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50
사람은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큰 교류를 하지 않더라도 특정 집단에 소속되면 같은 집단의 이들을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집단 특유의 느낌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각으로 보았을 때, 지금 론 앞에 있는 무리는 절대 자신들과 같은 동기가 아니었다.
2학년 아니면 3학년.
즉 학년 선배들이었다.
“하아···.”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옆에 있던 크루딘이었다. 그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좀 조용해지나 싶더니···.”
‘벌레 새끼들이 또 지랄하네.’
허나 앞선 식사 시간에 자중하자는 론의 말 때문에 그는 뒷말을 꾹 삼켰다.
“무슨 일이십니까?”
론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응했다.
모름지기 이렇게 불순한 의도가 가득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틈을 줘서는 안 됐다. 별 시답지 않은 것으로 물고 늘어지며 부풀릴 게 뻔하니, 차라리 이쪽에서 노리는 게 낫다.
놈들이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들게끔 말이다.
피식.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상급생이 비소를 흘렸다.
“듣던 대로 아주 의뭉스럽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론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일행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샤코린.”
상급생이 툭 뱉었다.
마법 이론 수업 때 있었던 일을 두고 얘기하는 듯했다.
“샤코린? 아아, 그 혹시 우리랑 같이 강의 듣는 학생 중에 걔 말하는 건가?”
론의 연기에 크루딘이 씨익 웃었다.
의뭉스러운 거야 오히려 저 상급생들이었는데, 이를 똑같이 갚아주니 꽤나 볼만 했던 것이다.
“그랬던 거 같네. 얼굴은 가물가물 기억은 잘 안나지만 말야.”
그렇게 론과 크루딘이 모르는 척하며 말을 주고받자 이제껏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던 상급생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밀로 히르가스.
마법진 활용 연구회의 회장이었다. 현재 3학년생으로 3서클이었다.
그런데 고작 1학년이 자신들을 상대로 장난을 쳐대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정말 길들이기엔 글러 먹은 새끼들이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선배한테 하는 꼬라지 하고는.”
“그냥 바로 처리하지, 밀로?”
겉으로는 마법진 활용 연구회지만, 실상은 예런 백작가의 친목 집단. 그 집단의 학생들이 하나둘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에 밀로도 동감했는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샤코린 루디오스. 우리 마법진 활용 연구회의 회원이었다. 네놈들이 그짝으로 만들었다지?”
“아아, 그 샤코린이었구나!”
크루딘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반응했다.
“흥, 이제 기억이 나나 보지? 감히 우리 회원을 그렇게 만들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거라 생각했느냐?!”
“상급생분들. 일단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샤코린을 그렇게 만든 건 우리들이 아니라, 바로 저 혼자 했습니다. 그리고 엄연히 강의 시간에 시범을 보이다 그런 거죠. 그것도 ‘상호 합의’하에 말입니다.”
그새 론의 말투를 습득한 크루딘이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면서 살살 긁어댔다. 그러고는 입을 가린 채 론과 사티넬 쪽으로 속삭였다.
“아, 근데 걔 너무 수준이 낮더라. 쯧쯧쯧···.”
물론 다 들으란 듯 커다란 목소리로 말한 건 덤이었다.
“이익!!”
“저, 저새끼가!”
몇몇 다혈질의 상급생들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려고 했다.
“기다려.”
“밀로!!”
“저 녀석들이 지금···.”
“너희들이야말로 지금 고작 1학년들의 도발에 넘어갈 셈이냐? 더 이상 플라츠···크흠, 흠! 연구회를 욕보이지 마라!”
씩씩거리는 무리를 잠재운 밀로가 다시 고개를 돌려 론 일행을 쳐다봤다.
“1학년생 주제에 아주 건방져. 긴말 안 하겠다. 사과해라.”
“무얼 말입니까?”
이번에는 론이 나섰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손을 들썩이며 정 모르겠다는 듯 연기했다.
“상호 합의란 말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아! 혹시 그 사카린 학생의 상태 때문에 그런가? 아까 사카린 학생이 어떻게 됐다고 했었죠, 크루딘?”
론의 연기에 크루딘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아, 그게 말이지. 자기는 다 막을 수 있다고 장담을 하길래, 어스 스피어를 날렸거든. 근데 이게 웬걸? 녀석의 흙벽이 뚫려버렸네? 아 맞다! 그러고 나서 사카린의 앞니도 죄다 뽑혔다.”
“아이고! 쯧쯧쯧···. 운이 없었군요.”
“그러니까 말야. 애초에 실력이 없었으면 나서지나 말 것이지 왜 나서가지고.”
크루딘은 일부러 마지막 말은 상급생들을 쳐다보며 내뱉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란 얘기였다.
“하! 하하하!”
이제껏 이성을 유지하던 밀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새끼들이 아주 대놓고 무시하는구나. 뭐 샤코린도 아니고 사카린? 실력이 없어?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이! 감히 우리 연구회를 건드리고 편히 아카데미 생활할 줄 알았나?”
휘유.
론이 휘파람을 불었다.
협박성 폭언. 이쯤 하면 됐다 싶어 론이 크루딘을 쳐다봤다. 이제는 눈치 볼 필요 없다는 얘기였다.
“못 할 이유라도 있겠습니까.”
“거기, 나잇살 더 처먹은 상급생분들. 뭐 얼마나 대우를 받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거 과거 일을 따지고 싶으면 제대로 확인부터 하고 와라. 덜떨어진 병자도 아니고 엄한 데 와서 화풀이 질이야? 앙?”
“분노조절장애는 이성적 사고에 있어 상당히 유해한 요소죠. 조기 치료 좀 해드려야겠군요.”
크루딘에 이어 론도 지지 않고 밀어붙였다. 지금이야말로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은 확실했다.
“그냥 다 조져! 팔이든 발이든 병신으로 만들어서 다시는 세상 밖에 못 굴러다니게 해버려!”
이제껏 제일 점잔을 빼던 밀로.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고 이에 상급생 일당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미리부터 예상하고 있던 론은 크루딘과 사티넬에게 눈빛을 줬다.
상대는 총 7명.
샤코린의 얘기부터 해서 3서클 마법에 훈수 두는 것을 봐서는 적어도 3서클 같았다.
허나 뭐가 됐든 론은 상관없었다.
자신의 심장에서 회전하고 있는 세 개의 서클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출력 속도든 크기든 뭐든.
그리고 함께하는 크루딘 사티넬도 보통이 아니었고.
피식.
얼마나 잘난 능력으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좀 차릴 필요는 있지. 1학년 몇 상대하겠다고 우르르 몰려와서 뭐 하는 짓거리인지···.’
일곱 명의 상급생들이 가슴팍에 양손을 올리고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 존나 느리네! 나잇살 좀 더 처먹었다고 유세 떨더니만. 아아! 그렇게 쳐 느리니까 봐달라는 거였구나? 푸하하하!”
“크윽!!”
크루딘의 뻔한 도발에 상급생 몇몇의 마법진이 흔들렸다. 시작부터 살살 약 올렸던 게 겹치고 겹치니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이미 평정심과는 거리가 멀어진 그들이었다.
이에 론은 재밌는 상황이 떠올랐다.
우우우웅우웅.
그의 손에서 빠르게 복합마법진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는 상급생들의 그것보다 훨씬 빨랐다.
명백한 숙련도 차이.
이에 상급생들 무리에는 또다시 혼란이 가중됐다.
씨익.
그런 그들을 보며 론은 마법진을 가동했다.
‘에어로 봄.’
슈우우웅.
상급생들의 마법이 튀어나오기 직전, 그 절묘한 타이밍에 론의 마법이 먼저 날아갔다. 목적지는 저기 저쪽, 그나마 마법진 형성을 제대로 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퍼어엉.
“크하아악!!”
“커헉!”
집약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서너 명이 쓰러졌다. 물리적 피해뿐 아니라, 마법 파훼로 인한 정신적 충격까지 동시에 받는 바람에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극, 그르륵···.”
거품을 문 채 기절한 놈, 눈을 까 뒤집은 놈, 벌벌 몸을 떨며 발작 증세를 보이는 놈.
아주 볼만했다.
‘음?’
언제부터였을까.
뒤에 있던 사티넬이 상당량의 마나를 풀어낸 채 체외서클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고, 사티넬 그것까지···. 이거 원 전혀 상대가 안되는군.’
일전에 그녀가 선보였던 대규모 원소마법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냥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다.
하지만, 남은 상급생을 처리하는 것은 그런 사티넬도, 론도 아니었다.
“이게 바로 실드 차지라는 거다. 이 나이만 처먹은 것들아!”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기사 혹은 용병이 들 법한 카이트 실드 모양의 어스 실드를 두른 크루딘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게티아에서 그가 선보였던 것보다 한 차원 높은 3서클의 그것이었다.
콰앙.
쾅.
콰아앙.
몇몇 스피어류 원소 마법이 날아왔지만, 같은 서클에다가 남다른 숙련도를 지닌 크루딘의 어스 실드는 뚫지 못했다.
그러고는 그의 특기.
마법을 유지한 채 신체 기능까지 추가했다.
퍼억.
“컥!”
후우웅 퍽.
“켁!”
쿠우웅.
“끅···.”
단단한 방패 모서리로 상급생들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찍어버렸다.
“하여간 입터는 것들 치고, 제대로 된 새끼들이 없어. 꼴에 나이 처먹었다고 꽁으로 대우 받길 원하는 새끼들은 더 병신이고.”
탁 탁.
크루딘이 고개를 저어대며 손을 털었다.
“에휴, 괜히 기분만 잡쳤네.”
그런 그의 뒤에는 상급생들이 하나같이 머리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음···. 어떻게 하시겠어요?”
사티넬이 물었다.
“일단 확인 좀 하죠.”
론이 널브러진 상급생들 사이로 지나갔다. 그가 염두에 둔 이는 정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대장 놀이를 하던 놈.
밀로의 앞에 다가간 론이 쪼그려 앉았다.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끄으윽···.”
에어로 봄에 의한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쯧! 워터.’
우우웅.
츄아아악.
“커헉! 컥!”
론이 그의 얼굴에 물을 그대로 쏟아부었다.
“뭐 때문에 그런 거냐고 물었습니다.”
“크흑···. 이러고도 아카데미에 잘 다닐 수 있을 거 같아?”
밀로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협박했다.
‘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이었다면 이럴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러지 않았을뿐더러 이런 귀족 집단들과 대치할만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럴만한 실력도 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과는 다른 상황들이 계속 펼쳐졌다. 그리고 그렇다고 물러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힘과 실력.
그리고 거기에 재력도 지식도 추가됐다. 게다가 더없이 든든한 국왕의 지지까지도.
꾸우욱.
론이 지긋이 그의 손가락을 밟았다.
최대한의 무게를 실어서.
“끄아아악!! 놔! 놓으란 말이다!”
“제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대답을 아직 못 들었는데, 뭐 때문에 그랬다구요?”
우두둑. 둑.
“으아아악!! 미, 미친 새꺄!! 아파!!!”
“예, 아프라고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뼈도 부서지겠죠. 그렇게 되면 치료될 때까지 마법도 제대로 못 펼칠 텐데 괜찮겠습니까? 머리가 있으면 그 정도는 알 거 같은데 말이죠?”
론이 발에 힘을 조금 뺐다.
“끄흑윽, 나한테 왜 이러는데···흑···.”
애들 아니랄까 봐, 뼈 좀 부서진다고 아주 질질 짜댄다.
“뭐 때문에 이 소란을 피우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아카데미에 떠도는 저희 소문이나 굳이 훈련장까지 와서 겁박을 놓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론은 그간의 소문을 이들이 그런 것으로 단정 지어 버렸다.
‘아니면, 뭐 말하겠지.’
그리고는 다시 밀로의 손가락을 밝았다.
“끄아아아악!!! 프! 플라츠님이 시켰다! 크윽!!”
“플라츠? 그 플라츠 예런?”
“그, 그래!”
플라츠 예런.
딱히 이렇다 할 일면식은 없지만, 론도 알고는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바로 학년 수석.
1학년이고 첫 학년 수석이었던 만큼, 신입생들에게는 재밌는 이야깃거리였다.
“플라츠···. 이건 좀 생각 못 했네.”
딱히 큰 비중을 차지하던 학생은 아니었다. 2, 3학년 때의 수석은 다른 이였을뿐더러 회귀 전 전혀 연이 없었다.
그나마 주의해야 할 건 그의 가문 정도.
‘예런 백작가라···.’
군수보급청을 쥐고 있는 가문으로, 가진바 세력이 꽤나 커다랗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밀릴 거 같지가 않았다.
씨익.
저도 모르게 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잠시간 생각을 하던 론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와우···론! 뭐 간담회서 드래곤 하트라도 먹었어? 왜 이렇게 애가 무자비해졌대?”
“음? 크루딘, 당신이 늘 말하던 정당방위잖습니까? 뭘 새삼스럽게.”
“하아···. 론님까지···.”
사티넬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런 그녀를 다독이며 자리에서 벗어나려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크흑, 두고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