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7
덜컹! 덜컹!
울퉁불퉁한 지대로 인해 론은 자연스레 손을 창으로 뻗었다.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것.
난장판이 된 마을이었다.
마치 자연재해라도 지나간 듯 온전할 게 없는 주변이 그의 얼굴을 절로 찡그리게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적당한 곳에 내리자 무거운 표정의 사내들이 마중을 나왔다. 가죽 위에 쇳조각들이 덧대어진 갑옷을 입은 자들. 스타프 자작령의 영지병들이다.
그리고 그 병사들의 대장인 카렌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린 일행을 살폈다.
분명 수림 초입 산샤 마을이 습격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굳이 이곳을 찾아왔다. 그 고집스러운 태도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생겼지만, 마차에서 내린 이들의 외양은 누가 봐도 귀족이었다.
“고생 많으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모시는 나으리들께서 수림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코르빌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카렌에게 말했다. 마을 촌장도 없는 지금은 관할 영지의 영지병들이 그 담당자나 다름없다.
“먼저는 스타프 자작령의 관광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문은 충분히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보다시피 마을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카렌이 담담히 폐허가 된 마을을 가리켰다. 귀족에게 어쭙잖은 신경전을 벌여봐야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기에 그는 괜히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대충 눈치 있으면 분위기 보고 가라고. 지금은 사건 처리에 마을 복구 계획 짜기에도 바쁘니까.’
하지만 이어진 론의 말에 카렌의 입이 벌어졌다.
“수고 많으시군요. 아들렌 왕국 스펜서 남작가의 삼남 론 스펜서입니다. 여행차 방문했는데, 이곳 마셔스 수림이 오랜 역사의 그레고리 고국만큼이나 대자연의 보고(寶庫)라 들었습니다. 역대 스타프 영주님들께서 그만큼 신경을 썼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귀중한 곳을 보지 않고 간다면 분명 후회가 남을 겁니다.”
어려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품위였다. 비단, 존댓말 때문이 아니었다.
카렌, 그가 영지병으로 근무하며 자작령의 직계 귀족을 비롯해 방계 귀족들도 여럿 봤지만, 눈앞의 소년만큼 차분하면서도 귀족의 면모가 느껴지는 이는 처음이었다.
딱히 강압을 부리지 않았다.
당당한 자기소개에 이어 스타프 영주와 영지에 관한 칭찬을 나열하니, 카렌의 마음에는 절로 자부심과 호감이 피어났다.
“크흠, 흠. 영주님께서 여러모로 신경 쓰시긴 합니다. 그런데, 마을 상황이 이러는 바람에 숙소는커녕 막사에서 밤을 보내야 하실 텐데 괜찮겠습니까?”
“그것 또한 여행의 묘미지요. 괜찮습니다.”
“큼! 그렇다면야. 예, 그럼 모쪼록 좋은 시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어이, 위든! 여기 아들렌 왕국에서 오신 귀족분들이 잠시 있다 가신다니, 거처 좀 마련해 드려라!”
“예, 알겠습니다!”
카렌을 비롯한 영지병들이 고개를 숙이며 길을 터주었다.
‘뭐 길잡이도 없는 마당에 입구 주변 좀 구경하다가 금방 나오겠지.’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론 일행이 그저 단순히 유흥 목적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는 것을.
“나으리들 덕분에 수월히 산샤 마을에 들어왔군요.”
“뭐 말하는 거야 원래부터 론이 잘했으니까.”
크루딘이 손으로 입 모양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쳤다.
“그나저나 진짜 폐허나 다름없네. 이거 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큭큭.”
뚜둑 뚝.
그렇게 말하며 크루딘은 괜히 관절 소리가 나도록 몸을 풀어댔다. 마치 누가 좀 사고 좀 쳐줬으면 하는 식으로 말이다.
“껄껄걸, 영지병들도 있는 마당에 설마 그럴 리가요. 그때는 정말 스타프 영지 전체가 들고일어나 그 흉적을 찾아 나설 겁니다.”
크루딘과 코르빌이 얘기하는 사이 론은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티넬이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론님.”
“음? 무슨 일 있습니까, 사티넬?”
“알이··· 알이 이상해요.”
“예?”
알이 담긴 셔틀레인(허리춤에 메는 조그만 가방)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사티넬이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여기 도착하고 점점 파장이 커지고 있어요. 마치 수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
사방이 갈색과 초록뿐인 공간.
마셔스 수림이었다.
“아으, 이 풀들 좀 봐.”
“아으 근육 돼지야! 밀지 말라고!”
“뭐 그, 근육 돼지?! 이 아줌마가 숲에 들어오더니 정신이 돌아왔나!”
“생각보다 이쪽은 험한 것 같습니다, 도련님.”
코르빌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불과 한 시간 전.
알에서 파장이 느껴진다던 사티넬의 말에 론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땅의 성수도 성수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알은 신수라 추정되는 생물체의 알이었다.
그 때문에 론은 영지병들이 안내한 건물에 대충 짐을 내려놓고 필요한 것만 챙겨 곧장 수림행을 주장했다.
일행들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렇게 바로 마셔스 수림으로 들어왔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중간중간 사티넬이 느껴지는 파장에 따라 길을 바꿨는데, 덕분에 지금 있는 곳은 코르빌도 처음인 곳이었다.
찌이익.
때문에 코르빌은 일정 간격으로 계속해서 나뭇가지에 노란색 천을 찢어 표식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 애송이들 뭐지? 설마 내 계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코르빌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론 일행을 쳐다봤다.
길잡이들이 사는 산샤 마을 파괴,
그리고 마셔스 수림 지도 제작.
조직에서 코르테즈라 불리는 그에게 하달한 임무인데, 사실상 완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쓸만한 놈들을 제외하고는 마을 주민을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단 한 명, 도망친 놈이 있긴 했지만 좁혀지는 포위망 속에 곧 잡힐 터였다.
그런데 그 때문에 방심을 좀 했다.
‘이렇게 되면 예정지에서 점점 멀어지는데···. 쯧!’
수하들의 90퍼센트를 도망자를 추살하는 데 보내고, 소수의 인원만 수림에 배치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변수에 취약한 놈들이었다. 바로 최면과 세뇌에 빠져 수림 지도를 그리던 길잡이들!
“이쪽이요!”
코르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에도 사티넬이 일행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어이, 사티넬! 수풀이 너무 우거져서 그렇게 막 나아가면 위험하다고!”
“사티넬, 저 기집애 왜 저래. 거기 뭐가 있어?”
크루딘과 라리사가 티격태격하는 것도 멈추고 앞서간 사티넬을 서둘러 쫓았다.
“하아···.”
결국 한숨을 푹 쉬는 코르빌.
‘뭐지···?’
코르빌을 누구보다 경계하던 론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간밤에 있었던 일로 그는 줄곧 그의 뒤, 즉 일행의 최후위를 맡고 있었다.
지금 사티넬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는 거지만, 그럼에도 최우선 경계 대상은 바로 코르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등을 보이는 일 없이 줄곧 맨 뒤에 있었던 것인데, 그가 제법 불만이 섞인 감정을 표현했다.
“할아범, 일단 가자. 저러다 사티넬 놓치겠어.”
“예, 알겠습니다.”
크루딘의 쳐다보자 코르빌은 이전의 낯빛을 온데간데없이 지우고는 다시 따라붙었다.
“허억, 허억, 허엇···.”
어느 순간부터 말릴 새도 없이 사티넬이 뛰기 시작하자 일행들은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티넬이 갑자기 멈춰 섰다.
“하아, 사티넬 미쳤어? 하아··· 갑자기 왜 안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기집애야! 하악,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라리사가 거친 호흡을 뱉으며 소리쳤다.
“여기··· 하아, 하아··· 여기에 뭔가 있는 거 같아요···.”
사티넬은 그러면서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웬 동굴의 입구처럼 보이는 구멍이 있었다.
“끄흐음···.”
뒤따르던 코르빌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동굴.
예로부터 동물들의 안식처였다. 출구를 제외하고는 외부로부터 막혀있다 보니 안전과 보온성 면에서 탁월하기 때문이다.
“저기 저 동굴을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아가씨?”
코르빌이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네, 맞아요.”
코르빌의 아랫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가 이 마셔스 수림을 담당하게 되면서 꽤나 넓은 영역을 돌아다녔다 생각했지만, 이 동굴은 처음이었다.
가뜩이나 이 안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그녀는 아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태평했다.
“뭐 마셔스 수림에서 아직 몬스터가 발견됐다는 얘기는 없지만, 그래도 야생 동굴인 만큼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봐요!”
“...”
말하나 마나였다.
“그나저나 할아범 말대로 궁금하긴 하네. 이런 야생 동굴에는 안에 뭐가 살고 있으려나?”
“곰이라도 있는 거 아냐? 야, 크루딘. 뭐 나타나면 이 누님 확실히 지켜라.”
“뭐래는 거야, 제일 사납게 생겨가지고는.”
“뭐? 사납게 생겨? 야, 근육 돼지! 잠깐 이리 와 봐!”
그렇게 일행과 코르빌이 안으로 들어가고, 론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확인하다가 이내 따라 들어갔다.
똑.
똑.
똑.
종유석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동굴 안에 선연히 울려지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사티넬이 가지고 있던 알.
이제는 론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런 게 아니었다.
우웅.
우우웅.
“사, 사티넬?”
론이 그녀를 멈춰 세우려 했지만, 사티넬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 커다란 물웅덩이가 눈앞에 있었다. 거기에다가 동굴의 천장마저 뚫려 있어서 상당히 특이한 운치를 자아냈는데,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사티넬의 조그만 가방, 셔틀레인에 향했다. 론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느낀 것이다.
“사티넬. 그 알, 좀 이상하지 않아?”
이제껏 그녀가 가지고 다니던 알에 일말의 기대도 담은 적이 없었다. 오래도록 깨지지도 썩지도 않는 알과 신수라는 특징. 웬만해서는 절대 부화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그 알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파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사티넬은 그저 말없이 가방에서 하얀 알을 조심스레 꺼냈다.
우우우웅.
우웅.
밀폐된 공간이라 그런지 마치 귀에 음파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여기니?’
우웅우우웅.
사티넬이 전한 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듯 알이 꿈틀거렸다. 파장을 넘어선 물리적 반응에 그녀도 적잖이 놀랐다.
꿀꺽.
사티넬이 조심스레 웅덩이 곁에 알을 놓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 웅덩이 말고는 특징적이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대체 무슨 알이길래···.’
알에 대해서는 일행들에게 들을 일이 없었던 코르빌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뭐, 뭐야? 정말 부화하기라도 한다고? 신수가?!”
“흐응···.”
‘신수?!’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론은 정신이 없었다. 코르빌을 경계하기에도 바쁜데 갑자기 알의 부화라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꿈틀꿈틀.
길쭉한 모양의 알이라 사티넬이 눕혀놨던 알이 조금씩 흔들거리더니 이내 데구르르 굴러버렸다. 바로 웅덩이를 향해서.
“아, 안돼!!”
사티넬이 기겁을 하며 손을 뻗었지만, 알이 구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화아아앗.
사티넬의 손이 닿기도 전에 알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뭔 일이 대체 일어나려고···.”
론 일행의 뒤를 치려고 했던 코르빌은 당초 계획도 까맣게 잊은 채 아티팩트 마냥 신비한 빛을 발하는 알에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쩌저저적.
정말 알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