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53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유감이었다.
‘하···.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걸 느끼냐.’
론은 갑작스런 광풍에 대비할 틈도 없이 먼지마냥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일전에 럼블이 최대 거리로 텔레포트를 한다고 몸을 띄웠었던 게 절로 생각이 났다.
‘어스.’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지금의 광풍은 무작위로 주변 것들을 날린다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부유물에 처맞을까 싶어 론은 흙으로 몸을 감쌌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 정도의 바람을 마법진도 없이 펼치는 거지?’
투두두둑.
아니나 다를까. 부유물들이 흙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 소리를 배경 삼아 론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말로만 듣던 케스케이드 일족.
마법진도 없이 펼치는 자연 현상은 가히 정량사에 비견될 정도로, 바람의 일족이란 이명을 가질 만했다.
‘선조가 뭐 정령사라도 되는 건가.’
사실 선조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했다. 정령사라는 설, 엘프였다는 설, 드래곤의 피가 섞였다는 설 등 말은 많았지만, 뭐 하나 정확한 건 없었다.
그저 보통의 인류와는 다른 선조가 있었고, 그로 인해 남다른 힘을 가진 그들은 일찍이 그들만의 집단을 구축해 왔다는 정도.
이름하여 마법 일족이었다.
바람의 케스케이드, 바위의 테레지아, 파도의 힐레보브, 숲의 아우리엘라.
철퍼덕.
“끄흥···.”
어느새 라리사의 바람 마법이 끝났는지 론은 바닥에 떨어졌다.
“아고, 미안. 헤헷···. 바람 마법은 항상 이래가지고 말야.”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살짝 내미는데 참 뭐라 말하기가 그랬다.
“크흠, 다음부터는 좀 거리를 두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하는.
라이트 마법은 이미 충분했고, 스톤 월은 시간과 노력이 알아서 해결해 줄 터였다.
그리고 토네이도 마법은.
“그런데 제가 도와줄 순 있는 겁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딱히 해결점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이는 그녀의 일족과 관련된 능력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와 무관한 자신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러니까 생각해 봐야지!”
“예?”
라리사가 열심히 끄덕인다.
“...”
“1학년인데 플라델의 미로에 들어가는 엄청난 재능! 3서클 마법만으로도 중급 몬스터를 때려잡는 패기와 실력! 열여섯에 4서클에 거의 다다른 경지! 이 정도면 충분···아! 혹시 너 4서클이니?”
“절대 아닙니다.”
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륙의 역사상 열여섯에 4서클에 이른 자는 없었다. 현 아카데미의 총장이자 세기의 현자라 불리는 7서클의 럼블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가뜩이나 론은 골든스태프 대회 우승도 노리고 있는데, 거기에 4서클의 성취까지 더해진다면 전세계의 엄청난 관심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할 일도 있는데 그러면 발목만 잡을 뿐이지.’
론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그 정도면 지금 아카데미에서 최고 엘리트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글쎄요.”
“어떻게든 머리 좀 굴려 보라는 거지. 설마 졸업 며칠 앞두고 ‘교수님, 저 그냥 중위권 그룹 성적으로 졸업할게요.’ 이럴 순 없잖아.”
“나쁘지 않네요. 중위권 그룹으로 졸업한다고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얘는 말을 해도! 얘, 나라고 나! 케스케이드 일족!”
한껏 소리를 지르던 라리사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곧 다시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킁킁.
게다가 없는 코까지 삼키며, 처연하게 고개를 떨구는데 아주 연극 배우 저리 가라 할 정도다.
“하아···.”
정말 성가신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저는 그쪽의 일족 기준으로 외인(外人)입니다. 딱 봐도 일족의 능력으로 인한 문제인데, 이걸 해결하려면 그쪽 일족에 대한 것도 들어봐야 할텐데 괜찮겠습니까?”
“뭐 설마 일족에서 내치기라도 하겠어? 그리고 이렇게 매일 조용히 만나면 되지! 아무도 모르게.”
‘음? 활발한 외부 활동을 안 할 뿐 폐쇄적인 건 아닌 건가.’
생각보다 의외의 가치관이었다.
그나저나 라리사는 꽤나 급한 듯했다.
“근데 매일 해야 하는 겁니까?”
“응, 매일!”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라리사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론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막상 도와주기 시작하면 꽤나 신경을 써야 할 터였다.
“확실한 해결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참···. 그래서, 도와주면 뭐 해줄 겁니까?”
“어, 엉?”
“뭐 해주실 건데요?”
론이 지긋이 쳐다봤다.
“케스케이드 일족 아이들의 대표인 내가 부탁하는데도?”
론이 고개를 저었다.
“이, 이렇게 예쁜데도?”
‘머리카락은 왜 베베 꼬는 거야?’
라리사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했다.
허나 론은 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얘! 너는 무슨 애가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냐!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좀 도와주고 그래야지. 얘가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엉!”
“호오, 그건 좀 괜찮군요.”
“어?”
“나중에 힘들면 좀 도와주시죠.”
“나, 나중에?”
“뭐 일 끝났다고 모른 채 하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일족은 아니잖습니까.”
“어어···. 그, 그치.”
사실 케스케이드 일족과 교분을 쌓고, 그들의 능력을 견식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경험이 되긴 한다.
그런데 어떻게 얘기를 하다 보니 무기한 소원권까지 얻어버렸다.
“자, 그럼 연습 좀 해볼까요?”
***
때아닌 졸업 시험 준비.
이는 동틀 무렵까지 지속됐다.
“헤엑! 헤엑, 헤에···. 미친놈!”
“그나마 좀 효과가 있군요.”
라리사가 힘겹게 말하며 드러누웠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네.”
“진짜 죽겠어.”
“인간은 그렇게 허약한 생명체가 아닙니다.”
“뚫린 입이라고 아주···.”
질색하는 표정을 짓던 라리사는 그마저도 멈추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
이 시간대의 공기는 무겁다.
그래서 더 잘 느껴진다.
바람이.
어릴 적 바람과 소통하고 난 이래로 단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론이라는 건방진 1학년은 자신을 혹독하게도 굴렸다.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신기하네.”
“뭐가 말입니까?”
“마나가 소진되고, 이렇게 빈 몸으로 수련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래야 그 나쁜, 아니 그 일족의 술법을 멈추죠.”
“후우···. 그렇긴 하네.”
라리사는 눈을 감고 밤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쿵!
커다란 암석을 소환한 론은 그대로 라리사 머리 위로 던졌다.
쿵 쿵 쿵 쿵.
‘계속 들고 계십시오.’
론의 방식은 무식했다.
적어도 1톤이 넘는 돌들을 소환해 그녀의 머리 위에 두고 바람으로 받치게 했다.
가진 마나가 바닥이 날 때까지.
케스케이드 일족의 술법은 마법과는 발동 방식이 다르지만, 그 시작은 같았다. 똑같이 마나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때문에 일족들도 마나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서클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교감이야.’
‘악수하듯 마나를 건네는 거야, 정중하게. 자연은 무례한 걸 싫어하거든.’
‘숙련도도 숙련도지만, 교감이 중요해.’
케스케이드 일족의 술법.
라리사에게 들어보니 과연 혈통이라 말할 만했다. 그들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바람과 소통했다.
다만, 론은 그녀의 습관적인 술법 발동을 막기 위해 그녀의 서클에 담긴 마나를 비워버렸다.
억지로 술법 발동을 금지한 것이다. 물론 마법진 마법도 불가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하나는 가능했다.
바로 마법진 그 자체.
없는 마나를 박박 긁어모아 마법진만 연습시켰다. 어려운 마법진 앞에 무의식적으로 술법에 의지하려는 버릇을 단기간에 고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적어도 술법에 의해 마법진이 끊기는 일은 없게 된 것이다.
“매일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말 안 해도 알거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정에 또 뵙죠.”
“어어.”
저벅저벅.
점점 작아지는 발소리에 라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론의 뒷모습도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게, 칫!”
막상 연습에 들어가자 론은 장난할 틈도 없이 진지했다. 그리고 이제껏 만난 그 누구보다 과감했으며, 단호했다. 일족의 대표로 온 자신이 야밤에 돌을 들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막상 따라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뭐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그런 론의 뒷모습이 이내 사라져간다.
‘저런 애랑 아카데미 다니면 재밌겠다.’
피식.
웬 뚱딴지같은 생각인가 싶어 그녀가 헛웃음을 삼켰다.
***
오전 오후는 아카데미 수업, 저녁에는 크루딘 사티넬과의 수련. 자정 무렵에는 라리사와 졸업 시험 준비, 그다음에는 간단한 명상 및 마나 호흡.
중간에 좀 생뚱맞은 게 끼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아닌 듯했다.
“아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소문이 날 수 있죠?”
“와아, 이제는 그냥 감탄 밖에 안 나온다.”
휘이이잉.
바람을 타고 웬 벽보가 날라왔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글은,
[ 사기꾼 론 스펜서와 그 일당 크루딘 안데르손, 사티넬. ]
[ 허위 보고서를 통해 왕실 간담회까지 간 그들을 아카데미에서 ‘제명’ 시켜라! ]
[ 집단 폭행으로 학생들에게 상해를 입힌 그들을 퇴출 시켜라! ]
[ 마탑의 수련생 또한 집단 폭행한 게 틀림없다. 아카데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
[ 아카데미는 범법 악질들을 왜 감싸고 있는가? ]
“어떻게 할 거야?”
크루딘이 물었다.
얼마 전 플라츠가 보냈다던 상급생들과의 마찰은 일방적인 폭행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게티아에서 지오르 마탑 수련생들과의 싸움은 집단 폭행으로 바뀌어 버렸고.
‘왕실 간담회가 있은지 열흘이 넘었는데···.’
보통 간담회의 내용은 당시 참석한 주요 인사들을 통해 퍼져나간다. 일차적으로는 소속 집단에 전달되는 것이고, 그다음은 각 사교계에 이야깃거리로 알아서 퍼져나가는 식이다.
흥미와 재미로 인한 것도 있지만, 왕국의 정세와 동향은 귀족에게 있어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럼블도 가만히 있었다.
내로라하는 귀족가에서 이러한 정보를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럼블도 론도 간과한 게 있었다.
바로 골든 스태프 대회.
우승자에게는 남작위의 세습 작위를 하사하겠다는 국왕의 선언은 생각보다 커다란 반향을 가져왔다.
세습 작위.
같은 등위라도 단승과 세습이 의미하는 바는 확연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그저 당대의 뛰어난 인재임을 인정하고, 평민과 구분 지어 고위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해당 가문과 그 혈통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고위 직책은 물론이고, 특정 영지의 통치자가 되어 다스릴 수 있음을 의미했다.
즉, 국왕의 선언은 상당히 파격적이었고, 이를 들은 귀족들은 눈이 돌아간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츠 일당은 더욱 일을 크게 만들었다. 국왕이 론을 지지했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불분명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물고 늘어졌다.
그들 딴에는 해당 사건들에 대한 담당 공증인에게 직접 들은 것도 아니었으니, 걸려도 몰랐다는 식으로 퉁치려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저 적으로 간주한 론 일행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요. 일단 기다려 보죠.”
허나 론은 그저 차분히 지켜볼 뿐이었다.
‘사기꾼!’
‘아카데미에서 꺼져!’
‘더러운 새끼들!’
‘범죄자 새끼랑 왜 강의 같이 들어야 해?!’
툭.
휘익.
면전에서의 험담은 당연했고, 뒤에서 오물 같은 걸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수일간 지속된 상황.
크루딘이 화도 내고 했지만, 당연히 멈출 리가 없었다.
‘나서실 때가 됐는데.’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단순 무력으로 찍어누르는 수도 있고, 그저 말로써 해결할 수도 있고 혹은 넌지시 상대방을 깨닫게 해 돌이키는 방법 등등.
즉, 각각의 상황에 따라 그 해결법도 다양한데 론은 그중에서 가장 확실하면서도 편한 방법을 골랐다.
그리고 결국 그날은 찾아왔다.
보통이라면 원소 마법 강의를 들어야 할 오전 시간에 론 일행은 실내 대강당으로 갔다.
웅성웅성.
이미 자리를 채운 400여 명의 인파. 아카데미의 전 학생들이었다.
“조용!!!”
중후한 노년의 목소리가 대강당을 뒤덮었다.
럼블이었다.
이제껏 론이 봐 온 모습이 아닌 상당히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론 스펜서, 크루딘 안데르손, 사티넬. 단상으로 나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