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69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아들렌 왕국에 관해 물으면 대부분은 말한다.
마도왕국 혹은 명문 아카데미가 있는 곳 아니냐고.
열에 아홉이 그럴 것이다.
그만큼 아들렌이 마법으로 유명한 마법 선도국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은행’이라는 조직이 등장한 지는 고작 이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고리대금업 혹은 금고업에 지나지 않았던 그들. 그런데 어느샌가 규와 모를 갖추더니 국가를 초월하는 초국적조직이 되어버렸다.
그 시초는 이백 년 전 대금업자로 유명하던 트리마이어 바옐이다. 마법 열풍이라는 시대의 흐름 앞에서 그는 과감히 도전했다. 끊임없이 발전하고 보급되는 마법들을 자신의 사업과 결부시킨 것이다.
잠금 및 봉인 마법으로 금고는 더없이 안전해졌고, 개인 고유의 마나 식별기는 고객 관리 및 유치에 더없이 체계적인 틀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마법인장은 또 어떠했는가? 거래 및 계약의 투명성은 물론이고 뛰어난 활용성의 지폐마저 만들었다.
말 그대로 금융혁명이었다.
트리마이어는 이를 계기로 천박한 고리대금업자의 틀을 부수고, 새롭게 조직을 구성했다. 예금과 수표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각종 금융 상품과 금전 융통으로 이전과는 아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났다.
은행의 시초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선두주자답게 트리마이어 은행은 세계 각국에 지점을 세우며 국제은행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야야, 저 남색 복식에 은색 태양 문양.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사람 아냐?”
“맞네. 그런데 아카데미에는 어쩐 일이지?”
“와아···. 보유 자산만 해도 천만 골드가 넘는다던데, 확실히 복장부터가 고급지긴 하다. 트리마이어.”
“오죽 돈이 넘치면 상위 직급들은 전부 돈 주고 단승 작위까지 맞춰준대.”
마법 성취에 따라 작위를 베푸는 마도왕국 아들렌과는 또 다른 느낌의 초국적조직이였다.
“근데··· 왜 저 사람들 저기로 가냐? 저기는 그냥 1학년 수업···.”
“저거 론 스펜서 아냐?”
“론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스펜서 영지는 그냥 변방 촌구석인데···.”
“혹시 그 시골 영지에 빚이 터진 거 아냐? 그래서 저 사람들은 독촉하러 온 거고.”
“오오, 야 그러면 좀 공평하네, 큭큭. 열여섯에 저렇게 잘났으면, 가문은 좀 빚더미에 앉고 그래야지. 암 그래야 공평하지.”
학생들의 수군거림 속에 은행 직원들과 론 일행 결국 마주했다.
“반갑습니다.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셀럽 담당관 모라프 세딘입니다. 론 스펜서님 맞으십니까?”
“예?”
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셀···럽?”
그리고 크루딘이 의아하단 듯이 중얼거렸다. 뿐만 아니라 사티넬도, 지나가던 학생들도 모두 론을 쳐다봤고.
분명 들은 것이다.
셀럽이라는 말을.
은행 내 최상위 등급의 고객. 참고로 이 말을 모르는 이들은 여기서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의 무게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론은 당황해서 말이 안 나왔다.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포션 사업으로 인한 수익이 전부 트리마이어 계좌로 들어왔다는 점.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빨랐다.
더군다나 다른 은행도 아닌 트리마이어인데, 셀럽 등급을 단번에 결정한다는 건 회귀 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정말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론 스펜서님. 아, 그리고 골든스태프 대회 본선 진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본선 때도 응원하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은행권 사람 아니랄까 봐 역시나 정보에 빠삭했다. 거리의 음유시인들이 돈을 받고 이야기와 노래를 판다면, 이들은 돈을 주고 최근 이슈들을 사들인다. 돈 많은 고객과 투자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셀럽 등급으로 편성되셔서 안내차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명문 아카데미라 그런지 부지가 넓어 찾는데 제법 애 좀 썼습니다.”
그러면서 모라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옆에 좋은 벤치가 있던데 잠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됐든 일단은 확인하는 게 맞았다. 론은 고개를 돌려 일행들에게 말했다.
“얘기 좀 하고 가겠습니다. 먼저 식사하십시오.”
“어? 어어, 그래. 알았어···.”
“네, 먼저 가 있을게요.”
두 사람이 물러나고, 론은 모라프라는 중년인과 건물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먼저는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은행장님의 특별 지시로 론님은 검토 없이 바로 셀럽 등급으로 배정되셔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은행장님이요?”
지점장도 아닌 은행장이란다.
보유 자산만 천만 골드가 넘고, 일정 직급 이상의 인사들에게는 전부 작위까지 사서 배부하는 초국적조직의 우두머리. 즉 트리마이어 국제은행의 은행장이 직접 지명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예, 맞습니다. 뭐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올해 출시한 스펜서 포션이 아들렌 왕실에 독점 납품하게 됐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실 이름으로 발행된 수표 중 상당수가 론님의 계좌에 들어가더군요.”
“크흠, 흠.”
핵심을 찌르는 말에 론이 헛기침했다. 잘 나가는 은행이 무서운 이유. 금전의 흐름을 꿰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들은 크고 작은 사업의 향방은 물론이고, 국가의 정책마저도 예측하려 했다.
“내부 사정까지는 자세히 모르나, 론님께서 해당 포션 사업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유례없는 골든스태프 대회 본선 진출 등. 은행장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론님을 셀럽 등급으로 즉시 배정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쉽게 말해 ‘가능성’을 본 것이죠.”
모라프가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잡으며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그···렇군요.”
호감을 갖고 봐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그 호감을 가졌다는 사람이 거대 조직의 대표라 신기할 뿐이었다.
‘전생에는 부양하는 가족도 없이 홀로 돈을 모았는데도 셀럽하고는 전혀 연이 없었는데, 이번 생은 아직 성인도 안 됐는데 이렇게 되는구나. 참···.’
론이 감회에 젖어 조용히 있자 모라프는 당황했다고 여긴 건지 이어서 말했다.
“셀럽 등급이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 볼 건 전혀 없습니다. 오늘은 그 등급의 혜택만 전해드리고 가보겠습니다.”
모라프는 셀럽 등급 안내서를 건네면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매월 붙는 이자 수익과 더불어 매주 혹은 매일 이자가 붙는 금융 상품 대한 홍보. 물론 이에는 예금 유동에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해외여행 시 귀빈 전용 숙소 및 영주성 귀빈 대접실 제공, 유명 브랜드 명품관 신상 할인권, 국제 신문 번역본 매주 송부 등 아주 다양했다.
“상당하군요.”
허나 돈에 관련된 것이었기에 하나도 빼먹지 않고 똑똑히 들었다.
긴 설명이었다.
여러 혜택과 광고를 곁들였는데, 결론은 하나였다. 은행에 돈을 맡기라는 것. 안전하게 관리하든 불려주든 할 테니 믿고 맡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론은 다 쓸 데가 있어 사업을 벌인 것이었기에 금융 상품에 관한 것은 제하고, 필요한 것만 들었다.
‘저 해외 숙박권은 괜찮군.’
안 그래도 일행들과 그레고리 고국에 가기로 했었는데, 제법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듯했다.
“그럼 혹시 궁금하신 사항 있으실까요?”
모라프는 설명도 마쳤겠다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의 마법사라 해도 돈에 대한 감각이 무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고작 십대.
심지어 올해 열여섯인 미성년자였다.
적당히 좋은 인상만 전달하고 가려던 그였는데, 론의 대답이 그를 멈춰 세웠다.
“마침 잘 됐군요. 이번 방학 때 그레고리 고국에 탐방 가려고 했었거든요.”
“예?”
“말씀하신 귀빈 전용 숙소, 2인실로 두 개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예치금 중 일부를 그레고리 고국 현지 주화로 환전하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저 학생으로만 여기던 모라프는 론의 명료한 요구사항에 순간 당황했다.
“숙소··· 말입니까?”
“예.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셀럽 등급의 혜택이라니. 벌써 기대되는군요.”
‘뭐지? 확실히 난 놈이라 이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십대가 아니었다.
커다란 돈에 휘둘리지도 않았고, 갑작스러운 상황과 정보에도 침착했다. 오히려 제 원하는 것만 정확히 요구하고 있었다.
모라프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더니 코트 안에서 간이 수첩과 펜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그레고리 고국 귀빈용 숙소, 2인실 두 개. 그리고 현지 주화로 환전. 환전 금액은 얼마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들렌 주화로 10골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들렌 주화 10골드, 그레고리 주화로 환전. 예, 알겠습니다. 날짜는 언제로 잡으시죠?”
“다음 달 중순으로 보고 있는데, 자세한 건 일행들과 결정되는 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않던 셀럽 등급의 혜택.
굴러 들어온 복덩어리에 론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모라프는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와 함께 명함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여행 일정이 확정되시면 연락해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절제된 인사법과 그 특유의 매너.
‘과연 국제은행이라 이건가.’
괜히 국제은행 국제은행 하는 게 아니라는 듯 행동들 하나하나에 기품이 어려있다.
그러면서 론은 건네받은 명함을 쳐다봤다.
『 셀럽 관리부 부장
모라프 세딘 (남작) 』
막대한 자산을 바탕으로 작위마저 사들여 배부하는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그 은행의 주요 인사도 론을 주시하고 있었다.
**
“셀럽···. 셀럽···.”
“···”
“셀럽···.”
“그만 좀 말하십시오.”
“허···. 론, 너 혹시 쌍둥이냐? 쌍둥이 맞지? 그치? 맞네, 맞아! 역시 그래야 말이 되지! 하하하!”
실성한 듯 웃어대는 크루딘.
그런 그를 보며 론은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뒤늦게 식당에 합류한 그는 간단하게 모라프와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했다. 가문 사업 지분과 더불어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을 좋게 봐줘서 그런 등급을 받았다는 식으로.
“론님은 뭐든 대단하시긴 하네요···.”
사티넬은 겨울 방학 때 론의 영지에 함께 있으며, 포션 사업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긴 했다. 하지만 그 반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흐응? 사티넬은 좋겠네?”
“저요?”
“그럼 너지. 남자친구라고 있는 게 최연소 골든스태프 본선 진출자에 국제은행 셀럽이기까지 하고. 어머~ 부럽다. 얘~”
“라, 라리사니임!”
어느새 수업을 마치고 따라붙은 라리사가 사티넬을 놀렸다. 그들을 보며 론이 말했다.
“그래도 뭐 덕분에 여정이 여러모로 편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게. 볼수록 신기하단 말야. 스펜서 영지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네가 특출난 건지···.”
“뭐, 제가 운이 좋은 거죠. 하하···.”
“그놈의 운은···.”
**
플라츠 일당의 소란,
왕실 간담회,
아카데미 대표 선발전,
플라츠 일당 아카데미 제명,
골든스태프 대회 본선 진출,
흑석 목걸이,
트리마이어 국제은행.
전부 2학기 동안 있었던 일들이었다. 하나같이 대충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론은 꿋꿋이 제 할 일을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마지막.
2학기의 필기시험만이 남았다.
“하···. 맨날 실기시험만 봤으면 좋았을 텐데···.”
지지난 주 실기시험에서 론 일행은 단번에 합격했다. 이미 3서클 마법까지 펼치는 그들이었기에 2서클 마법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식이 갖춰지지 않은 마법은 모래 위에 세운 건물이나 다름없어요. 그래도 갖출 건 갖춰야죠.”
“맞습니다. 강한 마법은 굳건한 지식에서 나오는 법이지요.”
사티넬과 론의 대꾸에 크루딘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둘을 쳐다봤다.
“······. 둘이 사귀냐?”
“아닙니다!”
“아니요!”
왠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 두 사람. 그런 둘을 보며 크루딘은 쯧쯧 혀를 찼다.
“에휴. 그래, 빨리 시험이나 치고 수도로 가자. 라리사 누님이 기다리신덴다.”
오랜 서열정리 끝에 라리사를 ‘누님’으로 인정한 크루딘이 그녀의 안부를 챙겼다. 역시 티격태격 하긴 해도 정이 든 게 틀림없다.
“예, 2학기도 어서 마무리 짓죠.”
마지막 필기시험.
그다음은 이제 그레고리 고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