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37
아카데미의 방학은 두 달 조금 넘는 기간이다.
그런데 론은 동료들과 남부 탐방을 다녀오면서 이미 한 달 정도를 써버렸기에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후에 아카데미에 가는 일정도 고려하면 어떻게 보면 빠듯할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론이 사티넬에게 찾아갔던 것인데.
“저랑 이 근처의 산지에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산에요?”
“예, 험한 산지라 어릴 때 잘 안 가긴 했는데,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갈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아하! 그런데 눈도 오고 해서 설산인데 괜찮을가요? 북부에 있을 때는 눈사태도 종종 있었거든요.”
“아, 눈사태.”
역시 북부 대자연의 출신이라 그런지 사티넬은 자연에 대한 식견이 남달랐다.
“그런데 아무리 눈사태가 일어난다 한들 사티넬 양 앞에서는 그저 의미 없는 현상 아닙니까?”
론은 피에타 유적에서 사티넬이 보였던 엄청난 마법에 대해 떠올렸었다. 그것은 마치 플라델의 미로에서 봤던 대마도사의 마법과 비슷했다. 바로 체외 서클.
대기의 엄청난 마나가 그녀에게 공명하더니 그녀의 의지에 따라 마법을 뿜어냈었다. 특히나 마지막 대규모 어스 마법은 론이 5서클이었을 때도 차마 펼칠 수 없는 규모였다.
“체. 외. 서. 클.”
“로, 론님!!”
움찔한 사티넬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가에 선 그녀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은은한 백금발을 띤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짜 엘프의 후손이었으니까.
“그럼 같이 가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니, 저기 론님! 론니임!!”
다음날 날이 밝자,
론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 조용히 저택을 나섰다.
만드리안 트롤은 상급 몬스터다.
보통이라면 5서클 이상의 고서클 마법사와 오러 전문가가 붙어야 잡을 수 있는 놈인데, 론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회귀 전 흑마법사들이 뿌렸던 만드리안 트롤 공략법.’
당시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만드리안 트롤의 피와 사체를 구했었다. 그때는 그저 연구에 좀 필요한가 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들도 이 일지를 가지고 움직였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공략법은 그들 나름의 연구 결과였고.
그 어떤 직군보다 지적 탐구심이 높은 게 마법사다. 론 또한 그런 마법사 중 하나였기에 당시에 뿌려진 몬스터 공략법에 대해 잊지 않고 머리에 새겨두었었다.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일단 그럼 오르파 잎부터.’
저택을 나선 론이 찾아간 곳은 약초상점이었다.
“어디 아프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그래도 영주의 자제가 시장을 간다고 하니 나트람이 어느새 따라붙었다.
“뭐 그냥 아카데미에서 배운 약초학 연습도 할 겸···.”
“아아, 그러시군요.”
나트람을 입구에 세워놓고는 론이 상점 주인을 불렀다.
“오르파 잎이 얼마나 있나?”
“아이고! 도련님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오르파 잎이라면 예 있지요. 잠시만요.”
상점 주인이 내온 바구니에는 오르파 잎이 꽤나 있었다. 본래 이는 방향제 또는 해충들을 쫓는 데 사용하는 향초였다.
“아무래도 겨울이고 하다 보니 수요가 적어서 양은 좀 됩니다.”
“그렇군. 그럼 백 잎 정도만 주게.”
“백 잎.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오르파 잎.
그 하나뿐이었지만 준비는 끝났다.
론은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그래서 미시피 산지에 가겠단 말이냐?”
“예. 아버지”
“허허! 젊음의 패기가 아무리 좋다지만 미시피 산지라···. 드로고.”
“예, 아버님.”
“근래 미시피 산지에서의 인명피해는 없었느냐?”
“예, 아무래도 위험 지역이란 인식이 잡혀 있어서 그런지 노련한 약초꾼들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 작년에 따로 사상자라 보고된 이들은 없었습니다.”
“흐음···.”
에레드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놓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어느 순간 두각을 보이더니 어느새 아카데미 2등이란 성적까지 내온 셋째였다.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나름 열심히 하는 모습과 더불어 상당한 성취도 보였기에 어렵사리 중급 마나 포션까지 사놨었다. 그런데 론은 홀로 두 번째 서클까지 엮어서 가문으로 돌아왔다.
염려와 걱정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버린 셋째에 에레드는 긴 고민의 결론을 냈다.
“뭐, 네가 생각 없이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래 그럼, 그 검은 협곡만은 피해 다니거라. 뭐 처음 얘기하는 것도 아니니 충분히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검은 협곡.
아쉽게도 론이 목적한 곳이었다.
바로 만드리안 트롤이 서식하는 곳.
허나 이를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온 가족이 말릴 게 뻔했기에 론은 당연히 참았다.
“예, 당연하지요. 아버지.”
“그래, 그럼 호위는 얼마나 필요하느냐.”
“음···. 아버지, 피에타 유적과 브뤼센 영지의 토벌도 저희끼리만 갔다 왔습니다. 괜찮습니다.”
“허, 허허···.”
이제 막 열여섯인 셋째. 그런데 마치 출가하는 자식처럼 알아서 하려는 모습에 에레드는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나름 듬직해진 녀석이 해본다는데 이를 말리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론은 점심 식사 후 사티넬과 곧장 가문 뒤편의 산지로 향하였다.
피에타 유적 탐방을 끝으로 모험이라는 단어는 당분간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사티넬.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푹, 푹, 푹.
험한 산지인 만큼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간 내린 눈들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론님, 그런데 어디 생각해 두신 곳이라도 있으세요?”
마치 목적지를 염두에 둔 듯한 거침없는 그의 행보. 이에 사티넬이 의아해 물어봤다.
“예, 어렸을 적에 아버지한테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골짜기를 따라 하루 정도 걸은 다음, 그다음엔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꽤 괜찮은 데가 있다고 하더군요.”
“아아, 그렇군요.”
‘물론 거기에 만드리안 트롤이 있긴 하지만···.’
차마 끝말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론은 아무렇지 않게 길을 인도했다.
사실 사티넬이 딱히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또한 한 명의 마법사로서 말하건데, 다양한 경험은 뭐가 됐든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 그런데 그것이 상급 몬스터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막말로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에 상급 몬스터를 마주하고 살아 돌아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게 론이 아카데미를 두 번째 다니며 배운 것이었다. 상식을 깨부수는 것.
학기 초 크루딘은 정다면체의 복합마법진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상위 개념들을 마법에 녹여냈다. 마법진 속 마법식이 아니라 그저 심상만으로.
회귀한 론이야 개념을 넘어 원소 자체까지 감각화 하는 마당에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크루딘은 아니다. 상당한 심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것인데 그는 해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라면 절대 못 할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플라델의 미로, 그리고 그곳에서의 오푸스리에로. 크루딘의 워록의 재능 각성, 게다가 최근에 경험한 5서클 마법사와의 결투까지.
항상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도전과 시도만이 성장을 앞당겼다.
사티넬.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고 피에타 유적에서도 상당한 도움을 준 그녀다. 그래서 론은 가능하다면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타닥. 탓 탓.
그렇게 한참을 걷던 론 일행에게 부자연스런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론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는데, 사티넬이 탄성을 질렀다.
“와아··· 론님 저거 보세요. 사슴이에요. 사슴! 책에서 보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엄청 귀엽네요!”
미시피 산지에 서식하는 루오 사슴이었다. 가족인건지 부모로 보이는 덩치 큰 두 마리가 새끼 세 마리를 데리고 풀을 뜯고 있었다.
“루오 사슴이라고 여기 미시피 산지에 서식하는 동물입니다.”
“아하! 와 근데 저 눈 좀 보세요! 초롱초롱한 눈동자 테두리로 있는 하얀 털, 엄청 예쁘지 않아요?!”
“뭐 그것 때문에 사슴 중에는 인기가 많은 편이긴 하죠.”
그렇게 추위도 잃은 채 사티넬이 사슴을 보는 동안 론은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너머 가고 있는 중이다.
‘먹이 사슬 하위권인 루오 사슴이 서식할 정도면, 하룻밤 잘 곳으로 나쁘진 않겠군.’
산중의 밤은 빠르게 찾아온다. 이내 적당한 자리를 찾은 론이 사티넬에게 말했다.
“오늘은 대충 여기서 묵고 가죠.”
“아, 네!”
흙과 돌 마법을 적당히 섞으니 간밤의 추위를 피할만한 간단한 동굴이 완성되었다.
타닥타닥.
모닥불 앞에서 육포를 뜯던 사티넬이 론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이제껏 일행을 이끌어왔던 론.
비범한 머리와 상당한 마법 실력을 갖춘 것만으로도 참 대단한데, 그는 마치 예지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서부터 얼마 전 브뤼센 영지에서의 일까지. 하나하나가 재밌기도 했지만 신기한 일 투성이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를 믿고 따랐다.
어떤 이벤트가 생길지 모르니까.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네?! 아, 아뇨!”
“자꾸 쳐다봐서 뭐 묻은 줄 알았습니다.”
“아아! 그, 그냥 동굴 둘러본다는 게 헤, 헤헤···.”
그녀가 머쓱해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론은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산중의 밤은 차가웠지만, 그래도 동굴과 모닥불 덕분에 버틸 만했다.
날이 밝자 론과 사티넬은 다시 산행을 재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골짜기를 지나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능선이 주는 특유의 경관에 사티넬은 산행의 고단함도 잊었다.
그곳에 이르기 전까지는.
“저기···. 론님.”
“네.”
“여기 좀 뭔가 시커멓지 않나요?”
능선을 타고 이동한 지 수 시간.
언제부턴가 능선 아래로 보이는 광경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돌이면 돌, 암벽이면 암벽, 나무면 나무 등이 하나같이 모두 시커멨다.
그리고 사티넬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제 점심, 에레드가 했던 말쯤은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 협곡만은 피해 다녀라.’
다시금 생생히 떠오르는 그 말.
이제껏 지나온 그 어떤 곳보다 검은 협곡에 어울릴 만한 장소였다.
사티넬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눈으로 론을 쳐다봤다.
“잘 도착한 거 같군요.”
“에?”
허나 론의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그는 그대로 협곡으로 내려갔다.
“저기! 아니, 론님!”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 사티넬이 목소리까지 낮춰가며 애타게 그를 불렀다.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론은 빠르게 지형을 살피며 놈들이 있을 만한 곳을 추적했다.
‘습한 곳을 좋아하는 놈들 특성상 완전히 노출된 곳에 있을 확률은 낮고···.’
‘양지보다는 음지···.’
‘아무래도 나무들이 우거진 곳이나 동굴 같은 곳이 편하겠지···.’
‘그리고 놈들의 덩치까지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며 나아가던 론은 이내 속도를 낮췄다.
“읏, 으읍. 냄새가···.”
역한 냄새가 그들의 코를 찔러왔다.
“사티넬.”
“네?”
후각에 예민했기에 그녀는 코까지 막아가며 코 맹맹한 소리로 답해왔다.
“찾은 거 같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일단 저 능선 쪽에 가 계십시오.”
“능선이오?”
“네.”
사뭇 진지한 론의 표정. 이에 사티넬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물러났다. 그가 저리 말할 정도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사티넬이 물러나자 론은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어떤 기척이 느껴지자 그는 바로 멈춰섰다.
주변의 마른 잎과 가지들을 모아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위에 가져왔던 오르파 잎을 올렸다. 타닥타닥. 애초에 그것은 방향제로 쓰일 만큼 향이 강한 탓에 냄새는 금방 올라왔다.
‘윈드.’
그리고 거기에 론은 바람까지 일으켰다. 그가 짐작하는 쪽을 향해서.
얼마나 지났을까.
쿠웅 쿠우웅 쿵.
거대한 질량을 짐작케 하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어어어. 킁, 킁!”
만드리안 트롤이었다.
‘좋았어! 성공이야. 게다가 어떻게 딱 한 마리만 오는구만.’
론은 빠르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티넬이 있는 능선으로 쭉 빠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계속해서 오르파 잎을 태우며 놈을 유인했다.
오르파 잎은 세간에 알려진 단순한 방향제가 아니었다. 이 안에는 리글타락콘이란 성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만드리안 트롤의 신경을 자극했다.
후에 연구에 따르면 이것이 놈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효과도 있지만, 다량 흡입하게 되면 환각 증세를 보이며 정신을 잃게 된다고 했었다.
“그워워억!”
어느새 놈은 두 번째 모닥불을 흩뜨려 놓았다. 이미 꽤나 취했는지 침까지 뚝뚝 흘리며 더욱 오르파 향을 찾았다.
그런 녀석에게 먹이를 던져주듯 론은 계속해서 이동하며 모닥불을 피워댔고,
놈은 결국 버티지 못했다.
쿠우우웅.
홉고블린보다 배는 큰 덩치.
짙은 갈색의 트롤이 눈을 까뒤집은 채 론 앞에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