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1
난장판이 된 동굴.
유혈이 낭자한 건 땅바닥뿐만이 아니었다.
크루딘과 사티넬, 라리사. 그들의 온몸도 피로 점칠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론도 서두른 것이었는데, 갑자기 불의 정령이 생각을 전해왔다.
[마계의 기운이야! 미약하지만 분명 마계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 오고 있어! 어서 내보내 줘!]
정(精)과 정령(精靈).
이들은 같은 자연의 섭리지만, 정령은 보다 주도적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입의 정도에 따라 정령의 위계가 나뉜다.
영혼의 성장, 즉 정령력에 따라 현신(現身)의 정도가 결정되는데, 론이 계약한 고대 불의 정령, 홍염은 이제 막 영(靈)이 깃든 정령이었기에 자의적 현신은 불가했다.
때문에 홍염은 자기 생각을 전하며 론을 다그쳤다. 하지만 놈들은 생각보다 빨리 들이닥쳤다.
타닷.
타다다닷.
코르테즈의 뒤로 나타난 복면인들.
“?!”
우우웅우웅.
론은 급한 대로 가장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불 마법을 시전했다.
화르르륵.
2서클의 기초 원소마법 파이어.
유도(誘導)형 마법에다가 단일마법진 마법으로 공급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은 정해져 있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고명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한계가 뚜렷한 하위 마법이다.
그런데 지금 론의 손에서 피어난 파이어는 그런 단순한 하위 마법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악.
동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불길로 팽창했다.
“크아아악!!!”
“으악!! 뜨, 뜨거어어어!!”
‘허···! 저게 정령의 힘이란 건가.’
그 광경을 넋 놓고 보고 론.
그런데 갑자기 불길이 멈췄다.
[마계의 기운만 없앴어!]
‘음? 아아!’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론은 깨달았다. 조금 전 코르테즈를 상대하며 했던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저들의 계획을 알아야 하니 마계의 기운만 없애라 했던 얘기 말이다.
어느새 론에게 돌아온 홍염은 마치 칭찬이라도 바라듯 그의 손을 타고 빙빙 돌았다.
‘고생했어, 고마워.’
[응!]
‘...’
홍염의 아이 같은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론은 서둘렀다. 어찌 됐든 일행들이 쓰러졌기에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화르륵.
화르르륵.
몇 번의 불길이 오갔다.
이미 모든 걸 빼앗기고, 의지를 상실한 코르테즈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브래들리 후작이라···. 후우!”
놈들이 상당히 조직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조직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다.
대륙을 사등분하여 침략을 노리는 성좌와 그 아래에서 보좌하는 사도들. 이 사도들은 맡은 바 사명 혹은 지역에서 철저히 정체를 숨긴 채 움직이다 보니, 들을 수 있는 건 코르테즈에 대한 게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르테즈가 그 동부의 성좌와 안면이 있었다.
“수, 수림을 점령하면 제게! 사도 직급을 준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살려두면 여러모로 쓸 데가 있을 겁니다! 헤헤···헤에···.”
도대체 무슨 염치인지 코르테즈는 수많은 이들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구명해주길 원했다.
[소각해! 어서!]
홍염이 다그쳤다. 십수년간 마계의 기운에 찌들어 있었던 만큼 이를 지웠다 하더라도 코르테즈의 머리에는 음흉한 생각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불쾌한 파장을 홍염은 여과 없이 느끼고 있었고 말이다.
“너는 그런 눈빛을 보내는 자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론은 간절히 쳐다보는 코르테즈를 보며 말했다.
“옛, 예···?”
대답을 들을 것도 없었다.
우우웅.
화아아악.
론의 손에서 뿜어진 불을 매개로 홍염이 현신했고, 그 후로는 론이 손 쓸 것도 없었다. 새빨간 불길이 그저 코르테즈를 집어삼켰을 뿐이다.
타다닷.
그렇게 재까지 순식간에 타버리자 그제야 론은 고개를 돌렸다.
사티넬은 충격이 컸는지 어느새 실신했고, 크루딘과 라리사의 표정은 말이 아니었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을 것이다. 코르테즈의 정체와 그 뒤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
“일단, 돌아가죠.”
“응···.”
“그래.”
그러고는 론이 한쪽을 쳐다봤다.
머뭇거리고 있는 네 사람.
조금 전 심문을 통해 이들의 정체를 알게 됐다. 바로 산샤 마을 길잡이들. 원래라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죽을 운명이었지만, 코르테즈의 눈에 띄어 꼭두각시가 되었단다.
다행히 홍염 덕분에 환술에 벗어날 수 있게 됐지만, 오래도록 환술에 메여있었기 때문인지 다들 낯빛이 어두웠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 하나하나 다 따질 시간이 없었기에 론이 서둘러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 동료들 좀 부축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
분명 들어갈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나올 때가 되니 론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상당히 깊숙한 곳에 들어왔었음을.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
론 일행은 겨우 수림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카렌을 필두로 영지병들이 달려왔다.
“코르빌, 그 자가 끄나풀 이었습니다.”
론은 본론부터 말했다.
몰살당한 줄 알았던 길잡이까지 구해온 마당에 카렌이 굳이 죽은 코르빌의 편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카렌은 론에 대한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신뢰를 바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코르테즈를 만나게 된 경위부터 수림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둥, 미리부터 준비하고 수림에서 일행들을 인솔했다는 둥, 도착한 곳에는 길잡이들이 잡혀 있었다는 둥 등등.
“일단 오늘은 쉬십시오. 이미 해가 져서 이동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리 말하며 카렌이 건넨 것은 포션이었다.
하급 포션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근무지에서 외지인에게 준다는 건 상당한 신뢰를 얻었다는 반증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줄만 알았던 마을 주민을 구해오셨으니 더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부상 당한 론 일행을 부축하며 같이 온 네 명의 길잡이들. 이들은 후에 마을 재건의 핵심 인물들이 될 터였다.
“그럼 쉬십시오. 막상 누우면 피로가 몰려올 겁니다. 각성된 상태에선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게 사람 몸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지병 대장 카렌은 길잡이들이 머물 막사를 손봐주고는 물러났다.
그렇게 론 일행만 남은 막사 안.
일행들에게 뭐부터 말해줘야 할지 고민하는 론이었는데,
새근새근.
이윽고 들려 온 소리가 그런 론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중심체온이 떨어지고 있어. 다들 자나 봐!]
홍염도 그만의 식별 방식으로 론에게 말했다.
‘그러게···.’
긴 하루였다.
코르테즈의 흉계(凶計)를 새벽녘에 몰래 듣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마셔스 수림 진입, 의문의 동굴, 신수의 알 부화, 코르테즈의 환술, 깊은 심연 체험, 정령 계약, 심연의 환술 부수고 코르테즈 사살, 어둠의 조직에 대한 정보 입수, 꼭두각시 길잡이들의 해방, 수림 정보 입수.
하나같이 중요한 것들이었기에 눈을 감은 와중에도 론은 기억들을 되짚었다.
[잘 자.]
중심체온이 서서히 내려가는 론을 보며 홍염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의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캄캄한 새벽.
론은 조용히 눈을 떴다.
긴장한 탓도 있지만, 해야 할 게 있었기에 론은 일부러 불편한 자세로 잤고, 다행히 제때 일어난 듯했다.
[일어났어?!]
정령 계약을 하고부터 느껴지는 묘한 기운. 홍염이 말하길 이는 정령력이라고 했다. 자연계에 퍼져있는 정(精)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홍염은 그의 눈앞에 둥둥 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거야?’
[잠들고 나서부터 계속!]
‘너는 안 자?’
[잠? 난 생명체가 아니야!]
‘... 그럼 계속 그렇게 가만히 있었던 거야?’
[응!]
‘...’
괜히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신기해! 정(精)일 때는 몰랐는데, 정령이 되고 나니 알겠어. 영혼은 정말··· 신기해!]
‘맞아, 그렇지.’
[그럼 이제 움직이는 거야?]
‘응, 시간이 빠듯하긴 하지만, 확인 좀 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어제 코르테즈와 길잡이들에게 들었던 내용.
마셔스 수림 점령 계획.
길잡이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수림에 대한 정보를 독식하는 게 그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마을이 사라지고, 꼭두각시가 된 길잡이들은 수림 지도를 제작하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길잡이 중의 하나가 말했었다.
‘지도를 취합해 보관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코르테즈의 말과 대조해보면 대충 금고쯤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역시 수림 안이었고.
때문에 론은 서둘러 확인해보려는 것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코르테즈가 죽었다는 걸 그의 조직도 알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가 취할 정보가 있으면 취해야 했다.
사락
사라락.
최대한 기척을 줄이며 일어난 론이 간이 막사를 나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막사 안에는 한 쌍의 눈동자가 슬며시 떠졌다.
***
“하아, 하아···. 풀들이 너무 많아서 앞이 보이질 않네···.”
눈에 보이는 건 그저 빽빽한 나무와 풀들인데, 어제 그 길잡이는 분명 말했었다. 이 수림에도 길이 있다고.
그리고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길은 다름 아닌 수로(水路)였다.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거야!]
다행히 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는 물줄기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물줄기를 따라가니 점점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수로를 거슬러 가다 보면 10미터 안팎의 폭포가 보일 겁니다.’
솨아아아아.
그 길잡이의 말대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론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이윽고 정말 딱 그 정도 사이즈의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그 폭포수 뒤로 길이 있으니 들어가 보십시오. 제가 항상 동료들의 지도를 취합해 보관해 두던 곳입니다.’
론은 근처에 있던 돌을 몇 개 주워 힘껏 폭포를 향해 던졌다.
퍼억.
“음?”
퍼억.
퍼억.
탁! 테구르르르···.
“저기군.”
어디에 통로가 있을지 몰라 위에부터 차례로 던진 것이었는데, 다행히 통로는 수면과 그리 차이가 없는 듯했다.
대충 옷을 벗고는 론은 바로 물가로 뛰어들었다.
“어으!!”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새벽의 숲속 폭포수는 차가웠다.
[오! 신기해! 물은 보기만 했지, 이렇게 들어오는 건 처음이야!]
홍염은 불의 정령임에도 의외로 물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해할 뿐이다. 이에 론이 잠시 피식거리고는 곧장 폭포 뒷공간으로 헤엄쳤다.
솨아아아아.
성인 한 명이 딱 오갈 정도의 통로.
그 통로로 폭포수 소리가 선연히 울려 퍼졌다.
‘파이어.’
론은 홍염을 통해 몸 좀 녹이고 바로 들어갔다.
우우웅우웅
혹시 모를 함정 혹은 상황에 대비해 파이어 마법(홍염의 현신)을 유지한 채 움직였는데, 다행히 함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도달한 동굴의 끝.
[오! 뭐가 있어!]
코르테즈가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로 잡다한 것들이 쌓여 있었다.
앞서 길잡이가 말했던 수림의 지도로 보이는 것과 돈주머니들. 하나하나 끌러보니 금화와 은화들이 가득했다.
“광기에도 돈이 든다 이건가.”
미치다시피 했던 코르테즈의 모습을 한 번 떠올리고는 론이 테이블 서랍을 뒤졌다. 돈주머니에 있는 금액이 작지 않은 만큼 모으는 과정에서 거래 내역 혹은 영수증 같은 흔적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한 권의 서적이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표지에 론은 주저 없이 책을 펼쳤다. 촤라락. 역시나 현대어는 아니었다.
허나 론은 분명 읽을 수 있었다.
회귀 전 유적관리단에서만 수십년 있었던 그다. 웬만한 고대어는 대부분 섭렵했었는데, 어째 그 첫 장부터 론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네크로멘시··· 사령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