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49
실력 지상주의.
아들렌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명이다.
신분과 혈통이 아닌 실력을 우선해 인재를 기용하는 것. 약 300년 전부터 시작된 아들렌의 오랜 대계(大計)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왕실의 의도가 왕국 전역 그리고 모든 부처에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아들렌.
그 시초는 수많은 영주가 하나의 대영주를 왕으로 옹립하면서부터였다. 자그마치 700년 역사였다. 그사이 적지 않은 가문이 흥하고 쇠하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오롯이 존재한 왕가만큼이나 그 권세를 잃지 않은 가문도 있었다.
바로 예런 백작가.
시작은 분명 무가였다. 검을 다루고, 전쟁에 활발히 참여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시대는 점점 바뀌었고 어느새 왕국은 마법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자본이 들어갔고, 마도사를 비롯한 마법 인재를 앞세우며 통치 방식에 변화를 꾀하였다.
그 분기점.
당시의 예런 백작가의 가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날붙이의 시대는 가고, 마법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는 똑똑히 봐왔었다. 수많은 가문이 도태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그래서 그는 결정했다.
도태되어 사라지느니 차라리 오랜 검병을 잠시 내려놓기로.
방계는 물론이고 직계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가문의 운영을 선회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
바로 물자 보급이었다.
무가 가문으로서의 체제는 유지하되, 최우선 운영 과제에 다른 것을 배치했다.
많은 이들이 비웃었다. 사자가 갈기를 깎고 사슴마냥 풀을 뜯는다면서.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예런 백작가의 철통같은 권세가 되었다.
군수보급청.
수백 년에 이르는 보급 체계를 그들이 거머쥐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왕실 인재가 있다 한들 수백 년간 다져진 시스템은 감히 교체하기는커녕 손댈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규모는 아카데미에까지 스며들었다.
“플라츠님, 연구회 회원 모두 집합하였습니다.”
보조 마법학 건물의 한 강의실.
탁!
플라츠가 보고 있던 책을 접고는 고개를 들었다. 윤기 넘치는 금발 아래로 또렷한 청색 눈동자가 좌중을 훑었다.
열댓 명의 학생들.
그들은 마치 상전을 모시듯 부복한 채 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1학년은 둘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2, 3학년이었다.
“샤코린이 당했다. 모욕을 서슴지 않더군.”
“발칙하기 짝이 없습니다. 플라츠님, 저희가 놈을 처리하겠습니다.”
상급생 중 하나가 말했다.
연구회의 집합 전에 이미 상황 전달을 받은 상태였다.
론 일행의 토벌 보고서 건을 들춰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후에 손을 뻗어 거둬들이기로 했던 계획.
그런데 난처하게 만들기는커녕 샤코린이 그 일행에게 당해버렸다. 듣기로는 앞니가 다 뽑혀 나갔단다. 그것도 플라츠가 동석한 강의 시간에 말이다.
때문에 그 크루딘이란 놈을 처리하려 했던 것인데,
플라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종자가 글러 먹었어. 끼리끼리들 논다고, 주인은커녕 제가 주목받고 싶어 날뛰는 근본 없는 것들이다. 론이고 뭐고 그냥 다 처리해.”
“예!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부복하는 상급생들이 비소를 흘렸다.
최우선 영입 대상이었던 론.
도리어 처단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는 곧 그 자리가 비었음을 의미했다.
예런 백작가가 상당한 세를 이룬 만큼 따르는 가신도 많았는데, 그 가신들의 자제가 바로 이들, 연구회 회원들이었다.
“후우, 인재 하나 들이기가···.”
플라츠는 상급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아카데미에 가면 마법진 활용 연구회라고 있을 거다. 가문과 가신 자제들의 모임이다. 가서 쓸만한 애들이 있으면 거두거라. 후에 세력을 일구는 데 도움 좀 될 게다.’
플라츠의 아버지이자 현 예런 백작가의 가주, 다비드 예런이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런데 영 모르겠단 말이지. 쯧.’
플라츠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들 중 딱히 수재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성적도 성품도, 교활함도 다 고만고만했다.
그렇게 회원들의 평을 늘어놓던 플라츠는 문득 샤코린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름 수재라 생각한 그가 크루딘에게 당했다. 정확히는 복합마법진, 3서클 마법에.
서클의 차이는 확연했다.
“밀로.”
“예, 플라츠님.”
“3서클로만 추려서 가라.”
“3서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아카데미에 발을 못 들이도록 여론도 싹 다 조져버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학생들이 물러나고 플라츠 옆에는 단 한 명의 1학년생만 남았다. 하인처럼 부복한 채 대기하는 그를 무시하며 플라츠는 강의실의 창가를 바라봤다.
오후의 햇살이 아카데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것들이 감히···.’
남은 오후 수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학년 수석까지 차지하며 그리 모범생 흉내를 내었건만, 왕실 간담회는 물 건너 가버렸다. 바로 론 때문에.
거기까지는 어떻게 참아보려 했다.
꽉 막힌 놈들보다야 꼼수도 부릴 줄 아는 교활한 놈이면 여러모로 쓸모도 많을 테니까 말이다. 그 정도는 교육해서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놈의 일행이라는 크루딘이 샤코린을 피떡으로 만드는 순간, 플라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호의는 사라졌다.
위의 존재를 무는 것들은 교육이 불가능하다.
“제 발로 나가게 해주지.”
***
다시 돌아온 아카데미.
럼블은 오자마자 총장실로 가버렸기에 론은 홀로 아카데미 부지를 걷고 있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흉흉했다.
정확히는 론, 그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디 설명해 줄 사람 없나?’
그런 생각도 잠시,
이내 그 구원자가 보였다.
“어이, 론. 웰컴 투 헬.”
크루딘이었다.
“하아···. 무슨 사고를 또 친 겁니까?”
“으응? 이봐 론. 이번에 정말 정당방위였다고! 그리고 심지어 먼저 얘기한 것도 제르마 교수였어!”
“제르마 교수님이요?”
정당방위 어쩌고 하는 건 크루딘에게 전혀 신빙성 없는 단어였으니 무시한다 쳐도, 뒤이어 말한 제르마 교수는 아니었다.
미간을 찌푸린 론이 그 옆에 다행히 붙어 있는 사티넬을 쳐다봤다.
설명해달라는 얘기였다.
“어···그게 말이죠. 하하···.”
오후 마법이론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그녀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니, 사티넬! 거기서 그렇게 설명하면 안 되지! 그 쥐새끼 같은 사카린인지 슈크림인지 하는 놈이 먼저 살살 긁었잖아!”
“크루딘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어도, 문제는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에엥?”
“샤코린은 그간의 소문을 바탕으로 충분히 논리적으로 접근했잖아요. 그것도 어떻게 딱 3서클 복합마법진 마법을 예로 들면서요. 그리고 그 증거가 강의밖에 모르는 제르마 교수님이 제제를 안 하신 거였고요.”
“끄흥···.”
크루딘의 반론을 아무렇지 않게 잠재운 사티넬이 이어서 설명했다.
“그래서 아무튼 크루딘님이 샤코린의 제안에 응했고, 서로 합의하에 마법 시범을 펼쳤어요. 대결로요. 결과는 당연히 크루딘님이 3서클 마법으로 찍어눌렀고요. 좀 심하게 찍어누르긴 했지만요···.”
“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당장 건물 몇 개를 지났을 뿐인데, 간간이 들리는 소리를 종합해보면.
‘허위 보고서를 작성한 삼인방 중 론 스펜서라는 학생이 왕실 간담회에 갔다.’
‘학년 수석은 따로 있는데, 허위 보고서로 되지도 않는 신입생이 간담회 자리를 강탈했다.’
‘올해 골든스태프 대회가 열린다고 아주 가관이다.’
‘귀족 망신은 론 스펜서가 다 시킨다.’
‘이를 방관한 아카데미 시스템에는 문제가 있다. 행정 직원의 문제냐 아니면 아카데미 교수 문제냐. 그도 아니면···.’
“후우···. 일단, 저녁부터 좀 먹고 생각해 보죠.”
그 논란의 보고서 때문에 론은 오전에 분명 럼블과 브뤼센 영지에 갔었다. 당시 럼블도 인정했기에 앞으로 잘 풀리겠지 하고 낙관했었는데, 어째 굴러가는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오오, 어떻게 딱 페퍼치킨이 나왔네. 크으! 이것만큼 스트레스 풀기 좋은 음식이 없지! 암!”
과연 스트레스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크루딘. 그가 콕콕 음식을 찍어 입에 넣었다.
‘하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지.’
단순 명료함을 되새기며 론 또한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툭.
누군가 지나가며 론을 건드렸다.
“아카데미에 범죄자가 있으면 누가 잡아가지?”
“같은 수도니까 수도 치안대겠지.”
“그럼 저~기 있는 사기꾼은 왜 안 잡아가나 몰라.”
“그러게 말야. 아카데미가 무슨 범죄자 수감소도 아니고 쳇! 괜히 나까지 질 떨어지는 거 같잖아!”
꾸욱.
크루딘이 쥐고 있던 포크가 휘어졌다.
“참으십시오.”
“하아···. 한 딱가리도 안 되는 것들이 진짜···.”
“맞아요. 크루딘님, 참으세요. 아까 샤코린 때는 그래도 강의 시간이었으니 망정이었지, 합당한 이유 없이 싸움을 벌이는 건 좋을 게 하나 없어요.”
“합당한 이유? 방금 들어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저새끼들이 확인도 안 하고 우리를 사기꾼 취급하잖아!”
“실명을 거론한 것도 아니라서 잡아떼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론이 이렇게까지 안 좋으면, 뭘 해도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구요. 그냥 참으십시오.”
“하아, 진짜 별 잡것들이···.”
그런데 과해도 너무 과하긴 했다.
고작 하루였다. 마법이론 강의를 기준으로 하면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소문은 불붙듯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게다가 1학년도 아닌 2, 3학년에게까지 퍼졌다는 건 뭔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했다.
“정말 오후 마법이론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 맞습니까?”
“엉, 난 아까 분명 정당방위였다고 말했다.”
“네 맞아요. 제르마 교수님의 마법이론 수업이요.”
짐작건대 이는 단순히 불쾌해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음해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집단이 끼어있는 게 틀림없었다.
“당분간 어디 흩어지지 말고, 같이 다니죠.”
“맨날 그랬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네! 알겠어요!”
***
평소와 같은 마법 수련이었다.
저녁때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다 빈 훈련장을 발견하면 밤늦도록 수련을 하는 그런.
그렇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수련 중이었는데, 주위에 조금 있던 사람들이 슬슬 사라졌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인가? 아홉 시도 안 됐는데 다 가네.”
“그러게 말이에요.”
허나 의아함은 잠시뿐이었다.
물과 불, 바람과 흙.
기초 원소 마법이 다시 피어나고, 이어서 복합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훈련장을 채워나갔다.
“사티넬, 기초 원소 마법은 이제 충분하고, 복합마법진으로 넘어가도 될 거 같습니다.”
“아, 그래요?”
“네 충분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정사면체는 알고 계시죠? 한 번 봐 드릴 테니까 해보세요.”
“아, 네! 그러면 한 번 해볼게요!”
“오오, 샤티네엘~”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크루딘이 쫄래쫄래 다가왔다. 자고로 싸움 구경과 성장하는 모습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크루딘님, 저 진지해요. 방해하지 마세요.”
“오오, 기세 좋고.”
“진짜···.”
“뭐, 왜? 아무것도 안 했구만.”
결국 크루딘은 사티넬의 가자미눈을 보고 나서야 두 손 들며 물러났다.
‘기초 정사면체.’
사티넬이 최근 들어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암기한 그것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각각의 면에는 원형 진이 있고, 그 안에 마법식들이 새겨져 있었다. 원소 변환식이 새겨진 면부터 밀도조절, 크기 변환 그리고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융화식이 바닥에 배치된 구조.
침착하게 선들을 그려나갔다.
하나, 둘, 셋···.
총 여섯 개의 선들이 이어지고, 각각의 면들이 정삼각형을 이루며 맞닿았다.
‘오케이, 일단 정사면체의 마법진은 완료.’
론이 괜찮은 시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티넬은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한 손으로 정사면체를 고정하듯 붙잡은 채 남은 손으로 진 속에 마법식들을 배열해나갔다.
‘하나씩, 하나씩···.’
단일마법진, 2서클 마법이었다면 단숨에 가능했겠지만, 복합마법진은 아직 미숙했다.
‘원소 변환.’
‘밀도조절.’
‘형태 변화.’
‘융화···.’
하나하나 마법진에 새겨가던 사티넬의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정사면체의 밑면, 바닥만 채우면 끝나는 것이었기에 그녀도 속이 타들어 갔다.
우웅우우웅.
우웅.
우우웅.
하지만 그런 그녀의 떨림은 이내 복합마법진에도 이어졌고, 정사면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팡!
“윽···.”
마치 유리창이 깨지듯 정사면체가 부서져 버렸고, 그 충격이 고스란히 사티넬에게 전해졌다.
“하아, 하아···.”
“처음치고 그래도 정말 잘했습니다, 사티넬. 이제 연습해서 한 면만 채우면 되겠군요.”
“하아, 하아···. 네.”
“오, 오오~ 역시 사티네엘~”
피식.
시도 때도 없는 크루딘의 장난에 결국 사티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거기 애송이들. 3서클은 그런 게 아니다.”
웬 생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향하는 대상은 뻔했기에 론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일단의 무리가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