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57
후우우웅.
한 풀 기세가 꺾인 바람이 물러난다.
그리고 이 모든 바람을 불러온 라리사는 탈진한 듯 그대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흠···.”
‘발동되고 나서도 문제인 건가.’
4서클 마법 토네이도의 마법진을 만드는 단계까지 발전은 했으나, 그다음인 마법 발동은 좀 애매했다. 마법진으로 강력한 바람을 소환하자 그녀가 말했다.
‘바람이 이렇게나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어떻게 무시해!!’
그 말을 끝으로 라리사는 마법진이 아닌 일족의 술법대로 마나를 움직였다. 그리고 이는 마법진의 마나 공급 단절을 의미했고, 이내 마법진은 사라져 버렸다.
토네이도 마법이되 마법진 마법은 아니게 된 것이다. 당연히 졸업시험에서 이를 용인해 줄 리가 없었다.
“참···.”
어느 정도 진행이 되나 싶었던 연습. 결국 또다시 벽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종강까지는 약 두 달.’
론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자신이야 회귀까지 했기에 상당히 여유가 있었지만, 라리사는 할 게 많았다.
필기시험, 졸업시험으로 대체되는 실기시험 그리고 아카데미 대표 선발 시험까지. 게다가 1차 선발 끝나면 곧바로 2차다.
일생일대의 대회인 만큼 이를 배제하고 싶은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려나···. 딱히 필요 이상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새근새근.
마나를 완전히 소진한 라리사는 조용히 숨만 내쉴 뿐이었다. 론이 옆으로 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두고는 뒤에 있는 돌에 기대앉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저 희귀한 일족에 대한 인맥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회귀 전에는 만나보지도 못한 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와 마법 수련을 하고, 일족의 술법에 대해 들으면서 론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연과의 소통.
지금껏 자신도 마나를 호흡하고 자연을 다루는 마법을 일으키며 충분히 소통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라리사를 만나고 나서는 그 생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인간이 가진 오감(五感)을 넘어 그들은 제6의 감각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론으로서는 감히 인지할 수 없는 그 감각으로 그들은 자연과 소통했다. 그간 자신이 해오던 것은 그저 일방적인 감상과 인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하하···.”
동년배 중에서는 누구보다 앞선다 생각했다. 정령사의 찬가라는 호흡법으로 그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니게 됐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6서클도 곧 금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라리사는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 사티넬처럼.’
요 근래 라리사와 꼭 붙어 하나하나 피드백 하다 보니 그 위화감을 더욱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론의 무거운 상념에도 하루의 해는 변함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태양의 고도가 낮은 만큼 빛은 더 많은 산란을 거쳐 세상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지식의 여부, 시력의 여부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동방의 어떤 유목민족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의 사물도 분간한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단순히 마나를 느끼는 촉감을 넘어 그 이상의 것도 감지할 순 없을까. 이미 가능한 것인데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면? 혹은 그 동방의 유목민족처럼 타고난 유전이라지만 감각을 강화해서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단순히 라리사를 도와줘야겠다는 그것을 넘어 어느새 론, 본인의 과업이 되어 있었다.
눈을 감고 마나를 뻗는다.
플라델의 미로에서 하듯 마나 호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라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뻗은 마나로부터 스쳐 가는 바람을 느껴본다.
휘이이잉.
바스락바스락.
사아아아악.
수많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사이,
“윽···.”
라리사가 힘겹게 눈을 떴다.
마나 고갈로 인한 탈진.
이는 언제 느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묘했다. 차갑고 딱딱한 땅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에서 느껴지는 높이감 또한 땅바닥이 아니었고.
라리사의 고개가 무의식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론이었다.
‘미친!’
깜짝 놀란 라리사가 어디서 난 힘인지 주먹을 휘둘렀다.
퍽.
“컥!”
눈을 감고 있던 론이 신음을 터뜨리며 옆으로 넘어갔다.
“어디서 선배의 몸을!”
“극, 그게 무슨···.”
“흥! 아침이야, 난 간다! 별꼴이야, 정말! 좀만 더 늦었으면 아주···!”
새침하게 돌아선 라리사가 그대로 공터를 빠져나갔다.
“끄윽···.”
순간 론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데···. 갑자기···.”
그렇게 론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라리사가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
일주일의 1차 선발 기한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플라츠 일당의 처벌도 그사이 결론이 났다.
1학년 학생 주임 티라우스 교수의 집무실 앞.
“죄송합니다.”
밀로 히르가스를 비롯한 플라츠 일당들이 쫄로리 서서 사과했다. 그리고 그 사과를 받는 당사자는,
론, 크루딘, 사티넬.
셋의 표정은 지나갈 게 지나갔다는 듯이 후련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티라우스 교수가 말했다.
“이들은 아카데미 내에서 불순 목적으로 타 학생 및 아카데미에 대해 억측했고 나아가 선전 활동까지 한 것에 대한 처벌로 ‘아카데미 제명’이 결정됐다. 그동안 너희가 속앓이하느라 고생했다.”
아카데미 제명.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허나 이를 들은 론 일행의 표정은 덤덤할 뿐이었다.
“뭐,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딱히 사과를 받아주느니 뭐니 할 마음은 없었다. 진작 사과할 것이었다면 기숙사 앞에까지 와서 자발적으로 해야 했을 터인데, 그러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뭐 사실 그럴 여유가 없긴 했을 것이다. 마도왕국 아들렌에서 그것도 아카데미의 제명은 엄청난 불명예니까.
가문의 후계자건 아니건 어디를 가든 족쇄처럼 따라붙을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까지 한순간에 말아먹었으니, 충격이 작지 않으리라.
“앞으로 상대를 봐가면서 행동하십시오.”
론이 그들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힘으로 찍어누를 수도 있었지만, 론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만 가보거라.”
“예···. 죄송했습니다.”
멍한 표정의 상급생들이 물러나고, 다 간 줄 알았던 그 자리에는 아직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이 꼴통 연구회의 대가리.
플라츠 예런.
“죄, 죄송합니다. 죄송···.”
며칠 새 다시 마주한 그의 얼굴은 야위다 못해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그 윤기 나는 금발도 이전의 빛을 잃었고.
그런 플라츠를 보며 티라우스가 말했다.
“플라츠가 그 집단, 그러니까 마법진 활용 연구회의 실질적인 대표임과 동시에 이번 사건의 주모자였다는구나. 3차에 걸친 교수회의가 있었고, 예런 백작가는··· ‘4대 제명’이라는 결정이 났다.”
털썩.
옆에 있던 플라츠가 주저앉았다.
이미 고지받은 판결이었지만,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쯧쯧···.”
그런 그를 보며 크루딘은 한심하단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했는데 4대 제명 선고를 받았네.’
과연 어디까지 일을 들출 것인가, 예런 백작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정말 플라츠를 들어낼 것인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교수회는 화끈했다.
‘아니, 럼블 총장님이 화끈하다 해야 하나.’
지난 연설 때 상당히 불쾌해하는 걸 느끼긴 했다. 헌데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론의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너희는 이만 대강당으로 가보거라. 총장님께서 2차 선발 시험에 관해 말씀해 주실 게다.”
“예, 교수님.”
떠나기 전, 론은 플라츠에게 한마디 했다.
“아쉬우면 다음에는 직접 와라, 그때는 나도 직접 상대해 줄 테니.”
플라츠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깔짝이는 그에게 론 또한 나서지 않고 해결하는 법을 보여줬다. 다만 그 해결법이 상당히 파격적이라 충격적이겠지만.
론 일행은 그렇게 티라우스 교수의 집무실을 나섰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 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창한 목표를 세워버리니, 어느새 그보다 작은 것들에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게 되었다.
플라츠 예런, 예런 백작가.
누가 와도 무섭지 않았다.
그저 코앞의 욕망에 사로잡혀 허망한 말로를 맞이한 그의 모습을 뒤로하며 론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대강당.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로 북적였다.
지난 골든스태프 대회 때와는 달리 학기 중에 선발 시험을 치르는 만큼 교수진도 틈틈이 있는 시간을 활용하려 했는데, 그런 강당에는 합격자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전세계 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 땅의 모든 젊은 마법사들이 꿈꾸는 대회인 만큼 정말 많은 학생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아카데미 대표로 뽑힐 순 없겠지요. 1차 시험의 총합격자 수는 57명입니다.”
럼블이 직접 합격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오오···. 그래도 좀 되네.”
잘나고 잘난 이들이 모이는 아카데미. 그런 아카데미의 전교생 중 60위권 안에 안착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그 57명 중 3학년이 39명, 2학년이 13명, 1학년이 5명입니다. 지금껏 1차는 대부분의 1학년들이 통과하지 못했었는데, 이번 기수는 정말 대단하군요.”
애초에 골든스태프 대회는 18세 이하 미성년 마법사 중 최고를 가리는 만큼 3학년을 대상으로 한 대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1학년에서 저만큼이나 뚫고 올라왔으니 럼블도 놀랄 만했다. 그러면서 그는 강당의 학생들을 둘러봤다. 마치 1학년들을 살펴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1차 크립텍스를 가장 빨리 푼 세 사람 중 둘이 1학년이라는 겁니다. 껄껄껄.”
럼블은 아주 재밌어했다.
웅성웅성.
하지만 반대로 참가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충격이었기에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론이라는 학생 아냐?’
‘뻔하지.’
‘와···. 미쳤네. 이러다 진짜 1학년이 상급생들까지 다 씹어먹는 거 아냐?’
‘야, 상급생 체면이 있지, 무슨···.’
‘아니 근데, 그 론 스펜서라는 애는 그렇다 쳐도 또 한 명은 누군데? 하···. 이번 1학년 진짜 아주 미친놈들만 있네.’
그 소란 속에서 럼블은 말을 이었다.
“크립텍스를 가장 먼저 푼 세 명, 아샨 타슈켄트, 크루딘 안데르손, 사티넬. 이들은 2차 시험 면제입니다.”
“엥? 내가 잘못 들은겨?”
“로, 론님?”
옆에 있던 크루딘과 사티넬이 놀라 론을 쳐다봤다.
“하, 하하···.”
딱히 2차 프리패스를 바란 건 아니었다.
크립텍스를 풀 당시에도 그냥 동료들이 하는 걸 봐줘야겠단 생각에 맨 마지막에 풀었었는데, 막상 이렇게 갈리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와, 이게 이렇게 되네. 저 3학년 수석이 우리보다 먼저 풀 줄이야···.”
이들만 놀란 게 아니었다.
‘야, 쟤네 걔들이잖아. 론 스펜서랑 같이 다니는 애들, 그 삼인방!’
‘허어···. 그럼 걔들도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단 거야?’
‘그 셋 중 론이 제일 낮은 수준이었다고?’
‘뭐야, 이번 1학년 상태 왜 이래···.’
‘1학년이 이래도 되는 거냐?’
조용해질 틈이 없는 강당.
턱.
크루딘이 갑자기 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론.”
‘뭐, 뭐야?’
이제껏 없던 그의 진지한 눈빛에 론이 당황했다.
“2차가 뭔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도와줄게. 걱정 마, 나만 믿어.”
“······”
크루딘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 마음을 전하려 했다. 이상하게 신뢰는 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2차는 토너먼트 방식을 통해 합격자를 4분의 1로 줄이겠습니다. 대결 방식은 마법진 배틀. 명색이 골든스태프 대회인데, 다양한 마법은 필수겠지요?”
마법진 배틀.
고학년이 되면 학기 중에 수행평가로 치르는 항목이다. 상대와 번갈아 가며 마법진을 펼치는 것으로 얼마나 다양한 마법진을 구사할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상대가 펼친 마법진과 같은 서클이거나 혹은 그보다 상위의 마법진을 펼쳐야 하는데, 더 이상 펼칠 마법진이 없으면 패배하는 방식이었다.
크립텍스처럼 새로운 건 없었지만, 승패가 걸린 대결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토너먼트는 내일부터 이틀간 저녁마다 각 야외 훈련장에서 시행됩니다. 선발자들은 각 학년 주임 교수님들께 시험 장소를 확인받기 바랍니다. 그럼 1차 선발 합격자이자 토너먼트 대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론 스펜서, 마엘 드뷔아, 줄리앙 로베르츠···.”
긴 호명이었다.
그리고 그중 맨 앞에 자신이 불렸다는 사실에 론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는데,
“참고로 이는 1차 시험의 통과 순으로 호명한 것이고, 대진은 무작위 선정될 것이니 이의는 받지 않겠습니다.”
“크으! 역시 론, 네가 1등일 줄 알았어!”
“앞에 세 명을 제외했으니 4등이지요.”
“아니 뭐 어쨌든 지금은 1등이니 그걸 만끽해야지! 축하한다, 론.”
피식.
‘하여간···.’
그러면서 론은 주위를 둘러봤는데, 반응이 각양각색이었다.
‘와, 진짜 론이 4등이었어.’
‘그나저나 저 론이랑 대진 잡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 안타깝게 됐네.’
‘글쎄, 종목이 마법진 배틀이라서 고학년이 유리할 것 같은데. 결국 얼마나 마법진을 구사할 수 있냐 싸움이잖아. 설마 론이 3, 4서클 마법진을 막 다 펼치겠냐.’
‘맞어, 실력과 재능을 떠나서 배움의 절대적인 양 차이도 무시 못 하지.’
재밌게 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럼블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봐도 심유함이 느껴지는 눈빛이다. 헌데 그 밑으로 그의 입가가 올라간 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애나 어른이나 싸움 구경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