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9
수림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찌르르 찌르르.
짹짹.
우후우웅 우후우웅.
각종 곤충과 짐승 소리가 가득한 숲속에 인간의 소리가 가로질렀다.
“현재 시간 오후 3시. 두 시간 후면 수림 활동 시간 종료. 30분 내에 도착하시지 않으면 지도를 제작해 음지(陰地)에 배치한다.”
“30분 후 1번을 제외한 2, 3, 4번은 수림 탐색을 시작한다.”
높낮이 없는 무심한 목소리다.
그리고 그와 어울리는 초점 없는 눈동자의 사내들. 그들이 멍한 눈초리로 한 곳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젠장!’
환술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새 암시는 다시 파고들었고, 이번에도 론을 제외한 모든 일행이 걸려들었다. 멍한 눈빛의 일행들이 그 증거였다.
허나 분노를 쏟아낼 틈이 없었다.
론은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을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끌끌끌···. 고생했다, 아이들아. 이제 이리 오거라.”
론이 소환한 돌기둥 너머로 코르테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기점으로 일행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골렘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연의 환술을 일으키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활용성이 높은 것이 바로 자의적 수용이다. 환술사의 말에 ‘동의’하는 순간, 암시의 파장은 뇌 속에 새겨진다.
이에서 벗어나려면 피술자가 당시 동의했던 내용을 부정해야 하는데, 코르테즈가 론 일행들에게 심어놓은 것은 현실 자각 암시였다. 몸소 경험한 현실을 암시로 심었기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 마디로 보통 방법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오히려 환술사인 코르테즈는 그 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더 많은 암시를 쌓아갈 뿐이었다.
한 번 빠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이름하여 개미지옥이다.
‘음?!’
그런데 그 앞으로 나란히 선 론 일행을 보던 중 순간 코르테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하지만, 한 쌍의 눈동자에는 분명 자유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거짓 행세인 것이다.
허나 코르테즈는 이내 재밌다는 듯이 입가를 들어 올렸다.
‘재밌군. 어떤 수로 내 암시에서 벗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놈은 자아를 부숴서라도 그 이유를 알아내야겠구나.’
크루딘, 사티넬, 라리사.
한명 한명 눈을 마주 보며 코르테즈가 확인하기 시작했다.
허나 론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턱을 잡고 고개를 움직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점이랄게 없었기에 그저 잠자코 있었다. 적당히 놈의 말에 어울려 주다가 뒤를 치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코르테즈는 론과 키가 비슷했다. 그는 앞서 일행들에게 했던 것처럼 론의 턱을 잡고는 눈을 마주쳤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 생각도, 아무 생각···.’
무념무상을 되뇌며 뇌를 백지화하던 론. 그런데 그런 백지에 시커먼 잉크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심연의 마안(魔眼).
코르테즈가 자신이 일생을 바쳐 일궈온 서클을 걷어내고, 실질적으로 몸에 새긴 게 바로 이것이었다.
흑석을 통해 기초를 다진 코르테즈는 그의 눈동자에 아뷔메르, 즉 마계의 심연을 심어놓았다. 최악의 절망과 공포만이 존재하는 심연은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이지와 자아를 갈아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는 자아 부정은 곧 환술의 시작이었다.
“컥!”
비명은커녕 짧은 단말마와 함께 론이 그대로 쓰러졌다. 부들부들 대며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면,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이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곱게 따라올 것이지. 되지도 않는 머리를 굴린 네 업(業)이다.”
마계의 심연을 마주함으로 자아는 완전히 박살 날 것이다. 즉, 쓸만한 꼭두각시로 쓰기에는 글러 버렸기에 코르테즈는 아예 잔꾀를 부린 대가로 고통이나 더 받도록 했다.
그렇게 론을 내버려 둔 채 그는 다른 이들을 살폈다.
“끌끌끌, 마도왕국 아들렌 아카데미의 인재들이라···. 게다가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않아서 싱싱하잖아. 쓰읍,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꾸나.”
한껏 입맛을 다신 그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열에서 하나까지 거꾸로 셀 것이다. 그러면 너는 계단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네 모습을 상상해 보거라. 각각의 계단을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몸과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잠시간의 여유를 주고는 코르테즈가 이어 말했다.
“자 그럼 한 계단씩 내려가자꾸나. 열, 아홉, 여덟, 일곱···. 점점 더 깊이 편안해질 게야. 여섯, 다섯, 넷···. 더욱더 편안해진다. 셋, 둘, 하나···. 이제 몸과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깊이 이완되었다.”
심화암시.
심상의 안락함과 더불어 의식을 심층까지 끌어내린다. 지금 코르테즈가 일으키는 것은 최면이었다. 단순히 환영 속에서 고통받게만 하는 게 아니라, 피술자의 심층 의식을 저당잡고 꼭두각시로 부리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풀고 부정적인 생각과 논리적 판단은 하지 말고 내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된다. 그러면 그대로 최면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직접암시.
보통의 최면술사가 유도하는 방식과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코르테즈의 매개체는 어둠의 파장이 깃든 현실 자각 암시였다. 빠져나갈 틈은커녕 지금도 계속해서 사고영역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너는 곧 졸음이 올 것이다. 졸음이 네 몸과 마음을 모두 휘감아 버리도록 놔두거라. 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나. 그대로 편히 누워 보아라.”
코르테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루딘을 비롯한 세 사람이 굼뜬 움직임으로 바닥에 누웠다.
“그러면 이제 네 마음속 깊숙이 고이 보관해 두었던 소중한 것이 떠오를 것이다. 기쁨, 행복, 자유, 자아(自我) 등등. 그것들을 하나하나 조심히 꺼내 보자꾸나.”
“흑! 엄마, 아빠··· 흑흑···.”
“라라···.”
“아버지!”
순간 세 사람은 저마다 격앙된 감정을 표출했다. 내면 깊은 곳의 자물쇠를 정말 풀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반응에 코르테즈의 입가가 싸악 올라갔다. 어둠의 파장을 조종하는 거야 이미 도가 튼 그였기에 더 이상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제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끌끌끌, 쓸만한 것들이 수중에 들어오는구나.’
코르테즈는 그저 조용히 세 사람을 지켜봤다. 저렇게 기뻐하고 추억하며 자유 의지를 만끽하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충분히 이를 곱씹으며 끄집어낸 그들에게 그가 말했다.
“자, 그럼 그것들을 이제 내게 맡기려무나. 내가 소중히 보관해주마.”
종결암시였다.
“아아···!”
여기저기 아쉬워하는 탄식의 신음이 들려왔지만, 코르테즈가 다독였다.
“괜찮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소중히 보관해 줄 것이다.”
“흑!!”
눈물을 흘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손을 덜덜 떨어가며 코르테즈에게 그들의 보물들을 건넸다.
“클클클. 그래, 잘 받았다. 크하하하하!”
코르테즈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았다. 지금껏 꽤나 많은 이들의 자아를 갈취했지만 결코 질리지 않았다. 아니, 질릴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아뷔메르의 대계가 이루어져서 원 없이 인간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아들렌 아카데미의 엘리트들도 빼앗았겠다 그다음은 교수인가. 아니지 아니지, 이왕이면 꼭대기를 노려야지. 7서클 대마도사라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거 같은데 말야. 클클클, 크하하하하!”
코르테즈가 폭소를 터뜨렸다.
“자, 그럼 이제 너희는 내 수족이 된 기념으로 이 자리에서 축제를 벌이자꾸나. 피의 축제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억눌러야 했던 본능. 코르테즈는 이를 풀어버렸다. 그가 침을 질질 흘리며 론 일행을 쳐다봤다.
“네놈들이 품은 그 싱싱한 피를 쏟아내 보거라! 어서 서로 찢고 물어뜯으란 말이다!! 크하아아악!!”
***
그저 새카만 어둠이었다.
뭐라 판단할만한 정보도 없기에 멍하니 있었는데, 이윽고 론의 시신경(視神經)을 통해 마계의 심연이 펼쳐졌다.
‘끄아아아아악!’
영원한 절규와 공포, 절망.
혼돈이 론을 끄집어 내렸다.
서걱 서걱 서걱
푹! 푸욱,
서걱.
쉴새 없이 의식들이 갈려 나갔다.
생애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과 고통은 의식을 단시간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케엑! 크르르르···.”
짐승 같은 원초적인 비명이 입에서 새고 침까지 줄줄 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론의 표면 의식은 완전히 갈려 나갔고, 그의 너덜너덜해진 자아가 도망친 곳. 심층 의식까지 심연의 환영이 파고들었다.
론의 심층 의식 세계는 생각보다 방대했다. 자그마치 80년의 세월을 살았던 그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경험을 했고, 그중에 마음속 깊이 새겨질 만한 일들은 차고도 넘쳤다.
[첫 번째 심층 자아.]
주위가 아주 시끌벅적하다.
병장기가 휘둘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거기에 사람들의 비명까지도.
그런데 그 순간,
론이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이 얘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이거 귀한 집 도련님이 계셨군요.’
험악한 인상의 사내.
누구에게 설명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론은 알고 있었다. 그는 도적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 한 론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일 뿐이다.
‘도, 도련님은 놔두십시오!’
‘뭐야 이 새끼는! 야, 이새끼 조져!’
‘예, 형님!’
회귀 전 아카데미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던 마차 행렬에 도적들이 기습했고, 론은 그들이 마부를 비롯한 다른 이들을 구타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다.
‘큭큭큭, 그래도 도련님은 지.켜.드.렸.으.니 당연히 저희의 안위는 챙겨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렇지! 내 누구에게도 마, 말하지 않겠다.’
감추고 싶던 오랜 기억.
그 수치심을 마계의 파장은 끝없이 증폭시켰다.
“아···.”
자아가 썰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극심한 자기혐오와 절망감이 미친 듯이 자학을 이어갔다.
[첫 번째 심층 자아 붕괴.]
자아가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론의 또 무의식은 살고자 기어코 그 지옥을 벗어났다. 원초적인 생의 의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도망친 곳이 또 다른 사형장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심층 자아.]
‘자네가 이번에 남부 지역에 발령받은 직원인가?’
‘예, 그렇습니다! 8급 관리직을 명 받은 론 스펜서입니다!’
‘흐음, 그래. 박력 있어서 좋군. 근데 말야, 이 바닥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서 말야.’
‘예?’
‘발령 첫날, 근무지도 아닌 여기 술집까지 찾아왔으니 내 한 번 보여줘야지. 어이!! 게 아무도 없느냐?’
‘예, 나으리. 부르셨습니까.’
이윽고 다가온 젊은 고용인.
툭툭.
론의 인사를 받던 중년 관리가 그의 뺨을 치며 말했다.
‘너 말고 길바닥 먼지 같은 놈들 좀 데려 와 봐라.’
‘옛, 예! 나으리!’
심층의 기억은 의미 없는 순간들을 빠르게 넘기고 사건의 시간대로 단번에 넘어갔다.
‘퉷!’
중년 관리가 바닥에 떨어진 동전에 침을 뱉으며 눈앞의 어린 꼬마들에게 말했다.
‘이거 줄 테니 가서 이보르그 사원 주변의 잡초들을 제거하고 오거라.’
‘네, 넷!’
이보르그 사원.
그 크기만 해도 수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유적이다. 그런데 그런 부지의 잡초 제거를 몇 안 되는 아이들에게 시키고는 고작 동전 몇 개 주는 게 전부였다.
왕실관리단에서 할당되는 금액의 상당수를 착복한 것이다.
허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앙상한 몸뚱어리로 동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로 치고받고 싸울 뿐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봤지? 이렇게 하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안 돼, 제발···.”
멍한 표정의 론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환영 속 그는 말했다.
‘예.’
“아아···.”
퍽! 퍼버벅!
퍼억!
특별히 신음이랄 것도 없다.
대게 못 먹고 자란 아이들이 그렇듯 간신히 숨만 뱉으며 처맞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처맞는 아이들의 얼굴에 새겨진 이목구비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론이었다.
퍽! 퍼벅! 퍽 퍽!
걷잡을 수 없는 모멸감이 그의 자아를 붕괴해 나갔다.
[두 번째 심층 자아 붕괴.]
어떤 충격적인 일이든 간에 그것이 반복되면, 무의식적으로 단념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론은 미칠듯한 자의식 붕괴로 생의 의지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두 번까지는 우연에 우연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세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다.
심리적 허들인 것이다.
그 기점에 론이 서 있었다.
론의 눈동자에도 서서히 빛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극심한 자의식 붕괴가 생을 포기하고 싶은 것이다.
허나 노도와 같은 마계의 파장은 론을 더욱 몰아갔다.
[세 번째 심층 자아.]
저벅저벅.
그가 내딛는 발걸음 주위로 보이는 풍경. 하나같이 온전하지 않다. 무너진 집들이 즐비했다.
폐허.
흑마법사들이 밟고 지나간 땅이다.
무엇 하나 온전하지 않은 그곳에 이질적인 게 눈에 들어왔다.
고운 옷감과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 그리고 두툼한 신발까지.
론,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이윽고 한 인영이 보였다.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꼬마 아이다.
어짜피 가는 길이었기에 점점 아이의 모습은 선명히 다가왔고, 이내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아···.’
꼬마 아이의 하체를 뒤덮은 것은 쓰레기 더미가 아니었다. 싸늘하게 굳은 시체였다. 지저분하고 부스스한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뻗어있었고, 그 어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살, 려 주, 세요···.]
그럼에도 아이는 외쳐댔다.
아니, 외치다 목이 나가 그저 입술만 뻐끔거렸다.
충분히 도와줄 수도 있건만 론은 지나쳤다.
“왜···.”
현실의 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기억 속 론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결국 마주한 이.
시커먼 로브의 사내였다.
특징이랄 게 있다면 오른쪽 뺨에 새겨진 검은 물방울 문양. 아이블 마탑의 마법사이자 흑마법사였다.
“안 돼, 제발··· 제발···.”
현실의 론이 애원했다.
허나 기억 속의 그는 흑마법사를 외면하지 못했다. 위축된 자세로 뭐라 떠들더니 덜덜 떠는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흑마법사가 씨익 웃더니 그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가 향한 곳.
아까 부모의 시체를 껴안은 채 살려달라 애원하던 꼬마 아이가 있던 곳이었다.
“아···.”
가장 숨기고 싶었던 기억. 심연의 환술은 기어코 그 기억을 끄집어냈다.
회귀 후 그렇게 후회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결심했건만 코르테즈의 환술은 그런 그의 수치심과 자기 모멸감을 미친 듯이 극대화해버렸다.
극심한 자기혐오와 자아부정.
[세 번째 심층 자아 붕괴.]
론의 생명이 꺼져나간다.
신음과 눈물을 흘려대던 생체활동도 서서히 정지하고 몸 전체가 굳어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고자 했던가.’
‘내 삶은 무엇인가.’
‘회귀란 무엇인가.’
단순한 철학적 사유가 아닌 생의 마지막 질문이자 유언이었다.
시공간이 멈춘 듯한 정적.
론이 희미하게 웃었다.
‘과거의 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나였기에 이번에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번에도 나약한 나였으나 미련은 없다. 그래도 이번에는 마주했으니까, 외면하지 않았으니까, 맞서 싸웠으니까,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약자를 앞세우지 않았으니까!’
초점이 없던 그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누구 하나 알아보는 이 없으나 나아갔고, 죽음의 문턱에서도 결코 돌아서지 않았다.
미련은 없다.
다만 아쉬웠다.
너무 아쉽다.
장벽과도 같은 그 어둠에 또다시 무릎 꿇어야 한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아쉽다!
-삐이이이이.
새카만 어둠.
그곳에 대폭발이 일어났다. 강렬한 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퍼져나갔다.
강렬한 생(生)의 의지였다.
멍해 있던 론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굳어 있던 그의 몸이 풀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생을 관통한 의지와 열정이 자연의 섭리에까지 닿았다.
쩌저적.
약 1년 전.
아카데미에 입학할 당시 론의 아버지 에레드가 그에게 주었던 선물. 정령석 목걸이가 론의 의지에 공명했다.
화르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