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54
“론 스펜서, 크루딘 안데르손, 사티넬. 단상으로 나오도록!”
커다란 호명에 론이 고개를 돌렸다.
크루딘과 사티넬.
올 게 왔다는 표정이다.
오히려 속 시원해하는 것 같았다.
“나가죠.”
아카데미의 전학생을 수용하는 대강당인 만큼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인파를 지나쳐야 했다.
시기, 질투, 불만, 불쾌 등등.
그들의 그런 표정은 이제 익숙했다.
론과 사티넬, 그리고 크루딘이 단상에 올라 럼블 옆으로 가자 그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후우, 드디어 좀 조용해지겠군. 어떻게 얘기를 하려나.’
2학기의 반이 지나가는 시점,
아카데미는 론으로 인해 많이 소란스러웠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황임에도 직접 듣지 않았다며 많은 학생이 불만을 토로했다.
“아카데미의 총장으로 재직하며, 이렇게 실망한 적은 처음입니다.”
럼블의 목소리가 대강당을 뒤덮었다.
이제껏 수군대던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지성과 인내의 요람, 마법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여러분들이 여기 옆의 세 학생을 두고 정상적인 확인 절차는커녕 추측만으로 선전 활동을 하더군요.”
럼블이 대강당에 앉은 학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에 찔렸는지 몇몇 학생들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밀로 히르가스.”
럼블이 한 사람을 호명했다.
3학년 학년 주임으로부터 최근 치료실 이용 학생들에 대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마법진 활용 연구회 소속이라는 것. 그리고 그 뒤에 예런 백작가가 있다는 것쯤은 오랜 재직 생활과 더불어 미지근한 정계 생활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직은 그 순서가 아니었다.
‘썩은 나무는 꺾이고 쓰러질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조용한 대강당에 럼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밀로 히르가스!!”
마도 공학 확성기를 통해 커다란 목소리가 그대로 퍼져나갔다.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실린 채로.
“옛, 예?!”
강당 우측에서 한 학생이 벌떡 일어섰다.
“총장의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아, 아닙니다.”
“나오게.”
“예!”
이제껏 보지 못한 차가움이었다.
그런 럼블의 모습에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단상에 올라 온 밀로.
그의 오른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각한 골절은 아니었기에 완치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선전 활동을 위해 일부러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이었다.
“몇몇 학생들의 말만 들어도 일의 시작점이 누군지는 알 수 있다. 밀로.”
“예···.”
럼블의 냉철한 눈동자에 밀로는 절로 주눅이 들었다.
“어째서 확인 절차에 대한 요구도 아니고, 억측을 기정사실인 것마냥 소문을 냈지?”
“그, 그게··· 말이, 말이 안 돼서···.”
“호오. 말이 안 돼? 그럼 연구회의 상급생 일곱 명이 1학년 세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고 온 거는 말이 되나?”
‘오오.’
슬쩍 쳐다본 럼블의 얼굴은 냉철하다 못해 얼음장 그 자체였다.
아들렌 마법 아카데미.
전 세계를 놓고 봐도 명문인 곳이다. 고작 애들 정치질에 놀아날 정도로 허술한 조직이 아니란 말이다.
론은 속으로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진실 혹은 사실.
이는 힘을 갖추었을 때나 비로소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이라는 건 말 그대로 무력일 수도 있고, 재능 혹은 부, 또는 명예, 집단 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고만고만한 학생 사이에서는 실력으로 앞세우는 것보다 압도적인 권위자를 대동하는 것이 일을 더 확실하게 해결해준다.
‘총장님, 오래 참았습니다. 깔끔하게 부탁드립니다.’
론은 편안하게 쳐다봤다.
“스나이더, 히단, 조엔, 머큐시오, 그레브, 알론. 같이 병실에 누워 있던 네 연구회 회원은 죄다 3서클이더군?”
“아, 예···.”
“그럼 3서클 일곱이 쫄로리 가서, 저기 1학년 세명한테 패달라고 한 건가?”
“아닙···니다.”
“그 외 보고서 건과 왕실 간담회 건. 아카데미 측에서는 충분한 절차도 없이 일을 진행한 것처럼 매도하더군? 불분명한 부분에 관한 확인 요청. 이 지극히 이성적인 방법을 두고, 억측과 선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선례가 없다면 총장 직권으로 제명이다.”
“예?!”
제명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밀로였지만, 럼블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시는, 이렇게 비이성적이고 무례한 것들의 싹이 자라지 않도록 선례를 다지도록 하지.”
“예?! 초, 총장님!”
“이만 들어가거라.”
‘와우.’
툭툭 건드리는 옆을 보니 크루딘이 입 모양으로 감탄을 내지르고 있다.
망연자실한 밀로가 럼블을 부르려 했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강당의 학생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자유와 권리를 착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처벌을 받고 깨닫는 무지한 자가 되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묵직한 경고였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근데 대체 어딨는 거야? 밀로가 앉아 있던 곳 근처에는 없던데···.’
론이 아까부터 찾고 있던 사람.
이 모든 소동의 주동자였다.
바로 플라츠.
놈의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400여 명이나 되는 인파 속에서 찾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 그렇지. 윤기 나는 금발이 어디 갈 리가 있나.’
저 멀리 금발에 청안의 학생이 멍하니 고개를 숙인 게 보였다. 퍽 굳어 있는 얼굴이 꽤나 볼만 했다.
그리고 이내 론과 눈이 마주쳤다.
피식.
먼 거리였음에도 당황한 기색이 훤히 읽힌다.
‘화이팅 해보라고. 선례까지 확인해 제명을 아끼지 않으려는 총장님께서 과연 네놈에게 교사죄를 물을지 안 물을지 말야.’
옆에 있던 밀로가 터벅터벅 단상 밖으로 나가자, 론도 일행들과 같이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럼블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아···.’
“들은 사람은 들었을 겁니다. 골든스태프 대회.”
갑작스런 화제 전환이었지만 학생들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5년에 한 번씩 전세계적으로 열리는 행사. 미성년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이다.
“국왕 폐하께서 이번 골든스태프 대회 우승자에게는 남작위의 세습 작위를 하사한다고 하셨습니다.”
웅성웅성.
귀족을 비롯해 정보에 빠삭한 평민들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모르는 평민들도 있었다. 때문에 강당은 적잖이 시끌시끌해졌다.
“이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리도 비정상적으로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안이 사안이고, 여러분들이 미성년인 만큼 오늘까지는 참겠습니다. 허나 이 이상의 저열한 행동은, 예외 없이 처벌입니다.”
럼블의 무심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이 다시 한번 좌중을 훑었다.
“그리고 엄청난 상이 있는 만큼 과열 양상이 이처럼 허튼 곳으로 분출되지 않도록 올해는 그 대표자들을 조금 서둘러 뽑기로 했습니다. 바로 오늘.”
‘어?’
잠자코 듣고 있던 론이 두 눈을 부릅떴다.
골든스태프 대회의 대표자 선발.
본래는 여름 방학 직전에 실시한다. 막 학기를 보내는 3학년생들이 졸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한 배려였는데, 올해는 아니었다.
당연히 학생들도 어안이 벙벙해 입만 뻐끔거렸다.
“리브레도.”
럼블의 외침에 단상 우측의 출입구에서 행정 직원이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달그락달그락.
카트 위로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미터씩은 될 법한 커다란 상자가 있었다. 럼블은 그것의 뚜껑을 열고는 안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처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본 사람도 있고, 직접 풀어 본 사람도 있을 겁니다. 무엇일까요, 이건?”
‘크립텍스.’
회귀 전보다 빠른 진행이었지만 론이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크립텍스입니다!”
좌중 속 한 학생이 소리쳤다.
“맞습니다. 크립텍스, 휴대용 금고지요.”
한 손에 편히 잡히는 원통형 구조물.
이것의 가운데에는 26개의 고대 문자가 새겨진 다이얼 5개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열려면.”
딱 딱 딱.
럼블이 그 다이얼들을 하나씩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게 각 다이얼마다 있는 26개의 문자 중 정답인 문자를 배열시켜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자물쇠도 있기에 처음 보는 이들도 대략적인 설명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특제 크립텍스는 마나를 이용해야만 열 수 있습니다. 음···. 거기 학생, 잠시 나와 보게.”
“아, 네!”
럼블이 단상 제일 가까이 앉은 학생 중 하나를 불렀다.
“방금 봤듯이 이 다이얼을 돌려 보겠니? 힌트는 마나 주입이다.”
밀로에게 호통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자상하게 설명했다.
“넵!”
그런 총장의 관심에 학생은 호기롭게 크립텍스를 주물러 봤지만, 어쩐 일인지 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끙끙대던 학생은 이내 포기하듯 말했다.
“아, 안되는 돼요···.”
“괜찮다. 쉬이 할 수 있는 건 아니란다. 수고했다, 들어가거라. 그럼··· 아샨 타슈켄트!”
‘호오.’
아샨 타슈켄트.
3학년 수석이다. 론이 이 학생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회귀 전 그는 골든스태프 대회에 참가했었다. 아들렌 아카데미 대표 중 하나로 말이다.
대륙 동남부의 호이비르 왕국. 그곳의 변경백 가문 차남인 그는 아들렌 아카데미뿐 아니라 자국의 국민에게도 많은 응원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순위권 밖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아샨이 단상으로 올라왔고, 럼블은 그에게 다시 크립텍스를 넘겼다.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아샨이 진중한 표정으로 크립텍스를 쥐었다. 400여 명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딱히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크립텍스를 쥐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강당의 학생들이 정답을 요구하듯 럼블을 쳐다볼 무렵,
딱!
딱딱.
아샨은 기어코 다이얼을 돌렸다.
“잘했다. 아샨.”
“아닙니다. 총장님.”
럼블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아샨 타슈켄트 학생은 3학년 수석이며 현재 3서클입니다. 그러면 궁금하겠지요. 3서클이어야 가능하냐. 그건 아닙니다. 마나컨트롤에 자신이 있다면, 그 이하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갑작스럽게 말을 끊으며 럼블이 좌중을 집중시켰다.
“골든스태프 대회의 최소 참가 자격은 2서클입니다. 아쉽게도 이에 충족지 못하는 학생들은 참관하는 수준에서 만족하길 바라겠습니다.”
2서클의 자격 제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할 만한 내용이지만, 이는 이마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이었기에 불만을 느끼는 이들은 없었다.
“참, 그리고 여러분들이 궁금해 할 것 같아 여태껏 이 학생들을 들여보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럼블이 론 일행을 쳐다봤다.
‘나?’
론이 당황한 눈빛으로 럼블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럼블이 론에게 크립텍스를 건넸다.
“돌려 보거라.”
“아··· 예.”
‘참···.’
회귀 전 이맘때 론은 아쉽게도 2서클이 아니었다. 즉 이 크립텍스와는 연이 없었단 말이다.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 생은 우승까지 노리는 사람으로서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론이 크립텍스를 쥐었다.
차가운 금속 물체.
그리고 그 가운데에 배치된 5개의 다이얼. 론은 그중 하나에 손가락을 얹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마나 주입.
딱히 힌트를 더 들은 것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찾아야 했다. 3학년 수석 아샨이 했던 것처럼.
우우우웅.
처음에는 크립텍스 전체에 마나를 휘둘렀었다. 하지만 고작 이것으로 되었다면 처음의 학생도 분명 했을 것이다.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2서클의 제한. 2서클이 돼서 할 수 있는 건, 원소 변환. 그런데 회귀 전에 그런 얘기는 돈 적이 없어. 크립텍스에 원소 변환식을 새기고 그런 게 아니다. 그러면···.’
단순히 생각했다.
2서클에 오르면 다음은 3서클이다.
그리고 3서클은 복합마법진의 시작.
정다면체를 완벽히 도식화하기 위해서는 사각지대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공간지각력이 필요하다.
론은 번뜩이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 개의 다이얼에만 마나를 둘렀다. 완벽한 원이 되어 이를 감쌀 때까지.
우우웅.
미묘한 공명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가?’
공명에 맞춰 원 전체에 균일하게 마나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인 만큼 난이도가 있었다.
공명에 맞춰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레 론의 눈이 감아졌다. 불필요한 감각의 신경을 끊고, 온 감각을 마나컨트롤에 집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딱,
딱딱
딱딱딱, 딱.
‘됐다!’
톱니바퀴처럼 크립텍스가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론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는데,
어째 다들 눈빛이 이상했다.
“빠르···구나. 아샨보다.”
럼블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