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40
시중에도 상급 몬스터를 재료로 한 회복 포션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주재료가 만드리안 트롤인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만드리안 트롤은 그 피에 담긴 독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독성을 없애다 보면 어느새 그 강력하던 세포재생성분까지 사라졌다.
해서 만드리안 트롤이 상급 몬스터 중 가장 뛰어난 재생력을 가졌음에도, 모든 포션 업계가 그 트롤만은 포기했다.
그런데 의문의 양피지 내용대로 제조하니 가능하단다.
과거 연금술을 전문적으로 다룬 벨데레르 마탑이 있을 적에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머라이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이미 신마전쟁 때 완전히 지워졌으니까.’
세상의 수많은 집단이 흥망성쇠를 겪는다지만, 신마전쟁 당시는 정말 말세라 일컬어졌다. 적지 않은 세력과 집단들이 물에 쓸려나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벨데레르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신계의 세력이 이기고 어둠의 세력은 저 깊은 심연 아뷔메르에 갇히면서, 이 땅의 질서는 유지됐다.
아무튼 이런 까마득한 이야기를 머라이센이 떠올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만드리안 트롤 포션이 벨데레르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투자할 만했다.
아니, 반드시 투자해야만 했다.
딸칵.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긴 적막을 깨고, 드로고가 회의실에 들어섰다. 그런 그가 품에 안고 있는 작은 목함. 누가 봐도 앞서 말한 만드리안 트롤 포션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먼저는 직접 효능을 보실 수 있도록 영지 내 부상자들을 좀 찾아봤습니다.”
“호오?! 꽤나 준비 좀 했군. 에레드.”
“하하, 뭐 자식 놈이 다 한 거지요.”
“나트람, 들여보내게.”
“예, 소가주님.”
이윽고 하인들이 한 환자를 들것에 싣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에레드가 있는 상석 쪽 탁자에 조심스레 환자를 올려놓았다.
“얼마 전 지붕 보수 작업 중에 미끄러져 낙상을 당한 영지민입니다. 보다시피 머리가 찢어지고 다리는 부러져 부목을 대고 있죠.”
“흐음···. 그렇다면 저런 열상(裂傷 : 피부가 찢어져 입은 상처)과 골절을 다 치료할 수 있다는 건가?”
현재 유통되고 있는 회복 포션들로도 가능한 범위였으나, 골절의 경우 상급 포션이 아니면 자가 치유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상급 포션을 먹는다 해도 회복되기까지는 수일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실은 제가 스스로 수도 없이 시험을 해봤습니다. 하하하, 일단 한 번 보십시오.”
에레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로고가 천천히 환자의 머리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진물과 피가 섞인 딱지. 그리고 커다랗게 벌어진 상처가 훤히 보였다.
그런 환자에게 드로고가 목함에서 병 하나를 꺼내 그대로 입에 넣어주었다.
“끄흐응···.”
신음을 흘리는 것도 잠시.
이내 환자는 편안히 호흡을 이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의실에 있던 이들의 눈에도 벌어진 상처가 아무는 게 눈에 보였다.
“오오!”
“허허허.”
마지막엔 나트람이 와서 젖은 수건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냈는데, 더 이상 머리에 상처 따위는 없었다.
상당한 회복력.
회의실 내에 감탄이 오갔다.
이후 에레드는 부목이 덧대어진 다리 쪽 붕대도 풀었다. 허나 그곳은 아직 푸르딩딩한 색을 띤 채 살이 부어있었다.
“보시다시피 골절은 즉각 치료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환자는 어르신들이 계시는 동안 저택에 있을 겁니다. 치료 추이를 함께 지켜보시죠.”
“껄껄걸, 열상 치료만 봐도 충분허이.”
“그러게 말일세. 외상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라우리카 상급 포션도 저 정도 속도는 아니야.”
“허허, 이거 말년에 포션 명가 소리라도 듣는 건가. 껄껄껄.”
“그 론이라는 꼬맹이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구먼. 가문의 보배야, 보배!”
사실 회의가 시작되기 전,
이미 검사는 충분히 마쳤었다.
에레드가 자신의 몸부터 시험해보는 걸 시작으로 어느 정도 확신이 서자 영지민들의 치료도 나섰다.
그 결과 효능은 상상 이상.
가벼운 찰과상은 물론이고 심한 열상, 타박상, 골절상 등 외상뿐 아니라 온갖 내상 및 질병까지도 회복시켰다.
마나 각성 효과를 제했음에도 특급 포션은 과연 특급 포션이었다.
회의는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흘러 이틀 만에 골절상까지 회복한 환자를 보고는 더 이상 이견은 없었다.
사업은 빠르게 추진되었다.
특히 방계 인사 중 머라이센이 이를 좋게 봐줬기 때문이다.
“상인이기 전에 마법사인 제가 봐도 이건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시되는 순간 군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마법사들이 연구용으로 사갈 겁니다.”
“하하하, 그 정도인가?”
“예, 그렇습니다. 가주님. 이제껏 없던 상급 포션이지 않습니까? 회복력은 말할 것도 없고, 회복 범위 그리고 원천 재료가 되는 만드리안 트롤까지. 어느 것 하나, 마법사들의 구미가 안 당기는 부분이 없습니다.”
“뭐 머라이센,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런 거겠지.”
에레드는 그의 아버지가 살아생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사업 같은 건 귀찮아서 담쌓고 지냈지만, 만약에 네가 사업 쪽에 관심이 있거든 부르카 일가와 같이 하거라. 내 좀 알아보니 대충 그저 그런 상가가 아니더구나.’
부르카 일가의 부르카.
그는 머라이센의 조상이었다.
그리고 오래전에는 그 또한 가문의 직계 중 한 명이었고.
아무튼 현시점 부르카 일가의 대표는 머라이센이었다. 이제 서른 후반이지만 꽤나 입지를 다졌더랬다.
론과는 다른 분야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진 세력. 시기가 시기인지라 머라이센을 향한 에레드의 시선은 더 없이 호감 가득했다.
**
에레드와 머라이센이 머리를 맞대고 사업을 추진하는 사이, 론은 그제야 포션 제조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게···뭡니까?”
“아아! 그···레비 아가씨가 잘 어울린다고 해서···.”
마법 수련을 위해 저택 뒤편에 모였는데, 사티넬이 좀 바뀌었다.
고급스러운 실크에 금이 수 놓인 헤어밴드와 보석이 은은하게 박힌 귀걸이. 게다가 목을 감싼 레이스 초커까지.
액세서리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를 착용한 사티넬은 처음이었다.
화사했다.
고작 액세서리 몇 개일 뿐인데.
“괜···찮나요?”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돌리는 사티넬. 덕분에 가볍게 머리카락을 묶은 헤어밴드와 그 윤곽이 드러났다. 그리고 매끄러운 목선까지.
꿀꺽.
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큼! 흠. 아, 네. 뭐 괜찮네요.”
“정말요?! 하고 오길 잘했네요, 헤헷.”
아름다운 얼굴에 예쁜 액세서리.
그리고 거기에 수줍은 미소까지.
“삼위일체군.”
론의 입에서 웬 쌩뚱맞은 말이 튀어나오자, 사티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크흠!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 네. 그러면 마법 수련해 볼까요?!”
“그, 그러시죠.”
‘뭐지?’
팔십 먹은 노인네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감정에 론은 당황했다. 이를 애써 부정하며 마법에 집중했다.
그래도 마법에는 진심인 편이라 그런지 금새 잡념이 사라지고, 마법에 푹 빠져들었다.
불과 바람, 물, 흙, 돌 등 각각의 원소들이 제 존재를 뽐냈다.
그런데,
참 당황스럽게도 그 와중에 사티넬이 아른거렸다.
액세서리 때문이었을까.
론은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반짝거림.’
무언가에 홀리듯 론은 저도 모르게 4서클 원소 마법 중 하나인 빛을 꺼냈다.
한낮이었기에 그 빛이 발하는 효과는 미미했지만, 사티넬의 곁에 있으니 왠지 어울렸다.
‘마치 제 자리를 찾은 것 같···.’
“음?”
그런데 어째 사티넬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그러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다가왔다.
‘어어?’
사브작 사브작.
눈 밟히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어느새 그녀는 코앞이었다.
“론님, 정말 이상하네요.”
사티넬이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살짝 부담스러워질 때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아직···.’
“정말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아! 2서클인데 5서클 마법을 쓴 것도 말이 안 되긴 하구나···.”
갑자기 혼잣말하는 사티넬.
“그런데 혹시 3서클로 오르신 거예요?”
“네? 하, 하하···.”
뭔 생각을 했던 걸까.
순간 론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사티넬의 질문은 질문이었다.
‘아버지와 형님도 말하기 전까진 몰랐는데, 어떻게 안 거지? 역시 엘프는 다르다 이건가?’
“그게 느껴지십니까?”
“음, 네. 의식할수록 더 심하게 느껴지는 거 같네요.”
사티넬의 눈은 속일 수 없었나 보다.
결국 론은 얼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다만 특급 포션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상급 마나 포션이라고만 대충 둘러대면서 말이다.
“아···. 하긴, 5서클 마법까지 펼칠 정도인데 마나량만 받쳐준다면 3서클, 세 번째 고리를 엮는 건 어렵지 않으셨겠네요. 그래도 정말 대단하세요. 한 달 새 3서클이라뇨!”
“하하···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돌아와서요, 도대체 2서클 때는 어떻게 5서클 마법을 펼치신 거예요?”
“······”
사실 전에도 이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고작 2서클인 그가 어떻게 5서클 마법까지 가능했는지.
그런데 까놓고 보면 이미 이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이제껏 3단계 이상의 오버스펠을 한 사람은 역사상 없었다. 그 어떤 논리적인 설명과 증거가 있다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
그렇다고 회귀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론은 아예 대놓고 모호하게 말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사학 보어헨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오웬 그리브너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하죠! 약 500년 전 마계의 야욕을 막아내셨던 대마도사셨잖아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왜?”
“그때 교수님은 대마도사 오웬이 남긴 마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었죠.”
“기억나요, 오푸스리에··· 엥?!”
사티넬이 하던 말을 멈추고 이마를 찌푸렸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앞뒤 문맥상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론님. 혹시 그사이에 왕립 도서관에라도 갔다 오신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대신 다른 곳에서 그 마법을 봤죠.”
“다른··· 곳이요?”
고개를 갸웃한 사티넬.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깨달았는지 소리쳤다.
“아! 플라!”
“플라델의 미로에서요?”
그녀가 입을 가리고는 속삭였다.
“예 맞습니다. 미로에서 말해 봤는데, 보여주더군요.”
“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니 그렇다 해도 그걸 본다고 상위 마법을 막 쓸 수 있고 그런 건가요?”
“당연히 안되죠.”
“그럼 어떻게···?”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대마도사의 마법을 보고 있자니 깨달음이 오더군요. 해서 틈날 때마다 중간중간 연습했는데, 다행히 쓸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 하하···.”
단순한 쓸모가 아니었다.
그녀와 크루딘은 론 덕분에 5서클 마법사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늘 비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론.
플라델의 미로를 찾아내고, 학기 중 서클을 올리고, 오버스펠, 카운터 스펠, 피에타 유적의 숨겨진 방 등.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럴만한 사람이 그럴만한 일을 또 벌였구나 싶었다.
“정말···. 대단하단 말 밖에 안 나오네요.”
“뭐 대단한 걸로 치면 저보다는 사티넬이죠.”
후우우웅.
론이 작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허공의 한 점을 중심으로 회전시켰다.
“아···.”
사티넬의 입가로 힘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일전에 그녀가 선보였던 체외 서클을 형태만 그럴 듯하게 따라 한 것이었다.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천재마저도 엘프의 힘을 인정했다.
하지만 사티넬은 씁쓸했다.
희귀함이라는 건 때론 고통스럽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사실 그녀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고 아스테리아에 숨어지내듯 조용히 지냈던 이유를.
적당히 특별한 게 아닌, 마치 이 땅의 존재가 아닌 듯한 희귀함. 이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원하지 않아도 진실은 다가왔다. 그 씁쓸함에 사티넬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런데 이를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분위기를 환기하듯 론이 물었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없는 겁니까?”
“네?”
“오푸스리에로 환상을 통해 플라델님의 마법을 봤었거든요. 그런데 마법 발현 방식이 사티넬하고 비슷했습니다.”
“네? 정말요?!”
“네, 당시에는 그저 대마도사의 마법은 역시 다르구나 하면서 봤는데, 사티넬이 펼친 것을 보고 확신했죠. 둘이 방식이 상당히 흡사하단 걸요.”
“그렇다면 혹시! 플라델님도···.”
“그건, 아닐 겁니다. 외형이라면 제가 봤는데 사티넬이 생각하는 그쪽은 아니었습니다.”
“아···.”
혹시나 했는데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사슴처럼 동그란 눈동자로 기다리는 론을 외면할 순 없었다.
사티넬은 이내 자신의 마법과 마나운용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 또한 체외서클을 비롯한 전반적인 마나 운용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 것인지 정확히 몰랐다. 때문에 천재나 다를 바 없는 론에게 조언을 듣고 싶긴 했었다.
“그러니까 사티넬, 당신이 말한 걸 정리하면 마나 호흡 그러니까 마나운용법의 암송 구절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이 고대 엘프의 언어로 구성됐다는 점하고요.”
“네 맞아요.”
“흠···.”
론은 대략적인 번역본을 들었다.
엘프의 언어는 단시간에 배울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인데, 듣고 나니 확실했다.
이는 상식의 범주를 벗어났다.
마법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난 현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는 그 정도가 심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정말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안 되는군요.”
“신의 축복이요?
“사티넬도 알다시피 언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마법 주문의 영창이란 것도 실상은 심상과 마법식을 보조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로는 힘이 없습니다.”
“네, 그렇죠···.”
“그런데 사티넬. 당신이 피에타 유적에서 보여줬던 것과 지금 얘기한 걸 살펴보면, 이는 마치 엘프의 언어는 그 자체로 언령(言靈)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언령(言靈).
말 그 자체에 고유의 힘이 서리는 것으로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단어다.
그리고 그런 전설을 인용하자면,
말로써 이 모든 세상을 지어냈다는 신과 용언 마법을 펼쳤다는 용.
이 둘이 전부였다.
“언령···.”
“예, 언령이요.”
사티넬의 말을 받아주며 론이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됐군. 엘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