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70
처음, 시작, 출발.
미지의 영역에 내딛는 첫걸음에는 항상 설렘이 있기 마련이다.
“오오!! 여기가 동방의 끝이라 이거지?!”
“냄새부터 확실히 다르네요!”
“그러게. 확실히 바다 옆이라 그런지 다르긴 하네.”
킁킁거리며 요란하게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쉴새 없이 살펴보기도 하고, 차분히 이국적 풍경을 눈에 담아보기도 한다.
그 생동감, 그 풋풋함에 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레고리 고국.
오랜 역사와 더불어 해양 인접국답게 내륙국 아들렌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물론 론은 이곳이 처음은 아니다.
회귀 전 그는 이 고국의 역사성이 궁금해 한 번 찾아왔던 적이 있었더랬다.
흥망성쇠.
모든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의 집단마저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수많은 나라가 세워져 흥하고, 사라지고 하는 게 자연스러운 역사이건만, 그레고리 왕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는 그레고리 왕조와 그 자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자부심이고 자랑이다.
하지만 론은 이를 두고 생각했다.
그 어떤 다른 고상한 이유보다 처세술이 가장 큰 이유이지 않았을까 하고.
약 1,900여 년의 왕조.
아틀란샤 대륙에는 다시 없을 오랜 왕조임은 분명하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경외하기도 하고, 혹자는 시기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간에 이를 마주하는 첫 감정이 감탄이었다는 사실에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레고리 왕국은 어느 순간부터 명분과 역사를 호소하며 중립국으로서 그 위치를 지켜왔다.
‘뭐 그렇다 해도 천년을 넘어 이천년을 바라볼 정도면 대단한 건 사실이지.’
다시 생각해도 특별한 역사에 론은 일행들 못지않게 감상에 젖어 주변을 훑었다. 아직 어디를 방문한 것도 아니고, 그저 워프게이트 관리소를 나온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볼 것은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이내 곧 익숙한 복장의 사내 둘이 다가왔다.
‘왔군.’
은색 태양 문양이 돋보이는 남색 복식.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사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들렌 본점에서 얘기는 잘 전달 받았습니다. 한 달가량 여행차 방문하셨다고요.”
“예, 맞습니다.”
뒤에서 오오 하는 일행들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론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하다. 말로만 듣던 셀럽 등급의 혜택을 받아보는 순간이었기에.
“여행에 도움이 될 현지 가이드도 대기하고 있으니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바로 숙소로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그럼 마차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짐은 저희에게 주십시오.”
두 직원이 일행들의 짐을 양손에 쥐고는 수많은 마차가 늘어선 곳으로 인도했다.
“와아···. 이 사두마차가 우리가 탈 거라고? 우리 가문 가주 전용 마차보다도 훨씬 고급스러운데? 허!”
크루딘의 말대로 수많은 마차 가운데 제일 고급스럽고 커다란 마차에 그들의 짐이 실리고 있었다.
“흐응, 나쁘진 않네.”
“살면서 이런 대접을 받아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론님, 정말 감사해요.”
“다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어서 오르죠.”
“네!”
사실 그레고리 고국에 올 때 동선을 놓고 꽤나 고민했었다. 땅의 성수와 고국이 교집합을 이루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바로 이콰타 폭포.
그런데 그 이콰타 폭포수가 정말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악을 멸하고, 부족을 통합시키던 그런 영험한 물이었다면 아마 난리가 났었을 것이다. 고국은커녕 수많은 국가가 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을 게 뻔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수백 수천 년에 이르도록 수많은 연구가 또는 마법사들이 확인했지만, 그저 일반 폭포수와는 다를 게 없었다. 즉, 특별한 무언가 혹은 그 너머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바로 거기서 론은 착안했다.
이 이콰타 폭포와 관련된 고대 부족과 신화의 고적을 찾아보기로.
“론, 그런데 너가 찾고 싶다는 그 땅의 성수인가 뭔가 하는 거, 정말 지금까지 그 잔재가 남아있을까?”
상념에 잠긴 론을 크루딘이 깨웠다.
“있으면 있는 대로 좋은 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깨닫는 바가 있겠지요.”
딱히 동행하는 이들에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탐방 기간은 약 한 달.
관련 장소만 하더라도 십여 곳 정도가 되지만, 시일이 다 차도록 못 찾는다면 일행을 보내고서라도 론을 홀로 찾을 생각이었다.
회귀 전 고대 괴수 히드라는 분명 그레고리 고국을 면전에 두고 물러났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지.’
론의 눈에서 빛이 났다.
“거기 셀럽 나으리, 그렇게 설렁설렁 말하는 것 치고는 눈에 너무 힘이 들어갔는데? 어디 뭐 국왕 폐하의 밀명이라도 받으셨어요?”
“...”
등받이 쿠션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은 라리사가 말했다.
졸업 시험이나 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때도 그랬지만, 감이 좋은 그녀다. 그 때문인지 저 느긋한 태도도 괜히 론을 긴장케 했다. 어찌 보면 가장 의외성이 높은 사람이다.
참고로 얼마 전 흑석 목걸이에 관해 물어봤을 때, 론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정말 당황했었다.
‘그 목걸이? 당연히 느낌이 불쾌했지. 근데, 뭐라 그래야 하나···. 직감? 느낌? 같은 게 왠지 그걸 차면 뭔가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더라고.’
불쾌하고 이상한 것임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일부러 그 목걸이를 차고 최종 선발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를 통해 다시 없을 우연을 일으켰었다. 깨달음의 편린이 일으킨 적란운과 그 벼락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그녀였기에 론은 내심 찔렸다. 일행에게 밝히지 않은 바가 있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크흠, 그냥 기대돼서 그런 겁니다.”
“호오? 아들렌 아카데미의 유례 없는 천재가 기대되는 거라···.”
“그러게요. 론님, 평소 같지 않게 표정이 결연하시긴 하네요.”
“풉! 역시 지 남자친구 아니랄까 봐, 역시 표정까지 놓치지 않으시네요?”
“어, 언니이! 언니도 그래놓고 저한테만 그래요!”
제법 친해졌는지 어느새 언니 동생 사이가 된 둘.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론은 그저 그녀가 사티넬을 더 마음 놓고 놀리기 위해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이번 여정은 쉽지 않겠군···.’
**
이윽고 도착한 고급 숙소.
남자들 방으로 일행들이 모두 모였다.
수도의 전경이 훤히 보이는 창을 등지고 론이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다들 그레고리 고국은 처음이고 하니, 내일까지는 자유롭게 수도를 구경하는 거로 하죠. 아까 마차에서 받은 안내지에서 구경할 곳은 대충 골라 봤습니까? 여기서 동선을 짜고 나가죠.”
“흐응···. 뭐 대충 보긴 했는데···.”
라리사가 따로 할 말이 있는 건지 말을 끈다.
“보긴 했는데요?”
“이왕이면 달달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끼리 가면 좋잖아?”
“예?”
“꼬맹아, 우리는 우리끼리 가자. 저 두 사람은 데이트하게 두고.”
“아 데이트면 인정이지, 큭큭큭. 근데 방금 나한테 꼬맹이라 한 거야, 설마? 허 참!”
“잔말 말고 빨리 나오기나 해. 이 눈치 없는 것아. 대체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떻게 살려고. 쯧!”
“칫, 알았다고. 어이, 론. 사티넬. 둘이 그럼 오붓한 시간 보내라! 하하하하!”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론과 사티넬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크루딘은 나갈 채비를 했다.
“아, 그리고 사티넬. 기집애야, 넌 그 액세서리 챙겨와서 가방에 처박아 둘 거면 왜 가지고 왔어? 하여튼 이 언니가 하나하나 말해줘야겠니?”
“그런 거 아니라고요! 진짜아···.”
미리 짜기라도 한 건지 두 사람이 떠나가고, 방에는 론과 사티넬만이 남았다.
‘안 그래도 둘이 있으면 민망한데 저것들이···.’
팔십세 노인과 십 대 소녀!
론의 마음속에서는 묘한 배덕감과 죄책감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
“...”
먹먹한 정적 가운데,
다행히도 얼마 전 사티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사티넬 그 준비한 액세서리 차고 오면서 말입니다.”
“네?!”
사티넬이 화들짝 놀랐다.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는데 론마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자연스럽게 말한다는 게 너무 생각 없이 말했나···.’
“크흠, 흠. 그러니까 제가 막 보고 싶다기보단 사티넬이 준비했다고 하니···.”
“아니, 아···. 네, 네···.”
점점 더 붉어지는 그녀의 얼굴이 신경 쓰였지만, 론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아무튼 그리고 전에 말했던 포션 말입니다. 이렇게 된 거 지금 같이 등록하러 가는 거 어떻습니까?”
“아, 그 경매요?! 네네, 좋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티넬이 후다닥 그녀의 방으로 갔다.
학기 중 트리마이어 은행 직원 모라프가 찾아왔을 때, 주고 갔던 셀럽 등급 안내서. 거기에는 제법 재밌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크리소더 경매 참여권.
세계 각국의 도시에는 부호들의 허영심을 채워줄 경매가 정기적으로 열리곤 하는데, 그런 수많은 경매사 중 단연 최고로 뽑히는 양대 산맥이 있다. 바로 샤허드 제국의 코즈야크 경매사와 그레고리 고국의 크리소더 경매사.
이 두 곳은 다른 경매사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와 그 오랜 역사로 인해 수많은 출품자가 제 발로 찾아오곤 했는데, 그 덕분에 웬만한 신분으로는 해당 경매를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곳 중 한 군데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 것이다. 때마침 고국 탐방 일정도 있었기에 론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 모라프님, 일전에 주신 안내서의 크리소더 경매 말입니다. 2분기 말에 열리는 경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출품하고 싶은 물건도 있는데···. 』
단순 신청에 그치지 않고, 사티넬의 벨데레르 유적 포션까지 출품한다고 하니 승인이 안 나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회귀 전에는 못 가봤지만, 그래도 이번 생에는 한 번 가봐야지. 암.’
숙소 앞에 먼저 나온 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곧 사티넬이 조그마한 상자를 안고 숙소 건물의 문을 나서는 게 보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을 묶은 남색 실크 헤어밴드, 짙은 청색 보석이 포인트인 귀걸이, 남색 바탕에 베이지색 무늬가 가득한 드레스.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 오는 향수까지.
‘허허···. 이러면 안 되거늘.’
고급스럽긴 해도 아무래도 실용성에 안배를 둔 교복만 보다가 이렇게 화사한 복장을 보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괜히 론의 얼굴이 상기됐다.
“커흠, 흠. 그럼 가시죠.”
“네!”
크리소더 경매사가 명소긴 명소인지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때문에 론과 사티넬은 서로 민망해할 틈도 없이 창밖 구경 삼매경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구후우우웅.
마차 안에 있던 론마저 느낄 정도의 거대한 마나의 유동이 근처에서 느껴져 왔다. 그 인위적인 흐름으로 보건대 분명 누군가의 마법임에 틀림이 없었다.
‘도시 한 복판에서?’
해당 마법진을 본 게 아니었기에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묘한 기시감에 론이 마부석 쪽 창을 열었다.
“잠깐 멈추···.”
콰아아앙!!
“꺄아아아악!!”
“아이구! 도망쳐!!”
“무너진다!!”
“으아아악!”
아쉽게도 론이 느낀 기시감보다 그 알 수 없는 마법의 발현이 훨씬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