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3
화르르륵.
전에 없던 강렬한 기운을 피워내고 있는 홍염.
2미터는 족히 넘을듯한 커다란 불길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론은 그제야 깨달았다. 홍염이 불길을 일으키자 아까와 같은 거대한 존재감, 아니 거대한 정령이 짓누르는 중압감은 사라졌음을.
‘고마워, 홍염. 덕분에 숨 좀 틔었다.’
[아주 미쳤어! 조심해!]
홍염이 커다란 멸마(滅魔)의 불길을 유지한 채 론에게 말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이윽고 상대 쪽에서 들려오는 진의.
론과 홍염의 호소가 어느 정도 전달이 된 걸까. 거대 정령으로부터의 압박은 완전히 사라졌다.
슈아아아악.
그러더니 눈앞에 물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어···.”
이윽고 드러난 형체.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론을 본뜬 형상의 물이었다.
[재밌는 아이들이구나. 불의 아이가 어떻게 왔나 했더니 그런 거였군.]
“...”
[...]
[으음? 둘에게 가장 친숙할 것 모습으로 현신(現身)한 건데, 별로인가?]
전해져 오는 진의로 보건대 분명 거대 정령의 그것이 분명했다.
“거대··· 정령이십니까?”
적당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던 론은 그냥 느낀 그대로 내뱉었다.
[거대 정령···. 틀린 말은 아니지. 허나 태초의 자연께서 내게 부여한 이름은 오비니트. 최초의 물의 정령이자, 정령왕이다.]
“아···.”
정령사에 대한 구전 혹은 전설 속에서 한 번씩은 등장하는 그 이름. 정령왕.
정령들의 위계 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 존재지만, 이를 현신시켰다고 전해지는 정령사는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계약한 정령을 통해 묘사되는 게 전부인 그들이다.
그런데 정령왕이라니.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그 거대한 정령의 기운에 대해 납득이 갔다.
[그래서 뭐 어쩌란 건데! 난 고대 불의 정령이다! 왜!]
“...”
간신히 대화 좀 해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뭔가 다시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슈우우우욱.
“호, 홍염!”
[?!]
현신한 정령왕이 손을 뻗자 물줄기가 튀어나왔고, 론은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홍염을 불렀다.
[놀라지 말거라. 네 얘기는 잘 들었다.]
놀란 둘의 심정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가 홍염을 쓰다듬었다.
[읏, 으윽···.]
홍염이 묘한 소리를 내거나 말거나 오비니트는 계속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태초의 자연께서 이 땅을 떠나실 때 불의 섭리에는 따로 정령왕을 두지 않으셨다.]
“?!”
생각지 못한 오랜 역사 이야기.
마법사이자 고고학자이기도 한 론은 정령왕 오비니트의 설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정령왕으로부터 태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회귀 전후를 따져봐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었단 사람은 역사서 전설서를 통틀어 단 한명도 없었다.
[당시에는 불을 다루는 인간도 그리 많지 않았거니와, 자연에서 불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희박했지. 즉 치밀하게 맞물려 굴러가는 자연의 섭리에서 불의 존재는 미약했다. 그런고로 태초의 자연께서는 모든 불을 이끌 정령왕도 내정치 않으시고 천계로 오르신 것이다.]
물의 정령왕으로부터 듣는 새로운 지식. 지금껏 이 땅의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을 정보였기에 론은 일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정령왕 같은 거 없어도 나는 잘만 존재해 왔다고!!]
화르르륵.
자신을 쓰다듬던 물줄기를 튕겨내며 홍염이 몸집을 키웠다. 허나 정령왕 오비니트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정령왕의 존재 이유는 같은 계(界)의 정과 정령들을 이끌기 위함이지. 그렇다면 답해 보아라. 왜 태초의 자연께서는 그저 정(精)만으로도 완벽한 체계에서 멈추지 않고, 어째서 영까지 부어가며 정령왕을 세우셨을까?]
오비니트의 질문.
과연 의문이 들만한 부분이었다.
턱을 괸 채 생각하던 론은 홍염은 어찌 생각할지 궁금해 고개를 들었는데,
휙! 휙!
화르륵!
휙!
[으으!! 도망가지 마!]
휙휙!
자신을 쓰다듬던 물줄기가 짜증 났는지 홍염은 불길을 일으켜가며 열로 증발시키려 했다. 허나 오비니트는 물의 정령왕. 이제 막 피어난 홍염의 불길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정말로 즐기기라도 하는 건지 오비니트는 계속해서 물줄기로 홍염에 장난을 쳤다.
‘결국 답해야 하는 건 난가?’
론은 조용히 지금까지의 대화를 쭉 복기하며 생각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왜 죽이지 않았는가.’
‘무엇이 정령왕 오비니트를 대화하게끔 이끌었는가.’
‘그리고 그 후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천천히 따져보니 답은 간단했다.
“마계군요.”
[우둔하지는 않구나. 그렇다. 신께서는 이곳에 태초의 자연을 빚으시고, 그 위에 수많은 생명체를 만들어내셨다.
왕 혹은 귀족들이 제 영지를 일구고 발전시키며 만족을 하는 것, 계급을 떠나 인간들이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기뻐하는 것, 짐승들이 제 터전을 만들고 본능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것. 이 모든 창조 유희가 어디로부터 왔겠느냐.
바로 신이다. 그런 세상이었고, 그렇게 쭉 이어져야 했을 세상이었건만, 이에 반하는 집단이 있었지.]
“그게 마계였군요.”
[그렇다. 그 혼돈의 집합체들 때문에 신께서는 이 지상계를 특정 위계 이상의 존재들은 진입할 수 없도록 결계를 걸으셨다. 지상계가 지상계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는 신을 보좌하던 태초의 자연께도 제한되는 것이었기에 자신의 권속을 이 땅에 남기셨지. 위계 결계를 넘어서지 않는 선에서 모든 걸 조율할 존재로서.]
“아···.”
생각지 못한 긴 역사. 아니, 창조사가 풀어졌다.
“제가··· 들어도 되는 겁니까?”
인간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신들의 역사이자 신들의 비사. 그러했기에 더 궁금했다. 왜 이런 것까지 친히 말해주는 것인지.
[너와 불의 정령의 대답이 합당했다.]
‘합당?’
도대체 무엇이 합당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나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는 이 자상계의 물의 조율자. 자정작용(自淨作用)의 법칙을 벗어나기 전에는 땅에 현신할 수 없는 몸이다. 그러니 네게 내 진의(眞意)를 전하노라.]
오비니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론의 머릿속으로 거대한 개념이 들어왔다.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커헉··· 이, 이게···.”
단조롭던 뇌 속에 거대한 정보의 홍수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의 공통점은 바로 물이라는 점.
주변뿐만이 아니라, 이곳 물의 궁전에 있는 모든 물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운무들이 하나의 개체로 느껴졌고, 그들의 기분이 느껴졌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경험할 수 없는 감각이었고, 그래서 더 황홀했다.
“아, 물의 이치(理致)···.”
론은 이곳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잊은 채 그 느낌에 푹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론! 괜찮아?! 론!! 정신 차려!]
깊은 단잠을 깨우는 듯한 울림소리에 론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홍염.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
요동치는 불길에 론이 손을 뻗자 이내 홍염의 감정이 가라앉았다.
불의 정령에게 심판과 소각, 열정, 의지의 기운이 있다면, 물의 정령에는 치유와 소생, 자정(自淨)과 진정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론은 오비니트에게 받은 진의를 이용해 홍염을 진정시켰다.
[나는 무슨 일 일어나는 줄 알고···.]
“정말 괜찮아.”
[응···.]
“어째서 이런 능력을 제게 주신 겁니까.”
그가 느낀 바로는 이것은 물의 정령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이었다. 단순한 선의를 넘어선 정령왕의 행사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네가 지금껏 말하지 않았느냐. 마계의 힘을 이용해 고대 히드라를 부활시키려는 삿된 것들이 있다고. 마계 아뷔메르에서 그 야욕을 드러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허나 앞서 말했듯 지금은 내게 허락된 때가 아니니 네게 맡기는 것이다.]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정령은 본디 정(精)으로부터 시작된 존재. 정(精)은 법칙이자 개념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진의(眞意)다. 즉, 너와 저 아이의 의지는 확인했다. 믿고 나아가거라.]
촤아아악
[으아아아악!!! 론 도망쳐!!]
오비니트가 커다란 파도처럼 물줄기를 키우자 홍염이 기겁을 하고 론의 등 뒤로 후다닥 숨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보통 불의 정령이 아니다. 태초의 기운을 머금은 정(精)이지. 잘 데리고 다니거라.]
“예?”
분명 마주 보고 대화를 했지만, 두 존재 간의 지식과 정보의 격차가 너무도 컸다. 때문에 대화 내용의 반 이상이 의문투성이였는데, 갑자기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구후우우웅.
좀 전에 오비니트에게 이끌려 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세상이 밀려나는 것 같았다.
“으으윽···.”
갑작스런 위상 변화.
론이 눈마저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물의 정령왕까지 만났는데, 여기서 정신을 잃는다면 그보다 더 바보 같은 일은 없을 터였으니까 말이다.
슈아아아악.
“허억, 허억···. 허어···.”
정신을 아득게 하는 순간이 지나고,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아직 물어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론은 다시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왜 갑자기···!”
허나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물의 정령왕 오비니트가 아니었다.
“론?”
라리사였다.
**
물소리가 가득하고 운무가 깔려 있던 공간은 사라지고, 론이 서 있는 곳은 어느새 어둡고 습한 동굴이었다. 물의 궁전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곳 말이다.
“왜···.”
물어볼 것도 확인할 것도 많았는데, 갑자기 퇴출당하니 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론?”
그런데 그런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라리사.
“아, 일찍 일어나셨군요···.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자신은 홍염을 통해 왔다지만, 그녀는 불의 정령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온 것일까.
“혹시 길잡이와 같이 온 겁니까?”
“아니, 어제 그 망할 노인네가 가는 길마다 노란 줄을 묶어 놨었잖아. 그거 보고 왔지. 그런데 그건 그렇고 방금 그건 뭐야?”
라리사의 입장에서 보면 론은 마치 워프게이트 혹은 플라델의 미로처럼 공간이동을 통해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이 물웅덩이에서 새끼 거북이가 사라졌는데 말이다.
“너 혹시···. 거기 안에 갔다 온 거야?”
어디를 묻는지는 뻔했기에 론은 굳이 거짓말하지 않았다.
“예.”
[아주 괴팍한 늙은 정령이었어!]
‘그냥 늙은 정령이 아니라 정령왕이었지···.’
홍염의 분노 아닌 분노에 론은 다시금 안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의 궁전에 발을 딛자마자 정령왕 앞에 끌려간 둘은 심문 같은 대화를 하고, 무언가를 전달받았다.
‘그래, 물의 이치(理致)···.’
인간으로서는 쉬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론은 눈앞에 라리사가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복습하듯 그 느낌을 떠올렸다.
‘물의 감각, 물의 기운, 물의···.’
슈우우우욱.
“뭐, 뭐 하는 거야 너?!”
인식의 수준을 넘어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의(眞意). 론은 손발을 움직이듯 아무렇지 않게 생각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정말 물이 모이고 있었다.
“허···!”
[뭐야? 론, 너한테 지금 그 미친 정령의 기운이 느껴져!]
촤아악.
마치 돌멩이를 쥔다고 생각하고 허공에 손을 뻗자 사방에서 물이 이끌려왔다.
“허?! 너 혹시 파도의 일족 헬레보스 사람이었어?!”
“······”
그제야 론은 라리사의 얼굴이 보였다. 물의 궁전에서 얻은 기연을 잊지 않기 위해 떠올린 것인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걸 받은 것 같았다.
“어···. 그러니까··· 그런 것 같네요···.”
당황스러운 건 라리사와 홍염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론이 가장 놀랐다.
‘그럼 정말 나와 홍염의 얘기를 믿고 힘을 빌려준 거야?’
[진짜 미친 정령이라니까! 이렇게 줄 거였으면 처음부터 곱게 줄 것이지!]
‘음? 홍염, 너 그럼 도와줄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도와주는 건 모르겠고, 적어도 위해를 끼치는 건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는 거야. 그리고 정(精)과 정령(精靈)은 진의(眞意)의 존재체들로서 인간처럼 거짓말이 가능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보면 알아! 근데 그 늙은 정령이 괜히 위세를 떤 거지! 다 알면서! 다신 가기 싫어 거기.]
화르르륵!
홍염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문제의 그 물웅덩이에서 떨어졌다.
털석.
이제껏 이 모든 걸 바라본 라리사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어제 이 동굴에 있으면서 론이 행한 것들을 똑똑히 기억하는 그녀였다.
불의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컨트롤과 화력, 그리고 지금도 마치 제 의지라도 있는 양 움직이는 불꽃, 거기에다가 파도의 일족 헬레보스의 사람처럼 물을 다루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하나같이 말이 안 되었다.
그런데 잠시간 멍하니 있던 론이 이내 담담히 말했다.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제 곧 해가 뜨니 다들 일어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