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2
딱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분명한 인과관계에서 일어난다면, 왜 ‘운’이란 단어가 있는 것이고, 또 억울한 자는 왜 있겠는가.
이해하지 못 할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게 현실이고 삶이다.
“잠깐!!”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는,
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그가 끼어들었으니까 말이다.
‘뭐야?’
이 구역 패거리의 우두머리 파커는 눈살을 찌푸렸다. 웬 애새끼가 자신들의 행동에 제동을 건 것이다.
하지만 차오르는 분노도 잠시,
빠르게 론의 외관을 위아래로 훑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복식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자도 나이는 어렸으나, 그 외모나 복장에서 귀티가 절절 흘렀다.
그렇다. 귀족인 것이다.
이곳이 아무리 국왕 직할령의 수도라지만,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간극은 엄연히 존재했다. 감히 반항할 수도, 대항할 수도 없는 존재들.
결국 패거리들의 우두머리 파커는 눈을 깔았다.
“귀, 귀한 분께서 어쩐 일이신지요?”
“어쩐 일? 감히 이 대낮부터 악행을 저질러 놓고선 그게 정녕 할 말이더냐?!”
“옛, 예?!”
론이 있는 힘껏 소리치자 듣고 있던 파커 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던 패거리들도 순간 움찔거렸다. 귀족들 특유의 권위, 그 무형의 압박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이 신성한 수도 땅이 네놈들의 놀이터냐?”
“아, 아닙니다.”
“그러면 저기 저 사람이 네놈들의 노예냐?”
“아닙니다···.”
“하! 그럼 대체 네놈들이 뭔데?”
“그··· 이 근방을 관리하는···.”
“관리? 이게 곱게 말해주니까 아주 내가 우습구나?”
“예?! 아니, 아닙니다!”
평민과 귀족의 경계는 확실하다.
가뜩이나 론은 회귀 전 80년 평생을 그 애매한 사이에서 살아왔다.
바로 귀족가 서출.
평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당하게 귀족이라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 어디에도 끼지 못했기에 누구보다 눈치를 봐야 했고, 누구보다 애써 제 위치를 지켜내야 했던 게 바로 그였다.
‘때로는 이렇게 계급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나쁘지 않군.’
정수리가 훤히 보이도록 허리를 푹 숙인 깡패들을 보며 론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껏 활동 무대가 아카데미에만 국한돼서 그렇지, 그곳을 벗어나면 계급이라는 것을 꽤 쓸 데가 많았다.
“죄송합니다! 나으리!!”
“죄송합니다!”
파커를 필두로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복창했다.
깔끔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걸 보고는 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의 치안을 관리하고 돌보는 건 네놈들이 하는 게 아니야. 경비대가 하는 거지. 괜한 소란 피울 생각 말고, 얌전히 지내라. 또 발견되면, 다음은 없다.”
“예, 나으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턱을 빳빳이 내민 채 거만히 쳐다보자 깡패들은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씨발. 길보트 그 새끼 때문에 이게 뭐야, 하···. 애들 앞에서 체면 빠지게. 쯧!’
파커의 표정이 콱 구겨졌다.
아무리 깡패라지만 이렇게 별 이유도 없이 행인을 잡고 겁박을 하는 건 그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 수도 경비대의 4소대장이 찾아왔었다.
‘수상한 놈이다. 허름한 갈색 로브에 끈 샌들을 신었으니 보이면 반드시 잡아!’
‘잡으라면 잡을 것이지 뭘 그렇게 말이 많아, 이새끼야.’
‘뭐 보수? 하! 이 새끼가 예전에 같이 어울려 준 적 있다고 아직도 누굴 친구로 아나, 미쳤어?’
‘이 바닥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잔말 말고 움직여!’
똑같이 고아 출신이었건만 하나는 뒷골목의 건달이 되었고, 하나는 경비대의 간부가 되었다. 다른 곳도 아닌 수도 경비대 말이다.
때문에 파커는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그 끝이 결국 이 모양이었다.
축 처진 어깨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론이 말했다.
“대충 사태 진압은 됐고.”
사실 이제껏 권위 한 번 부리지 않던 론이 이렇게 큰소리치며 상황을 진압한 건 마냥 충동에 의한 게 아니었다.
저 사내를 처음 봤을 때부터 들던 묘한 느낌.
가뜩이나 론은 라리사와 마법 수련을 하면서 마법에 대한 이해도는 물론이고, 마법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식과 깨달음 또한 상당히 깊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이전이라면 지나칠 만한 것도 이제는 그의 감각 아래 잡혔다.
크리소더 경매사에서의 한 번은 우연이었다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봤는데도 묘한 감각을 자극하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럼 뭐 저게 정말 신수의 알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까 경매사에서 저 사내가 했던 말.
참고로 신수는 돌연변이다.
아직 부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알인 상태에서 무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 사내는 저런 말을 했던 걸까.
그 의문이 론을 여기까지 이끌었다.
남은 건 이제 직접 확인하는 것뿐.
그렇게 방해꾼들도 몰아냈겠다 론이 어떻게 첫 대화를 열까 고민하는데, 눈앞의 사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으리.”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옛, 예?!”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던 사내 아이언스가 당황했다. 이제껏 깡패들을 하대하며 권위를 드러내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깍듯이 예의를 차린 말투가 너무 대조됐기 때문이다.
꿀꺽.
긴장한 아이언스가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런 말이 있다.
나서기 좋아하고, 관심받기 좋아하는 어린 귀족들이 간혹 평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장난을 친다는.
‘젠장! 돈 좀 있는 귀족한테 팔아보겠다고 수도까지 왔다가 이게 뭔 고생이야. 하아···.’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언스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려는 찰나,
론이 말했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가끔은 권위로써 대해야 할 자들도 있는 거니까요. 괘념치 마십시오. 제가 항상 그러는 건 아닙니다.”
“아! 그, 그러시군요. 나으리의 깊은 생각과 배려에 다시 한번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 예. 그나저나 다친 데는 없습니까?”
“예예, 덕분에 멀쩡합니다요. 감사합니다, 나으리.”
“다행입니다.”
그러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게 전부다.
‘허···. 정말 저런 귀족이 있다고? 저런 사람이 영주가 되고, 왕이 돼야 하는데···.’
어디 풍문 혹은 연극에서나 볼법한 인자한 귀족의 모습에 아이언스는 속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왜냐면 지금 그는 수년간 지낸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도망치는 신세였다.
‘어리긴 해도 대화는 좀 될 거 같은데, 한번 말이라도 해볼까?’
아이언스가 그러면서 시선을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로 떨궜다. 그가 경매사에다 팔려 했던 알이다.
그레고리 고국 서부의 마셔스 수림.
말이 수림이지 험한 늪지대라 인접국은 물론이고, 고국까지 내놓다시피 한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 아이언스는 살았다.
고아인 자신을 거둬준 양아버지는 마셔스 수림의 길잡이였다. 수림, 아니 이 늪지대가 버려진 땅이라고는 하나 그 험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연구차 방문하는 탐험가들이 꽤 있었기에 수림 입구에도 제법 마을이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던 아이언스의 양아버지는 어느 날, 알 수 없는 알을 하나 가져왔다. 그는 오랫동안 늪지 생태계를 접한 베테랑 길잡이였지만, 그 알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귀한 생명체일지 모르니 잘 맡아보라고 했었는데, 어느 순간 그도 길잡이로 투입되면서 그 알은 잊혀졌다.
그러다 이를 다시 발견했을 땐 이미 수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신기하게도 알은 썩지 않았다. 보통의 알은 아무리 길어도 몇 달 지나면 부패하고 형체가 일그러지기 마련인데 이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8년.
지병이 있던 양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자신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마을 대표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돌아온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되짚어지고, 부서지고, 파헤쳐진 집안.
뭔가 궁금한 게 있었다면, 기다렸다가 물어보면 될 것을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거기서 아이언스가 추측한 답은 그리 좋은 게 아니었다.
결국 그는 돈이 될만한 것들을 챙겨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이 알이었고.
그런데 정말로 그는 이 고국으로 오면서 수상한 사람들을 적잖이 마주쳤다. 이상한 행인에 용병, 그리고 오늘은 경비병들까지 자신을 쫓았었다.
‘늪지대에서 길잡이만 하던 나한테 왜···.’
“하아···.”
갑자기 세상 처량해진 자신의 신세에 아이언스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 어디 안 좋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 자신을 걱정하는 론의 말에 아이언스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어떻게 이 사람한테 알 좀 사달라 해봐?’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수도 땅도 더 있을 곳은 못 됐다. 알을 팔고 받은 돈으로 서둘러 멀리 뜨는 게 좋았다. 그렇게 어떻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는 사이,
론도 고민에 빠졌다.
심지어 둘은 같은 고민이었다.
‘아···. 뭐라 말하지.’
지금도 느껴지는 묘한 감각.
론은 눈앞의 사내가 아까 말했던 알 때문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래에서 먼저 요구하고, 부탁하는 쪽이 지는 거다.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제 발로 걷어차는 것이었기에 론은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팔려는 자와 사려는 자.
커다란 이해관계는 합치했지만, 조금의 이득을 더 보고자 둘 사이에는 애매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데 이윽고 그런 긴장을 끊은 것은 론도 아이언스도 아니었다.
“저···. 그런데 아까 크리소더 경매사에서 그···. 알을 팔려고 하셨던 분 아니세요?”
“?!”
“예?! 아, 예예. 맞습니다. 아가씨도 거기 계셨었군요!”
‘뭐지? 아까 좀 정신없긴 했는데, 거기 있던 사람인가? 경매사를 방문했다라···. 그럼 돈은 확실히 있는 귀족 같은데···.’
그 짧은 순간에 계산하는 아이언스.
그리고 이를 보는 론은 당황했다.
‘아니, 사티넬 왜 갑자기···.’
그녀가 먼저 물꼬를 트는 바람에 론이 끼어들어 주도권을 잡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런데 사티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알, 혹시 볼 수 있을까요?”
“아, 예예. 당연하지요. 아가씨.”
아이언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한 번 열어 보십시오.”
그리고 딸칵 소리와 함께 열린 상자 안에는 과연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그 본체, 알이 있었다.
‘확실히 저 알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문제는 이제 어떻게 말하고 사냐는 건데···.’
그냥 웃돈을 주고서라도 살까 론이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도 사티넬이 물었다.
“이게 신수의 알이라고요?”
“예예, 그렇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어릴 적 마셔스 수림에서 주워 오신 알인데, 지금까지 썩지도 않고 보존되어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으음···.”
수년간 썩지 않는 알.
분명 희귀하긴 했다.
때문에 옆에서 듣던 론의 고개도 절로 끄덕여졌다.
“그런데요, 이거 생물의 알이 맞긴 하나요?”
“예?”
론도 아이언스도 전혀 생각지 못한 사티넬의 질문에 두 사람이 벙찌어 버렸다.
“얘기하신 대로 수년간 그대로인 생명의 알이면 정말 신기한 건 맞지만, 이게 생명체의 알이란 것부터 확인하셨나요?”
“어···. 그건···.”
상당히 원초적인 접근이었다.
헌데 아이언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인지도 모르는데 알이다. 그런데 거기에 신수라는 증거도 어디 없는데, 신수의 알이다···.”
“······”
사티넬이 일련의 대화를 덤덤히 정리했을 뿐인데, 아이언스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진다.
‘뭐야, 사티넬. 일부러 이러는 거야?’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느새 주도권을 빼앗아버렸다.
“뭐 그래도 장식용으로 나쁘지 않을 거 같네요.”
“자, 장식용이요?”
“네, 얘기하신 대로 수년째 썩지 않으니 그럭저럭 괜찮을 거 같네요. 얼마 팔려고 했어요?”
꿀꺽.
아이언스가 조용히 침을 삼켰다.
솔직히 휘황찬란한 크리소더 경매사 건물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수십에서 수백 골드에는 받고 팔려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번 퇴짜를 맞고, 지금 여기서는 눈앞의 귀족 소녀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니 과연 생물의 알인지부터 의심스러워졌다.
‘정말···. 그냥 이상한 장식용 돌인가···.’
가뜩이나 그는 쫓기는 몸.
아이언스의 머리에서는 정상적인 사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시, 십 골드!”
“예?”
“아, 아니 5골드입니다!”
“5골드요?”
아이언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초조하니 가격을 두고 밀당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필할 만한 장점도 이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내려서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사티넬이 말했다.
“3골드로 안될까요?”
“사, 삼 골드요? 너무 싸게 드리는 거 같은데···.”
“제가 3골드 밖에 없어서요.”
“예? 크흠···. 조, 좋습니다! 가져가십시오!”
“감사해요! 그럼 잠시만요.”
사티넬이 주섬주섬 허리에 차고 있던 셔틀레인(Chatelaine ; 벨트라인에 거는 조그만 여성용 가방)을 뒤적이더니 정말 금화 세 닢을 꺼냈다.
일전에 브뤼센 영지에서 마탑 마법사와 몬스터 토벌로 벌어뒀던 돈이다.
“어···. 그런데 이게 어디 금홥니까?”
“아, 아들렌 금화에요. 혹시 안되나요?”
“예···. 제가 지금 급해서 타국 금화 환전까지는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아···.”
서로가 시무룩해 하는 상황.
그때 론이 나섰다.
“제가 바꿔드리죠.”
고국 금화라면 그에게 있었다. 고국 환율이 더 높긴 했지만, 그 정도쯤은 사티넬에게 배려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상황은 저질러졌기에 무르고 다시 론이 가격 협상하기에도 애매한 시점이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사티넬이 가격 후려치기도 잘했고 말이다.
그렇게 값을 지불하자 아이언스는 알이 담긴 상자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금방 사라졌다.
그가 갔는지도 모른 채 알만 쳐다보는 사티넬.
“그런데 사티넬. 당신에게 3골드면 상당한 거금일 텐데, 왜 굳이 그런 거금을 들여서까지 이 알을 사려 했던 겁니까?”
솔직히 사티넬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사려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알을 사버렸고 그랬기에 더 궁금했다. 그녀도 뭔가를 느낀 걸까.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서요.”
여전히 시선을 알에 고정한 채 사티넬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