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80
마법.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것은 사실 어떤 거창한 법칙이 아니다.
그저 태초의 자연, 그리고 그 현상을 부르는 이름과도 같았다.
허나 시간이 흘러 태초의 자연을 기억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져갔다. 인간 자신의 힘과 명예, 본능에 취했고, 그렇게 태초의 자연은 잊혀져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상은 자연스레 구분되었다. 신과 태초의 자연이 머무는 천계 소르디아크. 신의 피조물과 자연의 권속이 남은 지상계. 그리고 신의 의지에 반하고 혼돈의 집합체들이 모인 마계 아뷔메르.
이런 구분된 세상 속에서 인간은 갈수록 옅어지는 태초의 감각을 잊지 않고자 자신들만의 법칙을 세웠고, 그것이 곧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한다 한들 인간의 대(代)는 이미 태초의 자연과 끊어진 지 오래였고, 그들이 불러내는 건 그저 태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직 태초의 자연을 품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정(精).
혹은 정령(精靈).
이 땅 그 어디든 존재하며, 온 자연 만물을 관장(管掌)한다. 즉, 태초의 자연이 지상계를 떠날 때 땅의 섭리(攝理)를 위해 남긴 그의 권속이었다.
허나 이에 대해 제대로 깨우치고 아는 이는 없었고, 직접 부릴 수 있는 마법만을 최고로 친 인간들은 간혹 등장하는 정령사들을 멸시했다. 모든 걸 제 손에 쥐고 휘두르길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태초의 향기를 품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
화르르륵.
론이 걸고 있던 붉은색 목걸이가 부서지더니 이내 불타올랐다. 허나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내면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사라질 것 같던, 사라졌으면 했던 자의식은 어느새 강렬한 염원과 함께 뭉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괴롭게 하던 기억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심연의 환술도 더 이상 간섭할 틈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순히 자위(自衛: 스스로 막아 지킴)하는 수준을 넘어 론은 마계의 기운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완전한 소각(燒却).
딱히 무언가를 의식하고 행한 게 아니었다. 그저 악이라 정의하고 선을 그었을 뿐인데 절로 불타 사라진 것이다.
의문이 드는 거야 당연했는데, 이를 풀어줄 존재가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의지의 집합체.
그것을 향해 론이 마음을 전했다.
‘안녕.’
화르륵.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원초적인 기운이 전해져온다. 론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네가 어둠의 기운을 없애버린 거구나. 고마워.’
그러자 상대 쪽에서 의지를 전달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론의 뇌 속에 선연히 펼쳐졌다.
고대부터 존재해 온 자연의 기운.
그것은 불이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불을 일으키는 정(精).
세상이 천계(소르디아크)와 지상계, 마계(아뷔메르)로 구분되고 나서 태초의 자연을 대신해 이 땅을 섭리해 온 존재였다.
그중에 불의 정(精)은 열(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하며, 열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관장(管掌)했다. 즉 자연의 섭리(攝理)로써 긴 세월을 오차 없이 운행해 온 것이다.
그 긴 세월에 론은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태초의 자연의 권속이었던 그들에게 맡겨진 또 다른 사명(使命). 그것은 바로 마계 기운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바로 멸마(滅魔).
그 때문에 불의 정(精)은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다가오는 정령사도 희귀하지만, 이렇게 생을 관통할 정도로 멸마의 의지를 지닌 인간은 희귀한 건 물론이고 때가 맞아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열정과 의지가 올곧다.]
수많은 불의 정(精) 중에서 태초의 기억을 머금은 하나가 론에게 다가왔다. 이미 론의 수용적인 태도로 인해 파장은 벌써부터 동조를 이루고 있었기에 의사전달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불의 정(精)은 어쩔 줄을 몰랐다.
존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오류, 이끌림. 정(精)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나 감출 수가 없었다.
[함께··· 같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불의 정(精).
론은 그저 포근히 미소 지을 뿐이다.
‘그래.’
화아아앗.
두 존재의 파장이 강렬한 동조를 이루었고, 이윽고 불의 정(精)에는 영(靈)이 깃들었다.
정령(精靈)의 탄생이었다.
***
“크헬헬헬! 아주 찔러버려! 네놈들의 욕망과 분노를 한번 분출해 보란 말이다!”
심연의 마안을 발동하며 자신 또한 광기에 사로잡힌 코르테즈가 수족이 된 세 사람에게 명령했다.
욕망과 분노, 광기.
성좌를 통해 경험한 그 미칠듯한 심연의 기운을 이 현실에서도 느껴보고 싶었다. 때문에 코르테즈는 세 사람의 의식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가의식 상태.
감각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육신의 통제권은 오로지 그에게 있었다.
“그래!! 이새끼야! 찔러 버리라구!!!”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코르테즈가 쳐다보는 이는 다름 아닌 크루딘이었다.
“흐으···.”
크루딘이 허리춤에 메고 있던 휴대용 간이 칼을 빼 들었다. 수풀이 우거진 수림이기에 챙겨왔던 것인데,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딸칵.
칼집을 고정하던 단추가 풀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칼날이 향한 곳.
바로 라리사였다.
서걱.
“꺄아악!!”
“큭크···. 흐! 크큭··· 크하하에에엑···.”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크루딘은 조그만 칼을 휘둘렀다.
서억!
석.
“하윽!! 크흐윽···.”
“뭐해, 이년들아!!! 네년들은 그렇게 찔리다 죽을 거냐? 서로 뜯고 베고 싸우란 말이다!!”
부우욱!
코르테즈는 제 광기를 못 이기고 입고 있던 상의를 찢어버렸다. 앙상하게 드러난 상체를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제 손으로 그어버렸다.
“크헤에에에엑!!”
그의 미친 괴성을 기점으로 크루딘, 라리사, 사티넬이 뒹굴며 서로 피를 튀겼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아!!”
점점 짙어져 가는 비명과 유혈 자국들.
그 위에 있는 세 사람의 점점 정신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괜찮은 길잡이라 생각했던 코르빌의 배신, 몸의 통제권을 앗아간 최면술, 우정을 나눈 친구들의 상처.
외적인 상해도 상해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똑똑이 지켜봐야만 하는 그들의 정신이 갈려 나갔다.
그들에게 있어 유일한 탈출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뜨거운 빛이.
화르르륵!
모든 걸 태워 없애버릴 듯한 홍염이 피를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는 무리를 뒤덮었다.
프로미넌스.
멸마(滅魔)의 불꽃이었다.
가의식 상태에서 극한의 고통을 받아야 했던 세 사람의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크흑···. 미, 미안해···.”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크루딘. 칼을 들고 미친 듯이 친구들에게 휘둘렀으니 그 죄책감이 상당하였으리라.
하지만 사티넬과 라리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육신의 통제권이 돌아온 건 그녀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언제 다시 코르테즈의 최면에 빠질지 몰랐기에 안심보다는 경계가 앞섰다.
“흐엑···?”
흥이 꺼진 듯한 분위기에 허공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던 코르테즈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의 너덜너덜한 상의 사이로는 여전히 피가 줄줄 지금도 흐르고 있었다.
그런 그와 론은 눈을 마주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환술에 빠져드는 심연의 마안. 하지만 이는 더 이상 론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 네놈!! 뭔 짓을 한 것이야?!!”
“뭔 짓을 하긴 했지.”
아무리 날고 기는 고위 마법사라 해도 심연의 마안은 인간이 버텨낼 수 없는 환술이다.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절망으로 끄집어 내리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는 버티는 걸 넘어 환술을 부수고 나왔다.
규격 외의 유형.
거기에다가 아까부터 그의 양손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마법진. 코르테즈는 왠지 모를 중압감을 느꼈다.
게걸스럽게 광기를 찾아 헤매던 본능은 사그라들고, ‘생존’ 욕구가 떠올랐다.
‘내, 내가 공포를 느꼈다고?!’
코르테즈가 시커먼 두 눈을 부릅떴다.
“감히 땅의 미물 따위가 이 흑마법사의 권위에 넘보려 하느냐!! 자, 어디 한 번 그럼 지옥을 경험해 봐라!!”
그가 끌어낼 수 있는 모든 마계의 기운을 그의 눈에 응집시켰다.
마경(魔境)-지옥.
그 순간 코르테즈의 시커먼 눈동자의 윤곽이 흐물거리더니 갑자기 확 터져나갔다.
“모두 눈 감아!”
론이 다급히 소리쳤다.
몇 마디 안 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이미 론의 시야는 시커멓게 물들어버렸다.
스멀스멀.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화르륵!
이제껏 푸르기만 하던 론의 눈동자에 불이 피어오르듯 색이 변했다. 신비한 느낌의 보라색으로.
[괜찮아?!]
시각을 통해 파고드는 마계의 힘을 불의 정령(精靈)이 즉시 멸마의 힘으로 차단한 것이다.
‘응, 고마워. 홍염(紅焰).’
심연을 벗어나자마자 계약한 불의 정령. 정령사들은 제 정령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는 걸 들은 적 있었기에 해봤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대로는 안 되겠군···.’
[아예 소각시켜버리자! 재도 남김없이!]
론의 생각을 읽은 불의 정령 홍염이 제 생각을 가감 없이 전했다.
‘당연히 그게 깔끔하지만, 놈들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까 놈의 육신은 놔두고 마계의 기운만 소각해 줘. 부탁할게.’
[완전히 불태워 버려야 되는데! 흥! 알겠어.]
불의 정(精)일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영(靈)이 깃들며 정령이 된 홍염은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아이와 같은 감정과 생각, 의식 등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것이 말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딱히 싫거나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정말 아이 같아서 지금처럼 옅게 미소가 지어질 뿐이다.
화르르륵!
하지만 아기자기한 말투와는 달리 론의 손에서 뿜어진 불을 매개로 튀어나온 멸마의 불길은 더없이 강렬했다.
“뭐, 뭐야! 대체 어떻··· 크하아악!!”
코르테즈는 자신이 펼친 광역 환술, 마경을 뚫고 뻗어오는 시뻘건 불길에 기겁했다. 도망치려 했으나 불길이 집어삼키는 쪽이 훨씬 빨랐다.
“흐악!! 헤엑. 헤에엑···.”
순식간에 마계의 기운이 타들어 갔다.
코르테즈는 이제껏 누려온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허나 멸마의 불길은 무심히 지워나갈 뿐이었다.
털석.
핼쑥해진 코르테즈가 무릎을 꿇었다.
이성적 사고 뇌가 퇴화할 정도로 자극적 본능에 찌들었던 뇌가 더 욕구를 채우지 못해 극심한 공허를 자아냈다. 그리고 이어서 밀려오는 미칠듯한 갈증과 허기.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 제, 제발···.”
미친 듯이 손을 떨며 빌었지만, 론의 눈빛은 무심했다.
“크흑!! 흑흑흑···.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사, 살려주세요···.”
그런 그를 론이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라.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순간 코르테즈의 눈이 커졌다.
그뿐 아니라 달달 떠는 몸뚱이를 이끌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 했는데, 론은 그런 그의 멱살을 콱 움켜쥐었다.
“코르테즈!”
흠칫.
“말해. 아뷔메르, 성좌, 흑석, 흑마법사, 아이블 마탑! 다 네 놈들 짓이잖아!!”
그의 두 눈을 파낼 듯 쳐다보며 론이 외쳤다. 회귀 전 대륙을 재앙으로 물들였던 그들이다.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놈을 놔줄 수가 없었다.
“네가 아는 것들을 모조리 말해!”
“흐에에엑!!”
멱살을 움켜쥔 론의 주위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