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51
“론님, 그런데 다시 가서 무슨 얘기를 또 한 거예요?”
훈련장을 나오는데 사티넬이 물었다.
“아아···.”
마지막까지 겁박을 늘어놓는 상급생 때문에 론이 가서 뭐라뭐라 했는데, 아무래도 이를 물어보는 듯했다.
“뭐 그냥 우리도 가만히 안 있겠다고 했죠. 그쪽이 학년을 위시해 겁박한 것부터 공론화시켜 보겠다 하고. 아! 그리고 우리 보고서 관련해 소문을 낸 것도 그쪽이었습니다.”
“네에?!”
“어쩐지 딱 봐도 쥐새끼 같은 게 꼭 작당 모의하는 것들 같긴 했어.”
“뭐 아무튼 그래서 한 번 갈 데까지 가보자 했죠. 물론 상급생 일곱이 1학년 셋에게 탈탈 털렸다는 것까지 소문내면 꽤나 재밌을 거란 말도 했지요.”
“큭큭, 아 그 마지막 멘트는 좀 재밌네! 푸하하하!”
실은 도발한 감도 없잖아 꽤 있었다.
놈들이 얼마나 일을 키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론은 이러나저러나 왕실과 관련된 몸이 되어버렸다.
특정 일을 두고 국왕이 치하까지 했는데, 이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면 당연히 론은 왕실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뭐 저쪽이 그럴 배짱이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 그렇군요···. 그나저나 저들이 쉽게 물러설까요?”
“어이, 사티넬.”
“네?”
“너무 생각이 많아.”
팡!
크루딘이 왼 주먹을 오른 바닥에 꽂으며 말했다.
“간단해. 기어오르면, 줘팬다. 아들렌 마법 아카데미가 언제부터 입만 터는 병신 집단이었다고. 진짜 상급생들이 다 저따위 수준이면 나 아카데미 계속 다니는 거는 다시 생각해 본다.”
“사티넬, 너무 걱정 마십시오.”
론이 사티넬을 쳐다봤다.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벅차긴 할 것이다. 말본새로 보건대 귀족인 건 당연하고, 게다가 일전의 동급생인 이도르 무리와는 다르게 상급생들까지 와서 난리를 쳐대고 있으니까 말이다.
“방학 때 쓰러트린 5서클 마법사에 비하면 별것 아니잖습니까? 뭐 저들 집단이 나중에라도 벅차면, 그때 가서 최대한 써먹을 수 있는 걸 써먹으면 됩니다.”
힘이 있으니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는 다시 넓은 시각을 제공한다.
론이 쥐고 있는 카드는 많았다.
‘여유···인 건가.’
회귀로 인해 힘도 지식도, 사고방식도 또래의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였다.
“아, 다음에 올 띨빵한 것들은 어떻게 요리를 해줘야지 잘 팼다고 소문이 나려나···.”
“······”
크루딘이 특이한 케이스긴 했다.
“곁에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으음?!”
옆에 있던 크루딘의 눈빛이 싸악 변했다. 그 예리한 눈빛에 론이 움찔거렸다.
“캬아! 이거이거 방학 때 그렇게 몸 붙이고 다니더니만! 결국 일 났네, 일 났어!”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주방을 턴다더니···. 하이고,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네. 쯧!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원···.”
“크루딘님!!”
사티넬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어휴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정신없이 떠들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엑!!”
론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학생 무리였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모습. 1학년인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그들이 이제 막 나가려는 론 일행과 상급생들이 누운 쪽을 번갈아 가면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
“일이 좀··· 복잡해질 것 같은데요?”
“큭큭큭, 요새 아주 가만히 있어도 재밌는 일이 터져 나오는구만!”
휘익.
크루딘이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하지만 사티넬이 째려보자 이내 곧 입을 다물었다.
딱히 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상급생 무리와 자신들을 번갈아 보던 여학생들은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났다.
“일단 도서관이나 가죠. 있어 봐야 소란만 더 피울 테니.”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오케이, 갑시다아~”
***
슈아아악.
회색깔의 빛무리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익숙한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플라델의 미로.
처음 발견했을 때는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있으면 있을수록 미로가 아니라 안식처가 더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카데미 내에서도 충분히 개인 수련을 할 수 있지만, 이곳처럼 마음 편히 수련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마나 호흡, 최적화된 마법 수련, 은밀성, 공간의 자유도 등등
“소문이고 뭐고 해서 말이 많긴 하지만, 그거는 그거고.”
론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주위가 소란스럽건 어떻든 간에 할 일을 놓친다는 건 그만큼 정신이 흐리멍덩하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하는 마나 호흡, 정령사의 찬가가 그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풀어져 나갔다.
우우우웅.
찬가에 심취하면 할수록 서클이 맹렬히 회전하며 영맥의 마나들을 빨아들였다.
하나의 그릇이면서 엔진이고,
그 자체로 마나인 서클.
세월이 쌓이고 마법에 익숙해질수록 서클에 대한 감각이 더욱 선연해지는 듯했다.
‘이전 졸업생 브랜든이 그랬었지. 실패를 두려워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라고.’
당시 졸업 및 입학식 때는 그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꾸준함.
그저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만으로도 해당 영역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룬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배움과 성장에는 다 때가 있다고, 서른만 넘어도 무언가를 배우고 터득하기에는 늦었다고, 무슨 다 큰 어른이 궁상떨고 있냐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배움에는 끝이 없다.”
‘플라즈마 볼’
우우웅우웅.
도식화하는 일말의 과정도 없이 단번에 머릿속에서 복합마법진을 끄집어냈다.
일전에 피에타 유적에서 싸울 때와는 비교가 안 됐다.
정령사의 찬가로 다져진 서클이 세 개로 늘어나면서 마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회귀 전 5서클일 때와 거의 비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소 마법에 대한 숙련도 또한 올라갔고.
“성장에도 끝이 없다는 건가?”
나이가 들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하던 것들을 내려놓는다.
늙어서, 재능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생업 때문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어서, 가족이 원치 않아서 등등.
각양각색의 이유로 소망하던 것들을 그저 젊을 적의 추억처럼 고이 간직해 버린다.
그렇게 멈춰버리는 것이다.
우우웅우우우···.
마나 공급을 멈추자 복합마법진이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지겠지.”
정령사의 찬가와 회귀라는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여전히 팔십 먹은 노인네라 생각하고 내려놓은 채 살았다면 변화는 없었을 것이란 거다.
“문.”
구구구궁.
미로가 움직이는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나가는 문을 만들어 냈다.
특급 포션이 생기면서 예전처럼 마나 호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마나 포션까지 사면 5서클은 금방이다.
그냥 젊은 학생들의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슈아아악.
익숙한 회색깔 빛무리가 론을 도서관에 뱉어냈다.
“후우, 이 느낌은 언제 느껴도···.”
툭.
무언가가 팔꿈치를 닿는 느낌. 론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웬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어···. 안녕?”
미로에 들어가는 입구, 책장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곳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혹시 그쪽도 플라델의···.”
끄덕끄덕.
상대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미로에서 나오다 다른 사람과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일전에 처음 미로를 발견하고 이를 조사한다고 할 때, 드나드는 이를 몇 명 본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오가다 만날 확률은 극히 희박했으니까 말이다.
때문에 그들은 이내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오오, 그럼 1학년!”
“예. 뭐, 그렇습니다.”
밝은 회색깔 머릿결이 묘하게 눈길을 끈다. 아들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머리카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선···배님은 막 학기시겠군요.”
늘 존대를 하던 론이지만 이상하게 선배라는 단어는 입에 익지 않았다.
“그렇지. 그런데 너 정말 대단하다! 1학년 때 플라델의 미로라니! 나는 그때 아카데미 수업 따라가는 것도 바빴었는데, 참.”
마지막 학기를 보내는 그녀는 꽤나 에너지가 넘쳤다. 회귀 전 론은 졸업할 때까지 3서클에 이르지 못해 쩔쩔맸던 걸 생각하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뭐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운은 개뿔.”
“...”
“야, 대선배 플라델님께서 미로를 무슨 운 좋으면 들어오게, 그렇게 허술하게 만드셨겠냐? 엉?”
플라델에 대해 말하는 뉘앙스가 누구와 비슷하다. 론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상급생이 손을 내밀었다.
“라리사야. 라리사 케스케이드.”
난데없는 자기소개.
허나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가문을 무시하는 것이었기에 론도 대답하려 했다.
“론 스펜서 입ㄴ···.”
‘케스케이드?’
분명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당연히 들어봤다면 회귀 전이었을 것이기에 론은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
무의식적으로 중요한 정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론의 반응에 라리사의 고운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이것 봐라. 1학년이 미로에 들어왔다고 아주 선배를 무시하네? 아하! 3학년 늙탱이는 어짜피 꺼질 건데 왜케 유세질이냐?”
라리사는 자기가 말하며 더 기분이 나빠졌는지 점점 언성이 높여갔다.
“아주 대단한 1학년 나셨네에! 뭐 론 스펜서? 내가 아주 잘난··· 음? 론 스펜서···, 론···.”
라리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가 갑자기 론의 양어깨를 콱 쥐었다.
“너가 그 론 스펜서야?”
“에, 예?”
“아니 그 중급 몬스터를 잡았느니 어쨌느니 하는 보고서의 주인공이냐고!”
“아, 예. 맞습니다.”
“허! 그래서 왕실 간담회도 갔다 왔고?”
“예.”
“야, 아니 론. 그럼 그것도 진짜야?”
“뭘 얘기하시는 건지···.”
“뭐긴! 진짜 중급 몬스터를 잡았냐는 거지! 왕실 간담회가 어디 장난감 왕국 왕실 간담회도 아니고, 어느 정도 진위가 가려졌으니 갔다 왔을 거 아냐.”
‘호오···.’
오래간만에 정상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줄곧 오해만 받아왔던지라 괜히 기분이 좋아진 론이 손을 내밀었다.
우우웅우웅.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
“헉!”
푸른 빛을 발하는 정사면체.
론이 토벌 때 썼던 윈드 스피어 마법진을 그대로 만들어 냈다.
“억, 아니···. 한 손으로, 그것도 한 번에···.”
라리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3학년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그녀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이 정도의 숙련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복합마법진은 단일마법진과는 다르게 상당한 균형력과 공간지각력 그리고 정신력을 요구한다. 때문에 해당 서클의 마법사도 양손은 거의 필수였다.
그런데 눈앞의 론은 이를 한 손으로 펼쳤다. 게다가 도식화하는 과정도 없이 단숨에 심상에서 끄집어냈고. 현 3학년 중에서도 이렇게 펼칠 수 있는 학생은 없다.
“미친···.”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완연한 3서클 혹은 그 이상.
하지만 그는 고작 1학년이었다.
‘그럼 뭐 고작 열여섯에 4서클이라도 되려는 거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득해지는 기분에 라리사는 이내 곧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허, 사실···이구나.”
갑자기 급 조용해진 라리사.
“크흠, 예···.”
론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시기 질투가 아닌 압도적 차이로 인한 허탈감이 큰 듯했다. 어떻게 얘기해주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팡팡!
그녀가 갑자기 론의 등허리 후려쳤다.
“윽, 갑자기 왜 때리고···.”
“야! 1학년이 이 정도면 엄청 잘난 건데 왜 니가 주눅이 들고 있어!”
“주눅이 아니라, 그쪽이 침울해 있으니···.”
“흐응···.”
라리사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론을 쳐다봤다.
“너 잘됐다.”
“예?”
“이왕 이렇게 만난 거 나 좀 도와줘.”
순간 론의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갑자기 뭘 도와달란···.”
“졸업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