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4
“호오, 그럼 네 분께서는 모두 아들렌 아카데미 학생이란 말이십니까?!”
“뭐 그렇지.”
“이거 대단한 분들을 몰라뵀었군요.”
“정확히는 여기 론하고, 이 아줌, 크흠. 흠. 누님이 좀 잘난 거지만. 이번에 열릴 골든스태···.”
후웅.
퍽!
갑작스레 들려온 바람 소리와 함께 크루딘의 고개가 위로 획 젖혀졌다.
“악! 아 왜 때려?!”
“그러다 아주 가문의 비기까지 다 술술 풀겠다? 응?”
“가문의 비기를 왜 풀어!”
“왜 풀긴, 니가 지금 하는 꼬락서니가 생각 없이 죄다 술술 얘기하니까 하는 말이지!”
“맞습니다, 크루딘. 굳이 그렇게 떠벌리고 다녀서 좋을 건 없습니다. 탐방에 대해서만 얘기하지요.”
아들렌 아카데미는 먼 타국에서도 알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론 일행 한 명 한 명이 웬만한 현역 마법사들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아직은 미성년자였다.
즉, 실력 여부를 떠나 이들의 나이와 지위, 배경을 보고 누군가는 흑심을 품을 수도 있단 말이었다.
“론, 너마저···. 끄흥, 알았다고.”
“쯧쯧쯧···.”
그런 크루딘을 보며 라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약 한 시간 전.
론 일행이 고른 길잡이는 처음 말을 걸었던 그 노인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사티넬의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기에.
때문에 일행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를 택했고, 지금은 고원에 오르기 전 간단히 식사하는 중이었다.
“아이고,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말조심하겠습니다.”
“아냐, 이게 무슨 할아범 잘못이야. 말한 내 잘못이지. 꽉 막힌 우리 가문의 영감들하고는 달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 큭큭.”
“뭐 그 얘기는 그쯤하고, 앞서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요. 그럼 아말렉 부족은 당시 고대 마법을 부렸다는 겁니까?”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 제가 어릴 적 어르신들에게 전해 들은 것과 오랜 고서적에 따르면, 그들은 당시 이 근방에서 마법을 다루는 최초의 부족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 일대에 있던 많은 부족 중에서도 단연 우두머리였었지요.”
“아우이스 부족이 침략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맞습니다.”
“흐응, 나름 이 일대를 평정했던 부족인데 이를 무너뜨릴 정도였으면, 아우이스 부족은 그 전부터도 꽤나 강한 부족이었나 보네?”
얘기가 흥미로웠는지 라리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음···. 실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시 아말렉 부족 아래서 상당한 지위를 누렸던 부족이라는 설과 이와는 정반대로 아예 외부인이었다는 설도 있지요.”
“외부인이라고요?”
잠자코 있던 사티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파브렌 고원과 아말렉 부족.
그녀가 그레고리 고국의 고대 신앙을 조사할 때 가장 주축으로 삼았던 주제였다. 왠지 모르게 직감 상 탐방 목적과 가장 근접한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착민도 아닌 외부인이라고?’
그간의 정보들이 어긋나는 느낌에 사티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렇습니다. 당시 기록이나 전설들을 살펴보면, 파브렌 고원의 공중 도시 이전의 아이우스 부족에 대해서는 대부분 두루뭉술합니다. 그리고 제 추측입니다만, 외부인이었기에 그렇게 단번에 아말렉 부족을 밀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단번에 밀어낼 수 있었다···.”
그녀가 조사한 내용과는 전혀 딴판인 가설. 이에 사티넬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끝말을 따라 했다.
“예. 왜냐면 당시 마법사라 하면, 거의 신에 준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이 거의 팽배했을 때입니다. 초월적인 힘 자체로도 경외와 공포심을 느끼기 충분한데, 그런 아말렉 부족을 아이우스 부족이 궤멸시켰다는 건 적어도 그러한 심리적 압박에서는 벗어나 있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를 가장 편히 설명할 수 있는 가정은 아우이스 부족이 외부인이었다는 설입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오래전부터 집단생활을 해온 인간에게 있어 공감은 거의 본능이다. 그리고 그 공감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감정의 전염이었고.
헌데 다른 것도 아니고 초월적인 힘이자 당시에는 최초의 마법이었을 텐데, 이를 아무렇지 않게 타파할 정도였으면 외부인이었다는 설도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너무 머나먼 얘기다 보니 그저 추측만 할 뿐이지요.”
노년의 길잡이 코르빌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데 그 추측을 실마리 삼아 탐방을 해야 하는 게 우리인 거지.’
론을 비롯한 일행들은 잠시동안 코르빌이 말한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새겼다.
“흐응, 뭐 어찌 됐든 간에 일단 아우이스 부족이 아말렉 부족을 밀어낸 건 사실이고, 그만한 힘이 있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아가씨.”
“그럼 아우이스 부족은 대체 얼마나 셌길래 그 마법마저 부리는 아말렉 부족을 밀어버린 거지?”
“그것 때문에 제가 있는 거지요. 껄껄걸.”
“잉?”
라리사가 웬 생뚱맞은 대답이냐는 듯 길잡이 코르빌을 쳐다봤다. 뭐 아우이스 부족의 후손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이 입으로 튀어나오려 할 때 즈음.
“직접 가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우이스 부족에 대해.”
코르빌은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바로 파브렌 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
“헉, 허억, 헉···.”
론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모두 거칠게 숨을 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할아범, 후우. 할아범은 안 힘들어? 후우···.”
“껄껄걸, 아무리 노인네라지만 이걸 업으로 삼는 사람인데 체력은 기본이지요.”
“거참, 대단하네. 하아, 하아···.”
코르빌의 체력에 일행들은 감탄했다.
“다 와 갑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 말만 벌써 다섯 번은 들은 거 같습니다. 허어, 허억···.”
“이번엔 정말입니다. 저기, 저 능선이 정말 끝입니다.”
“진짜지? 하아···. 만약 끝이 아니면, 그때부터 할아범이 나 업고 가. 하아, 하아···.”
“껄껄걸, 좋습니다. 아가씨.”
라리사에 투정을 그대로 받아주는 걸 보면 정말 다 오긴 한 듯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산행.
열심히 운동하는 크루딘도 이틀가량 마차만 타다 산을 오르니 제대로 힘도 못 쓰고 빌빌댔는데, 함께 하는 일행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저 나이치고는 너무 건강한데···.’
여든 살까지 살았던 론이다. 나이가 찰수록 건강한 것과는 별개로 몸이 무거워진다. 그런데 지금 노년의 코르빌은 그 움직임이 아주 가벼웠다.
‘뭐 마나호흡법으로 몸을 단련하기라도 한 건가? 느껴지는 기운은 미약한데···.’
코르빌을 길잡이로 결정할 때, 론은 이미 그의 몸을 한 번 훑었었다. 마나를 운용하는 자라면 티가 나기에 확인하는 것은 기본이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말이다.
허나 그의 기운은 미약했다.
정령사의 찬가와 같이 특수한 마나호흡법을 익힌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기운이 풍겨와야 하는데 그는 아니었다. 일반인보다는 살짝 많은 정도.
“코르빌. 혹시 마나호흡법이라도 익혔습니까? 어떻게 그 나이에···.”
“마나호흡이 아니라, 40년 넘도록 매일 산을 오르니 절로 이렇게 되더군요. 껄껄걸. 오, 드디어 보이는군요. 앞을 보십시오!”
“예?”
언제 능선까지 다 오른 건지 눈앞에는 더 이상 산비탈이 보이지 않았다. 나무가 좀 가리긴 했지만 분명 저 앞에는 푸른 하늘과 평지가 보였다. 그리고 언뜻언뜻 보이는 건물들의 잔해도.
“와아···.”
“캬아, 드디어 등산 끝이구만!”
파브렌 고원의 공중 도시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일행들은 산길을 완전히 벗어나 고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고대 도시라 하면, 그 잔해만을 훑어보는 게 대부분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건물의 형태가 훤히 보였다.
“와···. 미친 거 아냐? 진짜 석조 건물인데?”
“그, 그러게요···.”
오랜 과거에 석조 건축법이 발달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돌을 이 높은 고지대까지 나른 아우이스 부족은 더 말이 안 됐다.
당장 2시간에 걸쳐 이곳에 오른 그들도 힘들어 죽겠는데, 오래전 아우이스 부족은 맨몸도 아니고, 저 많은 돌들을 가지고 날랐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장 보이는 건물에 박힌 돌의 한쪽 길이만 해도 1미터가 넘었다.
“허, 어떻게 이런 게 여기 있는 거야?”
“뭐 거인의 후예라도 되는 건가···.”
평지라 해도 감탄할만한 광경이 높디높은 산 정상에 펼쳐지고 있었다. 일행들의 입이 다물 새가 없었다.
“껄껄걸, 아직 도시의 초입일 뿐입니다. 더 재밌는 것은 안에 있습니다. 들어가 보시지요.”
수십 년 길잡이를 해 온 코르빌이 능숙하게 일행을 이끌었다.
그렇게 들어간 파브렌 고원.
고원의 도시는 마치 계획 도시마냥 생활권이 나뉘어 있었다. 평민들이 사는 곳과 귀족들이 사는 곳 그리고 상업지까지. 코르빌이 건물의 규모나 정교함 등을 짚어가며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런 고지대에 자리 잡은 농경지였다. 계단식 농경지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은 주위로 산봉우리와 푸른 하늘이 보이는 고지대였다.
론 일행뿐 아니라, 주위에 있던 관람객들도 연신 감탄을 쏟아내기 바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음? 무슨 일 있습니까? 아가씨.”
초반에 사티넬이 자신도 평민이라며 말을 놓으라 얘기했지만, 고객에게 어찌 그러냐며 존칭을 고집하던 코르빌이 걱정하듯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땅에서 느껴지는 이거··· 저만 느껴지나요?”
“땅?”
“뭐가 있어, 땅에?”
기감이라면 일행 중 누구보다 앞선다고 생각한 론이었는데, 사티넬의 의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마치 의문의 알 때처럼.
“땅에서 뭐가 느껴집니까, 사티넬?”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뻗어진 줄기, 영맥은 아니고···. 마나보다 더 실체적인 것···.”
사티넬이 눈까지 감아가며 그 무언가를 잡아내려 했다.
“무, 물?”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눈을 뜨고는 어디론가 움직였다.
그런 그녀가 다다른 곳.
졸졸졸.
“설마 지하수를 느끼시는 겁니까?!”
안 그래도 설명하려 했던 것인데, 사티넬이 이를 듣기도 전에 알아차리니 그로서는 놀라 눈이 부릅떠졌다.
“허···. 아들렌 아카데미 분들은 과연 다르긴 한가 보군요. 40년 가이드를 하며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할아범. 사티넬이 유별난 거야. 난 몰랐다고···. 진짜 다들 괴물인가···.”
안 그래도 일행 중 두 사람이 골든스태프 본선에 진출할 정도의 실력자인데, 거기에 사티넬까지 엄청난 기감 능력을 드러내니 크루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신기하네. 사티넬, 막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일행뿐 아니라 근처에 있던 이들도 갑자기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냥 좀···. 소리가 좀 들렸던 거 같아요. 하, 하하···.”
우연이었다는 듯이 대충 넘어가려는 사티넬. 하지만 론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말하기 곤란한 건가···.’
허나 의문은 길게 가지 못했다. 코르빌이 마침 잘 왔다는 듯이 아우이스 부족의 월등한 수로 기술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아우이스 부족이 고지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수로 기술 때문이었습니다. 오염을 막기 위해 지하에 감춘 수로들이 고원 전역에 뻗어있죠. 지금이야 오래돼 대부분 막혔지만, 고원을 둘러보면 상당히 많은 곳에 수로 흔적이 있습니다. 식수와 농수로 쓰기에 더없이 탁월한 방법이었죠.”
‘식수와 농수···.’
잠자코 설명을 듣던 사티넬의 미간 사이에 주름이 생겼다. 한 번 집중해서 감지하고 나니, 이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발밑의 그 기운이 선연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물망처럼 고원 전역에 뻗친 수로.
그녀가 느끼기에는 단순히 식수와 농수 이외에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최단 거리로 짜인 수로가 아냐. 마치 무언가를 그린 듯한···.’
그랬다.
지하 수로는 그 물줄기가 직선이 아니었다.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휘어있는 건 물론이고 돌고 도는 형상. 마치 어떤 형상을 의도하고 그려놓은 듯했다.
‘설마 이게···. 마법진이라고?!’
사티넬의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