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6
사티넬에게 알을 팔았던 사람.
당시 그녀가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털어 사는 바람에 당연히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외모는 평범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을 고르자면 입술 오른쪽 아래에 찍혀 있던 점이었는데,
그 점이 저기 저 수배지에도 동일하게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얼굴까지도.
“예, 확인했습니다. 지나가십시오.”
그 때문이었을까.
검문하던 병사들의 말도 론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사티넬을 향해 돌아갔다. 너도 동의하냐는 듯이 말이다.
꿀꺽.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사티넬도 그런 론을 쳐다봤다.
“도련님, 아가씨. 안 가십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둘 사이로 코르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예. 갑니다. 가시죠, 사티넬.”
“네? 아! 네네.”
두 사람이 따라붙자 코르빌은 아직 파브렌 고원에 안 들른 곳을 다니며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론과 사티넬의 귀에 그것이 들어올 리가 없었고, 이내 둘이 얘기할만한 상황이 오자 그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아까 그 수배ㅈ···.”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그림이라고 하죠.”
“아, 네.”
“저도 똑같은 생각입니다. 그림에 있던 얼굴, 알을 팔았던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맞아요.”
당시에도 그는 뭔가 쫓기는 듯 초조해했기에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앞서 들은 대로, 길잡이 마을을 없애버린 흉악범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사티넬도 정말 그가 자신의 마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잘··· 모르겠어요. 정보들이 너무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서 지금은 혼란스럽네요.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가방에 담긴 알을 쳐다봤다. 지금도 여전히 파장이 느껴지는 의문의 알. 조용히 그것을 쓰다듬으며 사티넬은 생각했다.
‘그래도 너는 진짜지?’
“일단 일행들에게는 말하지 말고 지켜보죠.”
“알겠어요.”
이윽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단 듯이 다시 일행들 속에 파묻혔다.
허나 론의 머리에서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레고리 고국에 오고 나서 겪었던 심상치 않은 일들. 그것들이 모여 묘한 기시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고국 수도의 마법 테러 현장에 아이블 마탑 마법사가 있었는데, 왜 경비대는 그를 묵인했을까?’
‘마셔스 수림 출신의 그 남자와 그가 가져온 정체불명의 알은 도대체 뭐지?’
‘그는 왜 쫓기던 걸까?’
‘마셔스 수림의 길잡이 마을은 왜 사라졌을까?’
‘정말 그가 벌인 짓일까?’
‘오랜 지인을 죽일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는데···.’
풍겨오는 기시감에 추측을 더해봤지만, 진실은 멀게만 느껴졌다.
“후우···.”
오후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노을이 질 때쯤 론 일행은 파브렌 고원에서 하산했다.
“오늘은 그럼, 여기서 묵으십시오. 내일 아침 출발할 마차는 바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크으, 할아범 덕분에 든든하네. 얘기해서 품삯 좀 많이 쳐달라 할게. 고마워.”
“아닙니다. 마셔스 수림까지 가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산행하랴 피곤하셨을 텐데 어서 들어가 쉬십시오.”
“좀 쑤시긴 하지, 큭큭. 알았어, 그럼 부탁해.”
오늘 처음 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 계급과 나이의 차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크루딘이 코르빌을 편하게 생각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후 코르빌의 말처럼 일행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 방에 들어가 한껏 퍼졌다.
늘 신체 단련까지 하던 크루딘이 퍼질 정도였으니, 다른 일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틀간의 마차 행과 왕복 4시간에 이르는 산행, 결코 쉬운 일정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고요한 밤중에 론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끄흥···. 그새 몸이 무거워졌네.”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듯했다.
잔뜩 굳어버린 몸뚱어리와 비몽사몽 한 정신을 이끌고 론은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다른 여행객들도 고된 산행으로 인해 뻗은 건지 마을은 조용했다.
그 정적을 배경 삼아 론은 편안히 걸었다. 선선한 바람이 인도하는 대로.
“쯧! 도망쳤다 이건가.”
“그래도 산샤 마을 사람들은 전부 죽였으니, 이제 수림은 저희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코르테즈님.”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내 분명 아들렌 땅의 놈들 얘기를 해줬을 텐데? 방심하다가 아카데미 선발전은 물론이고, 아직까지 그 유산을 못 찾아서 난리라 하지 않았느냐!”
“죗, 죄송합니다!”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놈을 잡아라. 워프게이트는 당연히 통제하고 있겠지?”
“예, 물론입니다. 각종 범행을 덧씌워놔서 이 고국 땅에서는 이미 흉악범이 된 지 오랩니다.”
“후우···. 마무리 잘하거라. 끝이 안 좋으면, 지금껏 했던 모든 게 헛수고가 될 수도 있으니.”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복한 사내는 어째서인지 물러나지 않았다.
“할 말이 더 있느냐?”
“저 그런데 코르테즈님, 지금 보시는 애송이들은 뭐가 있는 녀석들입니까? 혹 사람이 필요하시면···.”
“신경 쓸 것 없다. 너는 그 도망친 길잡이나 잡아내. 완벽하게 일을 끝내야 성좌께서도 안심하신다. 아들렌에서와 같은 일이 여기서도 반복되게 하지 마라, 겔런.”
“예, 명심하겠습니다!”
부복하던 사내는 그제야 물러났고, 코르테즈도 이내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사브작.
숲속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코르테즈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감각에 잡히는 것은 없다.
딱히 위화감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짐승인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그는 숲을 벗어났다. 밤은 짧고 이제 곧 있으면, 그는 마셔스 수림으로 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숲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
허나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코, 코르빌?!”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자리를 잡고 명상하던 론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정신이 없었다.
‘허!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참고로 그가 기억하는 선에서 ‘성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바로 흑마법 세력.
그들은 아틀란샤 대륙을 사등분하여 각 지역에 총사령관을 두고 이 땅을 침범하였는데, 그 총사령관을 두고 그들은 분명 ‘성좌’라고 칭했었다.
마계의 힘을 직계로 이어받은 자들. 그중에서도 이 동방의 성좌가 유명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 성좌가 네크로맨시로 움직였던 것이 바로 고대 괴수 히드라였기 때문이다. 그 히드라를 필두로 그들은 동대륙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켰었다.
“허···.”
코르테즈, 아니 코르빌이 어떤 사내와 떠드는 얘기를 처음부터 모두 들은 건 아니었지만, 그 말미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시작은 그저 명상을 방해하는 한 소리였다. 말투에서 풍겨오는 불쾌한 감정이 집중을 방해했고, 이내 눈을 뜨고 귀 기울인 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를 경악게 했다.
분위기나 굵기는 조금 달랐지만, 분명 그 목소리는 낮 동안 자신들을 안내했던 길잡이 코르빌의 목소리였다.
허나 의아함이 드는 것도 잠시.
그가 쏟아낸 말들을 정리하느라 론은 정신이 없었다.
‘산샤 마을, 길잡이, 수림, 아들렌, 아카데미 선발전, 유물, 성좌···.’
고작 대화 몇 번 오가는 것을 들었을 뿐인데, 상당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중 상당수가 론, 그 자신과 관련 있었고.
‘아카데미 선발전은 흑석 목걸이와 관련된 게 틀림없어.’
‘아들렌 땅의 유물은 혹시 벨데레르 초대 탑주의 유산을 말하는 건가?’
‘사티넬과 그 사내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가 산샤 마을에서 도망친 마지막 길잡이인 것 같은데···.’
‘성좌를 비롯해 이곳의 놈들이 노리는 게 마셔스 수림에 있다는 건가?’
“젠장, 뭣보다 정리하고 판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론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됐든 간에 결국 노련한 길잡이라 여겼던 코르빌은 적들의 간부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와 당장 오늘, 아니 이제 곧 해가 뜨면 마셔스 수림으로 가야 했다.
“미쳤군. 하!”
놈들은 필요하면 여론까지 조작해 무고한 사람을 흉악범을 만든다. 어쭙잖은 행동은 오히려 놈들에게 달려들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다.
“일단은 가는 게 맞는 건가···.”
론은 그 자리에 앉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갑작스런 돌발 변수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또 놈들의 전력을 어느 정도로 예상해야 하며, 어느 시기가 가장 반격을 가하기 좋은 때인지 등등.
***
“하암, 간만에 푹 잤네. 그나저나 할아범은 잠도 안 자? 진짜 꼭두새벽부터 불러 세울 줄은 몰랐네.”
“껄껄걸, 점심 전에는 도착해야 그래도 수림에 들어갔다 올 수 있습니다. 괜히 여유 부렸다가 하루 종일 수림 초입에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뭐 수십 년 경험이 있는데 어련히 잘하겠지.”
라리사가 뭐 별 게 있냐는 듯이 먼저 마차에 오르자 다른 이들도 뒤따랐다. 다만 론은 처음부터 유심히 그들을 지켜봤다. 정확히는 콕 집어 코르빌을.
‘맞아, 틀림없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는 달랐지만, 분명 목소리는 동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까지 봤던 론이다.
“도련님, 안 가십니까?”
“갑니다.”
론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말에 따랐다.
솔직히 이른 새벽 일행들에게 말한다면 말 할 수 있었다. 숙소에는 코르빌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허나 론은 그러지 않았다.
회귀 전 경험했던 사실을 숨긴 채 일련의 것들을 전달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알리고 난 다음, 과연 일행들이 코르빌에게 전과 같이 대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절대 아니다’였다.
가뜩이나 친근감을 표하는 크루딘이었기에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놈의 장단에 맞춰줘 보자고.’
론이 생각하는 곳은 오히려 마셔스 수림이었다.
어제의 대화로 추측건대 코르빌이 이 마셔스 수림을 담당하는 집단의 우두머리인 듯했고, 그 인력은 죄다 도망친 길잡이를 잡는 데 투입된 듯했기 때문이다.
‘뭐 사고가 터진다고 해도 지금의 전력이면, 상대가 6서클이라 해도 제압이 가능하니까.’
그리고 그런 판단을 가능케 한 건 역시 자신감 때문이었다. 이미 회귀 전의 역량을 가뿐히 뛰어넘은 그였다. 게다가 마법사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기민함은 라리사가 채워주고 있었고 말이다.
케스케이드 일족의 술법은 마법진 마법보다 훨씬 즉각적인 것이었기에 난전에서 자신들에게 더 없이 패였다.
‘안타깝게도 허를 찌르는 건 나다. 코르빌.’
이후 마차는 이른 아침에 출발한 것답게 막힘없이 그들을 이끌었다.
‘첫 번째 고개를 넘으면 한동안 평지라 빠르게 달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고개가 있는 곳부터 식생이 바뀌어서 길이 험해 질 겁니다. 수림의 영향권이란 얘기지요.’
‘세 번째 긴 고개를 넘으면 있는 곳이 바로 산샤 마을, 수림의 초입입니다.’
어째서인지 마부석에 있던 코르빌은 중간중간 창을 열어 안에다 보고를 했다. 어제와는 다른 모습이 괜히 신경 쓰였지만 론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구체적인 상황 전달에 일행들은 좋아하기만 했으니까 말이다.
“오오, 진짜 평원이긴 한가 보네 속도 내는 거 봐.”
“다들 밖에 보세요, 나무들 굵기가 보통이 아니에요!”
“흐응, 할아범 말대로 오르막 내리막이 긴 거 보면 다 오긴 했나 보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그의 말대로 바뀌는 환경. 은연중에 일행들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면 암시라도 걸겠다는 거야, 뭐야.’
“아이고,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론의 몸이 붕 떠 올랐다.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