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4
물의 궁전.
그리고 물의 정령왕.
하나같이 신화 혹은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것들이었기에 이를 경험하고 온 론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도 모호한 것투성이였지만, 당분간은 다시 가는 게 불가능했다. 홍염이 싫어하는 것도 싫어하는 거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물웅덩이에서 이전과 같은 파장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치 입장을 금지한다는 것처럼.
때문에 잠까지 반납하고 이곳에 찾아온 라리사는 제대로 허탕을 쳤다. 안 그래도 플라델의 미로처럼 파장 동조를 이뤄보려 했지만, 그럴만한 건덕지도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풀어줄 론은 대답도 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타닷.
“어어? 야, 건방진 1학년! 거기는 길이···.”
라리사가 말릴 새도 없이 론이 갑자기 길을 틀었다. 코르테즈가 미친 노인네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남긴 표식은 거짓이 아니었다. 방향이 바뀔 때만 노란 리본으로 표시했었기에 다음 표식까지는 직선으로 가는 게 맞았다.
‘근데 쟤는 왜 갑자기 방향을 트는 거야?!’
“이쪽이 더 빠릅니다!”
그런 그녀의 의문에 답하듯 론이 소리쳤다.
“하···!”
라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까지 봐 온 그의 모습으로 보건대 론은 더 이상 그녀가 판단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법적 수준뿐만 아니라 어떤 무언가를 초월한 듯한 느낌.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리사는 그저 조용히 따라갔다.
찬란한 햇빛이 새벽을 밀어내는 아침.
마셔스 수림의 초입, 산샤 마을에는 아침 햇살과 더불어 론과 라리사가 도착했다.
“후우···. 늦지 않았군요.”
‘고마워, 홍염.’
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홍염에게 감사를 전했다.
[으으···. 피곤해. 잠시 조용히 있을게.]
‘응.’
어제 정령 계약을 하고 단 한 번도 쉼이 없었던 홍염이다. 그나마 안식처라 인식한 마을에 도착해서인지 홍염은 조용히 존재감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홍염을 잠시 일별하고, 론은 라리사를 쳐다봤다.
“막사로 가죠.”
“그래···.”
론 일행이 머무른 막사 안.
다행히 남아있던 두 사람은 깨어 있었다. 다만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는데 눈 밑의 다크서클이 아주 짙다.
“다들 좀 괜찮습니까?”
“...”
역시나 대답이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어제 있었던 일이 없었던 걸로 되는 게 아니었기에 론은 이내 무거운 입을 뗐다.
“후우···. 실은 약 1년 전쯤이었습니다.”
론은 자신의 회귀 시점을 기준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차마 회귀를 말할 순 없었기에 이전 생에서 겪었던 일부를 1년 전에 있었던 일처럼 포장했다.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검은색 돌멩이와 그런 돌멩이를 지니고 있던 아이블 마탑의 마법사, 그리고 그런 그들의 일지, 하달받은 명령, 대략적인 조직도 등등.
성년도 안된 소년이 경험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듣고 있던 세 사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론과 함께하며 겪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에타 유적에서 마주한 아이블 마탑의 마법사와 흑석, 골든스태프 대회 선발전에서 라리사가 차고 왔던 흑석 목걸이, 그리고 바로 어제 의문의 동굴에서 코르테즈에게 당했던 말도 안 되는 환술.
“그렇군요···.”
사티넬이 힘없이 반응했다.
생애 처음 겪어 보는 환술과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동료들 간에 벌어졌던 칼부림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자 공포로 자리 잡았다.
그런 그녀를 안타깝게 보며 론이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운 좋게 불의 정령과 계약을 했습니다.”
“역시···.”
라리사가 조용히 탄성을 흘렸다.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했던 당시 그들의 환술을 깨부순 건 론의 불꽃이었다. 육체적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그래도 두 눈으로 봤었다. 마법진 메커니즘과는 상이했던 불꽃을 말이다.
그런데 이제야 납득이 갔다.
“아버지께서 아카데미에 입학할 당시 선물로 주신 목걸이가 정령석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겸손하게 말하는 론.
하지만 라리사는 그리 생각지 않았다. 마법 혈통의 일족으로서 정령사를 배척하기는 하지만, 그 정령사의 자질은 아무나 얻는 게 아니다.
마나가 아닌 다른 것으로 자연의 근간에 도달하려는 자들. 시간이 지날수록 속세와 인연을 끊어서 그렇지 절대 무시할 이들은 아니었다.
‘열여섯에 4서클이나 다름없는 실력, 그런데 거기에 불의 정령까지···.’
동년배뿐만 아니라 20대 전체를 놓고 봐도 론의 성취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역시 골든스태프 대회는···.’
그런데 순간 이어진 론의 말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여정은 여기까지로 하죠.”
론의 표정이 무거웠다.
“제 독단이었고, 무책임했습니다. 이번 여정으로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코르테즈의 환술에 당하고 난 뒤로 쭉 생각해 왔던 부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해질 게 뻔했다. 그런데 오로지 선의만을 가지고 준비도 안 된 이들을 강요할 순 없었다.
충분히 이성적으로 생각을 했다.
그 결과 이 여정, 이 모임은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았다.
론이 허리 숙여 사과했다.
“...”
잠시간의 정적.
부정적인 반응도 긍정적인 반응도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고개를 든 론의 얼굴을 보며 사티넬이 물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런 얘기까지 다 하신 거예요? 끝까지 몰랐다고 해도 모를 일이었잖아요.”
론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폐를 끼쳤는데, 말할 건 말해야지요. 그리고 저 세력들도 언젠간 수면 위로 나타날 게 분명합니다.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나 오랜 시간 권위를 지켜온 아이블 마탑을 집어삼킨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아들렌 아카데미의 선발전까지 개입하려 했었죠.”
론은 맞지 않냐는 듯 라리사를 쳐다봤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는 이곳 동방의 끝 그레고리 고국에서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막아야 한다는 건 분명하죠.”
“후우, 그럼 그냥 같···.”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크루딘의 말을 자르며 론이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들이 매번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운이 안 좋으면 정말 죽는 겁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수고했다고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까지가 맞습니다.”
아직 인생의 꽃을 피우지도 못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열정만 가지고 강요할 순 없었다.
‘여기서 끝내는 게 맞아. 그리고 아카데미도···.’
더 이상 어쭙잖은 태도는 맞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뚫고 나아가야 했다.
판단이 서자 생각이 명료해졌고, 불필요한 가지들이 정확하게 보였다.
똑똑.
“론님, 도시로 가는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곧 출발합니다.”
때마침 간이 막사 밖에서 카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래, 고국에서의 일도 여기서 끝이다.’
***
그레고리 고국의 최서단 마셔스 수림.
땅의 성수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한 여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막을 내렸다.
그 목적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목적을 이뤘지만 주어진 일은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론의 인생에 있어 분기점이 되었고 말이다.
‘아들렌에 도착하는 대로 트리마이어 계좌를 개설하세요. 크리소더 경매에 올렸던 포션 판매 대금은 거기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모로 피해를 끼쳐서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카데미에서 뵙겠습니다.’
론은 시원 씁쓸한 감정으로 숙소를 떠나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회귀 전 80년 평생을 남들의 굴레에 맞춰 살아온 그였다.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웠다. ‘나’라는 존재는 외면하다시피 하며 보냈던 일평생.
그랬기에 이번 삶에서는 알고 싶었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세상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앞서가는 이들에 대해.
돌이켜 보면 이제 막 1년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론은 아카데미의 내로라하는 천재들을 보며 깨달았다.
천재는 남다른 종자가 아님을.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 또한 그저 신념을 갖고 나아갈 뿐인 그저 ‘사람’임을. 성공과 실패, 즉 결과를 떠나 그저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나’로서 이미 온전하다.’
‘다른 이들의 기준 혹은 세상의 기준에 맞춰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전한 나 자신은 그저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것이 만약 온전한 나 자신이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심연의 환술로 인해 죽음을 경험한 론은 더없이 명료해졌다.
“감사합니다.”
회귀와 더불어 자신에게 더욱 온전히 살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 모든 것에 감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온전하고 뚜렷한 자아는 세상에 우뚝 서서 주위를 바라본다.
오롯이 선 중심은 무엇을 들어도 무엇을 봐도 무엇을 받아들여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
수많은 정(精)들이 이끄는 자연의 섭리가 선연히 느껴지고 그 속에 펼쳐진 자연의 생동감이 생생하다. 론은 두려움 없이 그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구후우우웅.
그의 몸으로 거대한 마나가 빨려 들어왔다.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 아닌 몸 전체가 자연을 마주했다.
우우웅우웅.
론의 심장에서 맹렬히 회전하던 세 개의 서클이 넘치는 마나를 결국 토해내고 또 하나의 서클을 만들었다.
“후우, 후우···.”
새롭게 자리 잡은 네 번째 서클.
이를 음미하던 론이 이내 곧 눈을 떴다. 체내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양은 회귀 전의 수준을 이미 아득히 상회해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우웅 우웅 우우웅.
론의 양손 사이로 푸른 선들이 그어지고 있었다. 다섯 개의 선들이 모여 정오각형을 이루고, 그 정오각형들이 이루는 입체도형.
정십이면체의 복합마법진이 고고히 드러났다.
[와아, 완벽해···. 수많은 정(精)들이 모여야 일으킬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이 모여 있어! 론, 이런 것도 할 수 있었어?!]
잠자코 보던 홍염이 놀라 외친다.
“그러게, 할 수 있게 됐네.”
아직 그 면면에 마법진을 새기지는 않았지만, 이 정십이면체의 복합마법진은 세간에서 흔히 6서클 혹은 마도사라 불리는 경지였다.
그리고 그제야 론은 알 수 있었다.
‘몰아(沒我)가 아니다.’
자연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많은 마법사들이 나 자신을 완전히 지워내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해서 다다른 경지 5서클 엘리멘탈 리스트들은 하나의 뇌를 지닌 인간임에도 여러 다중 마법들을 펼치게 된다.
그런데 그 수준을 넘어 광활한 자연 속에서도 나 자신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전아(全我).’
우우웅우웅.
론은 그가 아는 마법식들의 개념을 떠올렸다. 6서클의 거창만 마법식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나’ 자신이라는 온전한 기준이 선 지금.
이 상태에서는 어떤 마법을 시전해도 흔들릴 것 같지가 않았다.
화아아앗.
먼저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낮임에도 주위를 밝히는 환한 빛이 숙소의 창문 밖으로까지 뻗어져 나간다.
그 속에서 론이 마지막으로 쳐다본 곳. 저 멀리 높게 솟은 첨탑의 꼭대기였다.
슈아아아악.
순간 론이 있던 자리가 일그러지더니 잠시 후 그곳에는 빛도, 론도,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