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66
그런 말이 있다.
적을 속이기 전에 아군부터 속여라.
그 정도로 은밀해야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럼블이 물었다.
“뭔가 알고 있는 게냐? 내 70년 넘게 살면서 그런 기운은 처음 느껴 봤다. 묘하게 꺼림칙한 게 아주 위화감이 들더구나.”
럼블 아그네스 카운트.
7서클에 오른 대마도사로 당대의 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명문 아들렌 아카데미의 총장이다.
아군이라면 더없이 든든하겠지만,
정말 믿어도 되는 될까.
회귀 전 기억이 떠오른다.
유적관리단에 근무하면서 럼블의 모습은 의외로 꽤나 많이 봤었다.
아들렌이 마도왕국이란 이명을 가진 것답게 왕국에서 관리하는 유적 중에 등급이 높은 것은 대부분 마법 관련이었고, 해외에서 반입해 오는 유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마법사인 럼블도 이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그는 유적관리단에 꽤나 많이 들렸더랬다.
실제 론도 그중에 꽤나 많은 횟수를 만났었고 말이다.
정말 순수하게 마법사의 길을 걷는 자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10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정말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폐관 수련에 들어간 줄 알았다. 과거 론 또한 아카데미를 졸업 후 3서클에 이르지 못해 스펜서 영지에서 박혀 마법만 수련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1년, 3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럼블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론의 생이 다 할 때까지.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을까.’
잠시뿐이지만, 유적관리단에 있으며 마주했던 럼블은 마법에 관해서 만큼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더 보고 싶어 했고, 더 알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던 걸까.
잠시간의 회상,
그리고 잠시간의 고민.
하지만 결과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봐야 했다. 자그마치 7서클의 대마도사였다.
론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기어코 찾아낼 것이다.
그렇다면 애매하게 숨기느니 철저히 제삼자의 관점에서 말하는 편이 나았다. 그게 괜한 의심도 오해도 쌓지 않는 최선의 방법일 테니까 말이다.
사실 최고의 루트는 당연히 그가 어둠의 세력 쪽이 아닌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었지만, 아직 이 부분은 시기상조였다.
때문에 론은 이내 말할 거리를 머릿속에서 찬찬히 정리 했다.
“실은, 방학 때 그와 동일한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허, 정말이더냐?”
“예. 바로 브뤼센 영지에서.”
“설마 그 브뤼센 영지 말하는 것이냐?”
“맞습니다. 일전에도 외부 활동 보고서 관련해 말씀드렸던. 당시 저희는 아카데미와 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날것의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벗어나서 이곳저곳을 탐방했었죠.”
“그래서 몬스터 토벌까지 했었고?”
“예.”
과거 면담할 때는 말하지 않았던 속내라든가 이후의 일들에 대해 론은 적절하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현지 사람들 말을 듣고 이곳저곳을 탐방하던 중 이상한 마법사를 만났다는 둥, 그 마법사의 정신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 협박과 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둥, 가만히 뒀다가는 목숨이 위험했기에 셋이 합공해 놈을 쓰러트렸다는 둥 등등.
민감한 내용은 제하고, 대략적인 것들만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마법사의 시체를 수습하는 데 그게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검은 돌덩이.”
“허허···.”
“쥐는 순간 아주 불쾌하더군요.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마탑이 취급하는 물품 중에는 특정 감정들을 담아두는 그런 게 있다고 말입니다.”
“있긴 하다만 그건 개인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아까와 같이 주변에 파장을 일으킬 정도의 물건은 아니다. 그 검은 돌덩이가 정말 이상한 요물인 거지. 흐음···.”
얘기를 나눌수록 럼블의 표정은 깊어졌다. 그도 쉬이 추측할 수 없는 듯했다.
“뭐 여하튼 얼마 쥐고 있던 것도 아닌데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바로 없애버렸습니다.”
“쯧, 차라리 잘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취하는 만큼 미련한 것도 없으니.”
당대 현자라 불릴 정도로 세상의 것들에 박학다식한 럼블이었지만, 분명 그 흑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의 지식욕과 탐구욕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론의 말대로 안전이 우선이긴 했다.
게다가 그는 일개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1서클로 입학한 학생이 고작 1년 만에 아카데미를 넘어 국왕의 기대까지 받는 유망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7서클인 럼블 그마저도 기대할 정도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자니 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잊혀질 줄 알았는데, 오늘 또 보게 된 것이죠. 바로 라리사를 통해서.”
“그리고 너는 그게 요물이란 걸 알았기에 없애 버린 거였고?”
“예 맞습니다.”
론은 말하면 말할수록 럼블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다. 놈들의 거대한 실체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곳곳에 스며든 놈들의 계획들이 골치 아팠기 때문이다.
‘후우···. 그래도 아직은 기다려야겠지. 좀 더 놈들이 실체를 드러내면 그때 같이 의논하죠, 총장님.’
그러는 사이,
“흐음···.”
톡 톡 톡.
럼블 또한 생각에 잠겨 테이블을 두드렸다.
딱히 누구에게 말하진 않았으나, 그 또한 요즈음 대륙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시작은 아들렌 아카데미가 골든스태프 대회의 수상과 멀어지기 시작할 때쯤 부터였는데, 아직은 뭐라 단정 짓기에는 좀 애매했다.
‘뭐 때가 되면 알아서 드러내겠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변수가 많다. 특히나 아카데미는 수많은 학생과 교수 그리고 행정 직원들이 모이는 곳이지. 끄나풀을 떠나 별것 아닌 것 같은 행동도 거시적으로는 누군가의 계획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거라. 특히나 현시간 부로 너희 둘은 평범한 학생이 아니다. 아들렌을 대표하는 학생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가볍게 수긍한 론이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놀랐다.
일련의 일들을 두고 커다란 세력의 암약까지 염두에 두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 후 럼블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총장실을 나설 때쯤 그가 말했다.
“나중에 라리사와 얘기하게 되면, 그 목걸이 어디서 났는지 좀 물어보거라. 아무래도 나보단 조금이라도 또래가 낫지 않겠느냐.”
“아, 예. 알겠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부탁한 럼블.
하지만 론은 눈치챘다.
자그마치 몇십 년간 눈칫밥을 먹었던 그다. 이는 분명 떠보는 것이었으며 자신을 관찰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허나 그랬기에 더 안심이 됐다.
적어도 그는 지금 이 미지의 세력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라리사에게 대충 들었었다. 럼블이 자신을 주시한다면 론 또한 다 공개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공개하며 그를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
크게 걱정하지 않긴 했지만,
라리사는 정말 하루 만에 퇴실했다.
과연 서클을 거덜 내고 탈진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빠르게 본 모습을 되찾아 갔다.
그리고 아카데미도.
약 한 달에 걸친 대표 선발전이 끝이 나자, 그 뜨거웠던 열기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최고를 꿈꿨던 열정은 아카데미를 대표할 출전자들을 향한 인정과 응원으로 바뀌었고 말이다.
때문에 현재 아카데미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두 사람은 단연 라리사와 론이었다.
‘라리사는 3학년인데, 저 1학년 애들이랑 같이 다니네. 끼리끼리 논다 이건가?’
‘왜 부러워? 저 정도 천재들이면 그럴 만하지.’
‘난 아직도 라리사가 보인 마법 이해가 안 돼. 아무리 마법 혈통이라지만 그건 사기라고.’
‘어이 친구, 우리가 둔재일 거란 생각은 안 해 봤고?’
‘그나저나 아직 성인도 안됐는데 저 정도면, 나중에는 어디까지 성장하려나. 저 둘은.’
얘기할 거리도 많았다.
베팅 배당률로 봤을 때 그 수치가 상당히 높았던, 그러니까 1등하고는 거리가 멀 거라 여겨졌던 라리사가 1등을 했다. 반대로 제일 많은 기대를 받은 론은 2등이었고.
적잖은 이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캬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들어는 봤냐. 큭큭큭, 라리사 떡상 감사요~’
‘베팅에도 포트폴리오라는 게 있어.~’
‘내 돈! 흐윽···. 아샨 저거는 수석 딱지 떼야 하는 거 아냐? 무슨 1학년한테도 쳐 발려!’
‘도박이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물론 난 땄지만, 하하하하!’
그리고 이는 론 일행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푸하하하! 1학기 성적도 그렇고. 어이, 론. 이 정도면 뭐 만년 2등만 하는 거 아냐? 큭큭큭.”
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크루딘. 그런 그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솔직히 본선에도 못 나가는 마당에 이렇게라도 기분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야 꼬맹이, 넌 선발전에서 떨어진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났다고 떠들어?”
“뭐 꼬, 꼬맹이?!”
크루딘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허나 그런다고 물러설 라리사랴.
“왜 크루딘 애기라 불러줄까? 크루딘 애기, 또 질투가 났어요? 아이구우.”
“푸훕!”
그녀의 놀림에 사티넬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허! 사티넬 너마저···. 하아, 진짜 요새 저 아줌, 쯧! 선배 때문에 밥맛도 뚝뚝 떨어지고, 이러다 시름시름 앓···.”
“밥맛이 떨어지긴 무슨 말입니까? 크루딘, 아까도 당신이 식당에서 제일 많이 먹었습니다.”
킥킥.
하하하.
호호호.
“으아아!! 다들 나한테 왜 이래!!”
론, 사티넬, 크루딘, 라리사.
티격태격하긴 해도 어느새 잘 어울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2학기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약 한 달 후면 종강이다.
론 일행은 2학년이 되는 거였고, 라리사는 졸업이다. 비록 하반기 골든스태프 대회 때 본다지만, 곧 있으면 사회로 진출할 어엿한 새내기인 셈이다.
“진로는 정했습니까?”
“진로?”
“그러게요. 라리사님, 궁금해요.”
“쯧, 보나 마나 어디 좋은 데로 가겠지.”
론의 질문에 다들 궁금했는지 한마디씩 거들었다.
3학년 중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한 그녀다. 그런데 골든스태프 대회 본선까지 진출했으니, 졸업식 때 아마 왕국 내 모든 부서로부터 러브콜을 받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마법 혈통은 이렇게 타국에서 경험을 쌓다 나이가 들어 귀향하는 게 보통이었기에 다들 그녀의 행선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 어디 한군데 딱 붙어 있는 건 지루해서 생각 안 해봤는데.”
“네?”
“엥?”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 이곳저곳 가보고 싶어서. 저기 애늙은이 론도 말했잖아. 고작 십대라고.”
최종 선발전 때 그가 했던 말.
당시 다들 장난치길래 잘 들었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공감을 표시할 줄은 몰랐다.
“흐음, 그럼 어디 한 군데 붙어 있진 않겠군요.”
“뭐 차차 생각해 봐야지. 아무튼 난 간다. 다들 수업 잘 들어.”
라리사가 양옆에 있던 사티넬과 크루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주고는 오후 강의를 들으러 떠났다.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애 취급이야! 저 아줌마가 진짜!”
차마 면전에는 말하지 못한 크루딘이 뒤에서 씩씩댔다. 그런 그를 보며 론은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크루딘. 라리사님한테는 왜 자꾸 아줌마라 부르는 겁니까?”
“왜긴! 가슴이 크잖아!”
“...”
**
회귀 후 만약 실수한 게 하나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바로 역사학 강의 시간.
“플리트비체에는 그런 전설이 있죠.”
날은 점점 풀리고, 나이 지긋한 노교수의 목소리도 더없이 한가로우니 잠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다.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열심히 강의를 듣던 사티넬의 고개도 이리저리 까딱인다.
그녀도 졸았기 때문일까.
론도 긴장의 끈을 풀려던 찰나였다.
“고대 괴수 히드라의 마지막 머리는 불멸이라는 전설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히드라는 그저 봉인 당했을 뿐이지, 분명 살아있을 거라는 얘기가 떠돌곤 하죠.”
보어헨 교수의 말에 론이 끄덕였다.
‘정말 진실이었습니다. 교수님.’
회귀 전 그 히드라가 부활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봉인이 풀렸다.
오랜 봉인으로 분노가 극에 달했던 히드라는 보이는 족족 맹독과 지옥의 겁화로 녹여버렸었다.
더 심각한 건 흑마법사들이 네크로맨시로 그 히드라마저 조종했다는 것이었고.
‘후우, 그나저나 걔는 또 어떻게 한다냐.’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니 괜히 벌써부터 막막했다.
“그런데 또 그런 낭설도 있지요. 불멸을 꺾는 건 땅의 성수라는. 땅의 성수는 이 아틀란샤 대륙의 시작과도 같은 동방의 끝, 그레고리 고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것이죠. 오랜 역사와···.”
“땅의 성수, 그레고리 고국···.”
론이 무의식적으로 보어헨 교수의 말을 따라 읊었다.
‘허···! 그러고 보니 그렇네.’
회귀 전 고대 괴수 히드라는 동대륙의 국가들을 집어삼킬 때마다 등장해 악명을 떨치곤 했었다. 흑마법 세력의 선봉장이나 다름없던 놈이었는데, 어째 그레고리 고국만은 나서지 않았었다.
심지어 당시 그런 얘기도 있었다.
그레고리 고국의 코앞까지 다다랐지만, 무슨 일인지 돌연 부하들만 남기고 그 땅에서 벗어났다는.
‘설마 그럼 그 고국에 있다는 그게, 정말 놈의 약점이라도 되는 건가?!’
론의 커진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