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36
다시 돌아온 거점도시 게티아.
거의 한 달 만에 돌아온 도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캬아! 이게 얼마 만이야!”
“우으···. 그러게요. 며칠 마차에만 앉아 있었더니 찌뿌둥했는데, 드디어!! 힛.”
그렇게 여독도 풀고 사람 냄새도 좀 맡을 겸 노을 빵집으로 향하려던 론 일행. 그런데 어째 출입문부터 삐거덕거렸다.
“귀족가의 호출이 있었습니다. 경비대로 모시겠습니다.”
신원 확인을 마친 경비원은 기다렸단 듯이 마차를 중앙 경비대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마주한 이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련님.”
“엥? 하비에 영감? 아니, 영감이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겠습니까, 당연히 모시러 왔지요. 도련님께서 편지 한 통만 남기고 객지서 연말을 보내셨는데, 가문에서는 당연히 걱정하지요. 가주님을 비롯한 많은 분이 기다리십니다.”
“흠, 원로분들은 아닐 거 같은데? 그치?”
“크흠! 아닙니다. 그나저나 그러면 저분들이 편지로 말씀하셨던 친구분들인지요?”
집사 하비에는 일전에 가주가 일러줬던 대로 크루딘 옆에 있는 일행을 보며 물었다.
“아! 어, 맞아 맞아.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정말 좋은 친구를 사귀었지 뭐야. 하하하. 여기가 론, 론 스펜서 그리고 여기는 사티넬.”
“호오. 그렇군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집사 하비에는 크루딘이 소개한 이들을 한 명 한 명을 똑똑이 새겨들었다. 오랜 집사 생활로 아들렌의 귀족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꿰고 있는 그.
그런데 어째 친구라는 자들이 유력한 가문의 자제는 아니었다. 순간 하비에는 걱정이 됐다. 선천병으로 인해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내내 피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하비에의 염려와는 달리 크루딘은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비에. 잘 봐둬. 장차 이 아들렌의 대마법사가 될 자들이야. 모두 학년 수석을 노리고 있지.”
“호오, 그렇군요.”
힘들어하기는커녕 가문에 있을 적 보이던 쾌활함은 여전했기에 하비에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
“참! 아카데미 성적표는 잘 받았습니다. 가주님께서 정말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성적표? 아, 그게 가문으로 가는구나···. 그런데 아버지가 웬일로?”
“큼! 가주님께서는 늘 도련님을 칭찬하셨습니다.”
“아, 그치그치. 칭찬에 인색한 건 우리 원로님들이셨지! 그새 나와 있다고 깜빡했네.”
“크흠, 흠···.”
“뭐 놀라실 게 더 남아 있긴 한데···.”
가문의 사람과 한껏 회포를 풀던 크루딘은 이내 아쉬운 듯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나는 바로 가봐야 할 것 같네.”
“예, 그러십시오. 가문에서 이렇게까지 마중을 나왔는데, 저희도 붙잡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크루딘.”
“맞아요, 크루딘님. 정말 재밌었어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래, 너희도 잘 가고. 그럼 2학기 때 보자! 어영부영 보내다간 방학 때 다 따라 잡힌다! 하하하!!”
마지막까지 유쾌한 크루딘. 과연 2학기 때는 어떤 모습일지 더 기대됐다. 짧고 굵은 인사를 끝으로 크루딘은 가문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동남부의 안데르손 영지라···.”
“후우, 정말 갔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사티넬은 그럼 어디로···.”
크루딘의 빈자리에 무심코 말을 뱉던 론은 멈칫했다. 그녀는 갈 데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저는 수도로 다시 돌아가려고요. 기숙사는 방학 중에도 운영하잖아요, 헤헤. 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일도 해보고, 틈틈이 마법 수련도 하면서 지내야죠. 힛.”
담담했다.
주변에 있는 이들이라고는 다들 있는 집 자식에다, 가정을 넘어 가문의 보호 속에 자라는 데 비해 그녀는 홀로 지내야 하는데 말이다.
이제 고작 열여섯.
성년이 되기 전 미련 없이 떼도 써보고, 철없는 짓도 원 없이 해야 할 때 아닌가.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아카데미에서 홀로 지내도 괜찮을까. 이런저런 질문들이 론의 머릿속을 헤집어댔다.
“스펜서 영지는 어떻습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중 하나가 결국 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
“돈은 충분히 벌었고. 수련만 해도 될 듯싶은데, 아카데미에서 혼자 하는 것보단 같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넷, 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론이 재차 설명하자 사티넬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가의 초대라니. 생애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가도 되는지, 뭐라 말해야 할지 등 정신없이 고민하는데, 왠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은 붉어졌다.
“어, 어···. 제, 제가 그래도 되는지···.”
“당연합니다. 그럼 지금 가죠.”
“네?! 지, 지금요?!”
“예. 둘이 여기 남아서 할 것도 없잖습니까. 바로 가야죠.”
“아아, 그, 그렇기는 하죠! 하, 하하···.”
갑자기 맹해진 사티넬이 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러려니 하고는 그녀를 이끌고 바로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게티아에서 서부 거점도시 수에즈로 단숨에 이동한 그들은 곧장 상인 길드로 갔다.
다른 곳도 아닌 스펜서 영지로 가는 길. 아무리 자신이 혈통과 계급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다지만, 영주의 자제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품위라는 건 있었다.
때문에 론은 상행단 승객이 아니라, 아예 마차와 마부를 고용했다.
“나으리, 말씀하신 4인승 마차와 마부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따로 용병은 안 필요하신지요? 대기 중인 용병들이 꽤나 많습니다요. 원하신다면 그들도 바로 불러드리겠습니다.”
‘용병이라···.’
문득 론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가문에서 수에즈로 올 때가 떠올랐다. 아들렌에서도 낙후지역인 서부. 그렇기에 용병들의 수준도 떨어졌는데, 당시 실제로 마주한 그들은 더욱 처참했었다.
도적을 보고 싸우기는커녕 어서 협상에 응하자며 고용주들을 설득했더랬다. 용병이 아니라 도적의 끄나풀은 아니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용병은 됐네.”
뭐 구한다면야 비싼 돈을 주고 상당한 실력의 용병을 구할 순 있겠지만, 웃긴 건 그들이 자신보다 강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예, 그럼 바로 마차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도련님.”
수에즈 도시에서 스펜서 영지까지의 거리는 약 일주일.
론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마차 안에서 조용히 마나호흡을 하거나 간단한 마나 컨트롤 및 마법 수련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만 사티넬이 몸에 열이 많은 건지 한겨울인데도 얼굴을 붉히는 바람에 종종 창문을 열곤 했다.
“... 좋아합니까?”
“넥, 네에?! 켁! 콜록콜록!”
“그냥, 바람 쐬는 걸 좋아하냐고 물었습니다.”
“콜록! 콜록콜록. 아고. 바, 바람 쐬는 거요?! 네네, 그쵸. 좋아하죠. 헤헤···.”
론이 회귀 전 아무리 독신으로 살았다지만, 그 흔한 연애 감정 하나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늘 셋이 있다가 둘이 있어서 그런 건가.’
이제껏 사티넬 하면,
대륙을 횡단한 당찬 소녀, 평민임에도 16세에 2서클인 재능, 엘프의 후손 등 대단한 소녀라고만 인식했었다. 허나 그런 사티넬도 소녀긴 소녀인가 보다.
피식.
론의 눈에는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참고로 우리 가문 사람들은 그리 엄격하지는 않습니다. 서자인 제게도 엄청 잘해주시죠.”
“아, 서자셨군요. 몰랐어요.”
“음, 생각해보니 누구한테 가정사를 얘기한다는 게 사티넬이 처음이긴 합니다.”
“아아, 그렇구나. 헤헤.”
“뭐 아무튼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티넬을 초대한 것이기도 하고요.”
“넵! 그리고 저야 그저 감사할 뿐이죠. 살면서 귀족분들께 초대받아 보는 건 처음이라서. 헤헷.”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그렇게 론과 사티넬은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들로 어색함을 풀어나갔다.
연초의 서부.
소출은커녕 농부들이 안식을 취하는 기간이라 그런지 상인도 도적도 없는 한적한 귀갓길이 되었다. 일주일은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새 마차는 스펜서 가문 저택 앞에 이르렀다.
“왔따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살짝 긴장한 듯한 사티넬.
“걱정하지 말고 따라 내리세요.”
“아, 네네!”
끼이익 문소리와 함께 론이 마차에서 내리자, 한가득 가문 식구가 모두 나와 있었다.
“어···. 다녀왔습니다.”
“하하하!! 왔구나, 론! 아주 사고를 제대로 쳤어! 전교 2등이라니!! 둘째 드락사 그 녀석도 내지 못한 성적이야! 크하하하! 잘했다! 잘했어!”
“고생했다, 론. 어째 너보다 아카데미 성적표가 먼저 가문에 도착했구나.”
“고생했어요.”
“쳇, 셋째 오빠가 머리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아버지, 첫째 형, 첫째 어머니 그리고 막냇동생 레비의 인사를 차례차례 받던 론은 정신이 없었다. 듣자 하니 아카데미 성적표가 가문으로 발송된 듯했다. 크루딘이 집사와 얘기하는 걸 통해 짐작하긴 했는데, 2등이라니.
“이···등이었습니까?”
“뭐냐 론. 너도 몰랐던 거냐?”
“하하하, 뭐 모를 수도 있지!”
끼이익.
정신없이 해후를 나누던 중 마차에서 한 명이 더 내렸다.
“아, 안녕하세요.”
마부 혹은 하인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곱상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론과 또래인 여자라는 사실에 가문 사람들은 순간 조용해졌다.
“허! 론, 네 녀석. 설마··· 다른 사고도 쳤던 게냐?”
“예?”
에레드가 충격을 받았는지 표정이 멍했다. 순간 뭔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던 론은 이내 그 의미를 깨달았다.
“후우···. 그런 게 아닙니다.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구인데, 일전···.”
“친구?”
“예, 친구입니다.”
“그래, 그런데?”
“일전에 말씀드린 여정을 갔다가···.”
“허! 그럼 연말을 저 여식과 둘이서!!!”
“아니, 아버지. 아닙니다!”
에레드의 호들갑에 론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탐방 여정은 일전에 편지해 드렸던 대로 크루딘 안데르손이라고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아아, 그랬었나?”
“하아···.”
그렇게 사티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이어지고 나서야 가문의 저택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난, 사티넬이 좋아! 엄청 예뻐!”
동생 레비는 외모면 다 되는 것인지 론이 설명한 가정이나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 레비. 근데 말썽 피우진 마.”
“누가 말썽을 피워어! 연말에 진탕 놀고 온 오빠나 말썽 피우지 말라고오!”
“······”
역시 레비와는 말싸움하는 게 아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레비가 사티넬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 벌서 사티넬 옆에 착 붙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그래서 저 여식이 네 이거냐?”
어느새 옆에 붙은 에레드가 새끼손가락만 피더니 물어왔다.
“······. 아닙니다.”
“호오? 그럼 이제 곧 그렇게 될 거라는 거지?”
“아버지···.”
“하하하하, 그래그래. 아무리 애비라지만 자식들 청춘사업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지! 암!”
에레드는 뭐가 그리 좋은지 경쾌한 발걸음으로 먼저 저택에 들어가 버렸다.
그날 저녁,
식탁에 모인 가족들은 아까 못다 한 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허어! 안 그래도 뭔가 달라졌다 느끼긴 했는데, 2서클에 올랐다니! 정말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했구나, 론!”
“뭐 여기 있는 사티넬을 비롯한 좋은 친구들 덕분입니다.”
“정말 경사구나! 축하한다, 론.”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티넬이라고 했던가?”
열심히 입에 음식을 넣고 있던 사티넬. 그녀는 갑작스런 호명에 허겁지겁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큼. 예, 맞슴미다. 큼, 흠! 사티넬입니다.”
“론에게 듣기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북부에서부터 왔다던데 정말 당찬 여식이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재능도 매우 뛰어나고 말야.”
이미 그녀가 2서클이란 설명까지 들은 에레드는 포크 질까지 멈추고 얇게 뜬 눈으로 론을 쳐다봤다.
“······.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하하하하, 뭐 그냥. 그나저나 남은 방학 동안 할 거라도 생각해 둔 게 있느냐?”
‘남은 방학 기간.’
“네 뭐, 일단 마법 수련입니다. 사티넬도 그렇고 저도, 이번 여정을 통해 깨닫고 배운 바가 커서요.”
“허허, 참 대단하구나. 나 때는 1학년 하면 그냥 놀기 바빴는데 말야. 하하하!”
“아버지, 저도 똑같았습니다. 론이 정말 대단한 것이지요. 형 된 입장으로서 그저 대견할 뿐입니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이미 생각은 마쳐놨다.
만드리안 트롤 공략과 포션 제조법 제공. 다만 일의 순서를 어떻게 매끄럽게 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렇게 식사 자리가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방으로 돌어간 시간.
론은 사티넬이 묵는 방으로 찾아갔다.
“사티넬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