘어났고, 기존의 단일 서클의 한계에 부딪혔었다.
하지만 한 번 고차원의 맛을 본 인간의 욕망은 그러한 한계마저 기어이 뛰어넘었고, 이를 보완하듯 생겨난 것이 바로 현대에도 통용되는 다중 서클론이었다.
“단번에 6서클까지는 무리려나.”
다그닥 다그닥.
달리는 마차 안.
론이 중얼거렸다.
[6서클? 인간의 마법으로는 거의 최고 수준 아니야?!]
홍염이 놀라 물었다.
오랜 세월 이 땅에 존재해 온 그에게 있어 6서클 마법사는 보기 드문 존재들이었다.
“뭐··· 최고는 아니지.”
최고라는 말에 론은 문득 아들렌 아카데미의 학장 럼블이 떠올랐다. 세기의 현자라 불리는 7서클의 대마법사.
80년 세월을 마법에 전념했던 그에게 7서클 마법사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때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6서클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가.’
회귀 후 고작 1년.
1서클부터 정령사의 찬가라는 마나 호흡법으로 단련한 론은 다섯 개의 서클, 즉 5서클이 돼서야 펼칠 수 있는 고차원의 마법들을 고작 3서클로 펼쳤었다. 5서클 마법 파이어 레인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6서클의 꽃이라 말할 수 있는 텔레포트를 겨우 4서클만으로 시전해버렸지.’
정령사의 찬가로 다져진 론의 서클은 기존의 서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났다. 다중서클론과 복합마법진 이론은 수백 년의 세월이 쌓여 정립된 이론이다.
다양한 표본과 변수들을 고려해 정립된 것들이었는데, 정령사의 찬가는 그러한 틀을 아무렇지 않게 부쉈다.
처음에는 그 상식을 부수는 엄청난 효과에 론도 최대한 숨기려 했었다. 관심을 넘어 시기와 질투 등 온갖 욕망을 불러올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나아갈 뿐이다.”
죽음을 뚫고 나온 뒤로는 그동안 눈치 보던 것들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응? 어디로?! 지금 론, 너네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뭔데 왜케 뜨거운 거야?!]
긴 상념 끝에 뱉어진 말을 이해하지 못한 홍염이 되물었다.
“그냥.”
허나 론은 그런 홍염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을 뿐이었다. 자신의 결심과 각오, 그리고 의지가 거듭날 때마다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홍염의 크기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로부터 전달받은 힘에는 물의 이치(理致)만 있는 게 아니다. 각 정령이 지닌 특성에 대해서도 깨닫게 해주었다.
그중 불의 정령은 바로 심판과 소각, 열정과 의지다.
때문에 론의 열정과 의지가 짙어질 때마다 홍염은 마치 이를 먹이 삼듯 커져갔다.
**
그레고리 고국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스펜서 남작가.
여느 때와 변함없을 거란 생각과는 달리 가문의 영지는 이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생기가 넘쳐.]
홍염의 말대로였다.
그리고 뭐랄까.
‘사람이 많아진 것 같네.’
약 넉 달 전.
론이 아카데미 2학기를 수강하러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펜서 영지는 그저 한적한 변방의 땅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북적댔다.
새로 지어진 집들과 군데군데 처음 보는 건물들. 그 변화를 체감하느라 론은 어느새 마차가 저택에 도착한 지도 몰랐다.
똑똑.
“나으리, 도착했습니다요.”
“아···.”
줄곧 창문에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론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돌아왔네. 스펜서 영지.’
[궁금해! 어서 나가자!]
‘그래.’
홍염의 마음에 동조하며 론이 마차 문을 열었다.
“왔느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에레드 스펜서. 그의 아버지였다.
“어떻게 한 번 사라졌다 하면 사고치고 오는구나.”
“예?”
론은 순간 아버지가 마셔스 수림에서의 일을 말하는 건가 싶어 뜨끔했는데, 옆에서 부연 설명이 들려왔다.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 말이다, 이 녀석아. 만드리안 트롤 때도 그렇고 하여튼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튼 축하한다. 론.”
맏형 드로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학기 중에는 라리사의 흑석 목걸이와 땅의 성수, 그리고 트리마이어 은행 일로 정신이 없던 터라 골든스태프 대회 건은 깜빡했었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사티넬은?! 사티넬은 같이 안 왔어?!”
허나 이런 것들에는 관심도 없는 막냇동생 레비.
“그러게요. 이번에는 같이 안 왔나요, 사티넬 양은?”
레비의 곁에 있던 첫째 어머니 쉬르카도 궁금했는지 되물었다.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괜히 얼마 전 일이 떠올라 론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그런데 이를 본 에레드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팡팡!
“녀석! 원래 남녀 청춘사업이란 게 다 그런 거야! 암, 그렇고말고! 크하하하하!”
에레드의 얼굴이 한껏 펴졌다.
따지고 보면 자식 연애가 잘 안 풀린다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다. 허나 최근 들어 제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치고 나가는 론의 모습이 여간 어색했던 그였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나이였으니 말이다.
마냥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있을 때, 실패도 경험해보고 다시 일어서는 법도 배웠으면 했던 에레드. 때문에 론의 씁쓸한 얼굴이 마냥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봐, 렉스터! 오늘 저녁엔 마르코비치 와인 좀 까자고!”
한껏 기분이 고양된 에레드는 식사 준비하랴 마중 나오지도 않은 주방 쉐프의 이름을 불러대며 소리쳤다.
근 4개월 만에 갖는 스펜서 저택에서의 식사.
포션 사업 건으로 자주 왕래하던 머라이센도 합석했는데, 식사 자리는 아주 왁자지껄했다.
론의 활약으로 개발한 스펜서 포션은 이미 대륙 전역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대중들의 평가도 호평으로 가득했다. 거기에다가 올해 대륙에서 가장 큰 행사인 골든스태프 대회에 론이 본선 진출까지 하는 바람에 가문에는 이보다 더 큰 경사는 없었다.
스펜서 가문 역사상 유례없는 번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론의 입장에서는 호시탐탐 이 땅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어둠의 세력 밖에 눈에 안 들어왔지만, 가문의 가족들은 론이 그간 보인 행보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아들렌 아카데미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1학년의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이라니요. 본선 성적을 떠나 이것은 엄청난 명예입니다.’
머라이센은 업무 보고 서신에서만이 아니라 사석에서도 존댓말을 하며 론의 행적을 축하했다.
‘드락사에게 편지를 전하니 녀석도 정말 놀랐다는구나. 재능 없다며 어리광부리던 셋째가 알고 보니 제일 욕심이 그득그득하다나 뭐라나. 하하하!’
드로고를 통해 둘째 형의 안부도 들을 수 있었다.
평화롭고 화기애애했다.
물론 중간에 레비가 사티넬을 찾으며 한껏 입술을 내밀긴 했지만 말이다.
간만에 찾아온 일상이었다.
다사다난했던 아카데미 2학기.
그리고 충격으로 물들었던 고국 여정.
잠시 휴식을 취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었는데, 론은 멈추지 않았다.
사락.
사락.
사락.
론의 오른손 위에 놓인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러니까 6서클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지 재능의 영역은 아니란 거지.”
론이 지금 보고 있는 책은 6서클 고등 마법 서적이었다. 고국에서 이미 텔레포트까지 시전할 정도로 6서클의 깨달음을 얻은 그였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간 살펴본 바에 따르면 텔레포트를 비롯한 자기 주체형 마법은 상당히 괴이했다.
자기 주체형 마법.
이는 기존에 마나를 매개로 하여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 시전자 자신을 매개로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몸을 광자화 시켜 순간이동, 즉 텔레포트 마법도 가능한 것이었는데, 거기 쓰인 숙련 방법에 대해서는 론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 아닌 자신을 명확히 하는 것.’
불과 몇 달 전의 그였다면 분명 이해하지 못했을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존 5서클 마법까지가 지식과 마나의 영역이라면, 6서클부터는 절대적으로 주체성이 강조되는 마법이다. 일례로 텔레포트는 시전자 자신의 몸을 광자화 시켜 순간이동 하는 것이다. 즉, 자연현상 속에 던져진 자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뭐 대답은···.”
우우웅우웅.
화아앗!
불과 몇 초 사이였다.
론의 방이 번쩍하더니 이내 그가 사라졌다.
슈아아악.
그리고 그 사라진 론은 저택 저 멀리 떨어진 숲에서 형체가 나타났다.
“역시 6서클은 전아(全我)라 이건가.”
코르테즈의 심연의 환술 속에서 맞이했던 죽음. 그 속에서도 론은 자기 자신으로서의 의지를 잃지 않았다. 생을 관철한 신념은 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곧 마법으로도 드러난 것이다.
고작 며칠 만에 론은 즉시 시전에 가까운 텔레포트를 선보인 것이었다.
스스로가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수많은 엘리트 마법사 중에서도 극소수의 인원들만 내디뎠던 6서클 마도사의 길.
이제는 그 길을 론이 걷고 있었다.
“뭐 80년 세월을 돌아오긴 했지만.”
론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좋아, 이번 생에는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고!”
자그마치 6서클에 이른 성과.
론의 마음이 고취되었다.
그 간질거리는 마음을 육성으로 내뱉고 있었는데, 어째 론만 그런 게 아니었다.
[으으···. 좀 이상해···.]
갑자기 모호한 말을 뱉는 홍염.
당연히 론이 고개가 그에게로 돌아갔다.
화르륵.
평소라면 론이 피운 불을 매개로 현신(現身)하던 홍염이 아무런 매개도 없이 스스로 불타올랐다.
“어? 뭐야···.”
[으아아아아!]
그리고 들려오는 홍염의 갑작스런 괴성에 론이 흠칫 놀랐다.
“무, 무슨 일이야?!”
[히, 힘이 넘쳐!]
“응?”
퍼어어엉!
“으윽!!”
홍염의 대답을 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
론의 눈앞에서 불꽃이 터져나갔다.
퍼어엉!
퍼어어어엉!
퍼엉!
십여 미터에 달하는 불기둥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저택 주변의 숲이 타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그저 홍염. 홍염의 상태에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많은 폭발이 터지고 나서야 홍염의 의식이 들려왔다.
[신기해···.]
“괜찮아, 홍염?”
[응, 괜찮아. 나 그런데··· 진화한 거 같아!]
화륵.
펑!
화르륵.
퍼엉.
자유롭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홍염.
“어? 하···!”
론은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 저택 인근 숲에서 수십 번의 폭발이 있었지만, 홍염이 그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우지끈.
퍽.
“억!”
시커멓게 타버린 나뭇가지가 그의 머리로 떨어졌다. 물론 그가 서 있던 자리 위의 나뭇가지들은 모조리 타버렸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