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32
브뤼센 영지의 연말 파티는 매우 풍족했다.
연초 토벌 일정을 위해 찾아온 많은 용병들을 모두 수용할 정도의 넉넉한 자리와 풍족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날이 춥건, 사는 게 빡빡하건 상관없었다. 이날의 술과 고기는 만인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영지민뿐 아니라 타지의 용병들, 그리고 이 대목을 위해 찾아온 상인 등 모두 하나가 되어 파티를 즐겼다.
파티가 무르익고, 밤이 깊어가자 영주를 비롯한 내성의 귀족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몇몇 마법사들이 연회장 한가운데의 단상에 섰다.
브뤼센의 모두가 연말을 카운트할 수 있도록 간이 시계를 설치했다. 현재 시각은 11시 40분.
“흠, 흠.”
경비대 직원 데빈이 목을 가다듬었다.
“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지나갑니다. 브뤼센의 모든 불을 꺼주십시오!”
데빈이 몇 번이고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모든 빛이 사라질 때까지.
똑딱 똑딱 똑딱···.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어지자 시각에 할애하던 신경이 모두 귀에 쏠린 듯했다. 시계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온다.
대앵.
대애앵.
대애앵.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온 영지민들이 모여 파티를 즐기다 12시가 되면, 사람들은 모든 불을 끈다. 그리고는 잠시간 조용히 지난해를 기념한다.
오랜 아들렌 왕국의 전통이었다.
“한 해 동안 모두 수고 했소. 그대들을 위해 내 친히 베푸는 잔치이니 모두 잘 즐기다 가시오.”
새해 축사치고는 짤막한 연설.
허나 그 짧은 말속에 브뤼센 영지의 풍요로움은 충분히 실려있었다.
화르륵.
휙.
영지 마법사들이 마법을 이용해 연회장 등(燈)을 화려하게 밝혔다.
“오오!!!”
휘익!
“영주님 만세!!”
“브뤼센 만세!!”
“적셔!! 마시자!!!”
이 풍요로운 인상은 자리한 모두에게 강하게 남으리라.
수많은 귀족이 각종 사업이라든지 혹은 왕실 요직을 얻는다든지 또는 인재를 데려온다든지 등 어떻게서든 가문의 세를 불리려 한다.
그런데 한 영지가 성을 넘어 도시급의 규모로 성장하려면 필수적인 게 사람이다.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돈과 명예가 쌓여있다 한들 그저 고인 시골 영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브뤼센의 영주는 연말 파티마저도 영지 번영을 위해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였다.
그래도 한평생을 살고 왔기 때문일까. 아무렇지 않게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괜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딱히 누구에게 말할 건 아니었으나, 홀로 음미하며 파티 안주로 삼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연말 파티가 그렇게 끝이 나고 새해 첫 달, 눈꽃달이 찾아왔다.
연초라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연말 파티에 열을 쏟았던 만큼 모두가 조용히 집에서 안식을 취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눈꽃달 5일,
정기 몬스터 토벌 날이 밝았다.
안내받은 집결지에는 수많은 인파가 있었는데, 대충 세어봐도 백여 명은 되는 듯 했다..
“용병들만 이렇게 많이 모여있는 건 처음 봐요.”
“근방의 칼 좀 쓴다는 용병들은 다 왔나 봐.”
론이 찬찬히 용병들의 상태를 살폈다. 몬스터 토벌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확실히 어중이떠중이처럼 보이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 토벌.
과거에는 전사든 마법사든 뭐건 간에 마나 유저들의 전유물이었다. 허나 시대가 흐르면서 많은 정보가 풀리고, 또 장비 수준 또한 발달하다 보니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이들도 차츰 몬스터를 사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하급 위험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아래 단계의 놈들까지만이다.
애초에 몬스터란 정의 자체가 마나를 품은 포악한 생명체다. 때문에 정말 최하층 몬스터가 아니면,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게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커럽트 보어가 하급 몬스터 중에서도 꽤 강한 편이라 그런지 어중이떠중이는 안 보이는 거 같군요.”
“저번에 도서관에 있을 때 보니 대충 네댓 명은 둘러싸고 잡는 게 안전하다드만.”
“포위 사냥이 확실하긴 하지요.”
“호오? 혹시 지오르 마탑의 수련생들?”
낯선 목소리가 론 일행의 대화를 갈랐다. 그런데 지오르 마탑과의 안 좋은 인연 때문이어서일까. 그들은 무겁게 고개를 돌렸다.
“반갑구만. 하하, 마법 수행 중인 방랑 마법사 키르타스 하브렌이네. 마탑의 수련생들인가?”
아버지뻘쯤 돼 보이는 중년의 사내. 인상이나 표정, 그리고 눈빛이 딱히 적대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선해 보일 정도.
“마법 수행?!”
크루딘이 솔깃한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들렌 아카데미 학생입니다.”
“아카데미?! 허허, 이 남쪽 변방에서 아들렌 아카데미 학생을 볼 줄이야! 오길 잘했어! 하하하, 경험차 방문한 건가?”
“예.”
“졸업생?”
“신입생입니다.”
“허···!”
놀란 키르타스가 론 일행의 위아래를 싸악 훑었다.
“정말 신입생이라고?”
“예.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뭐 실력이 전부인 이 바닥에서 그것만 출중하면 되긴 하는데···. 사냥 경험은 좀 있고?”
‘경험이라.’
그 말에 론이 일행들을 살폈다.
당장 얼마 전 5서클의 마법사를 무찌른 그들이었다. 크루딘과 사티넬도 론의 의중을 알아챘는지 미소를 지었다.
토벌 대상 몬스터가 어떻든 간에 5서클 마법사 수준은 아니었다.
“예, 얼마 전엔 사선도 넘나들었을 정도입니다.”
“그래? 하하하, 아카데미에서 아주 걸출한 인재들을 받았나보구만! 이번 토벌은 아주 재밌겠어. 하하하!”
그 뒤로 키르타스는 일행에게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은 동쪽의 클림트 왕국 출신이라는 자기소개부터 해서 마법 수행에 관해 얘기할 땐 크루딘도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영주성에서 마법사들이 나왔다.
“마법사 직군 지원자 분들은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영지 마법사는 총 열네 명이었다.
총책임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마법사와 그 옆으로 중년의 마법사가 둘,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젊은 마법사들이었다.
키르타스를 비롯한 일행이 그쪽으로 가자 풋풋한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지원자분들의 능력을 확인하겠습니다. 이번 토벌 대상은 하급 위험 몬스터인 커럽트 보어와 워울프, 그리고 고블린입니다. 간밤에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고블린 떼들이 북상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최소 조건은 2서클 마법 세 가지입니다. 제가 지나갈 때마다 보여주시면 됩니다.”
마법사로 지원한 이들은 론을 포함해 총 8명. 때문에 검증시간은 길지 않았다. 당연히 론 일행은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파이어!”
“파, 파이어!!”
하지만 그중 한 명은 아쉽게도 세 번째 원소 마법을 발현시키지 못했다.
딱하긴 해도 조건은 조건이다.
일전의 경비병 말대로 일정 전력 이하의 구성원은 불시의 상황에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동료들에게 짐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확인하던 마법사는 이런 일을 꽤나 겪었는지 아무렇지 않게 불합격자를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간단히 토벌 일정 및 방식에 관해 설명했다.
마법사들의 위치는 토벌단의 가운데이며, 책임자는 그의 선임인 중년의 마법사라 했다. 기사들과 용병들이 최대한 마법사의 신변을 보호하겠지만, 위험 상황에서는 알아서 대처해야 한다는 둥, 아군에게 혼란을 주는 범위 마법은 금한다는 둥. 뻔한 얘기들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슬슬 지겨워질 때쯤 브뤼센 영주가 나왔다.
“허허, 반갑소. 연초 토벌 행사인 만큼 보상은 후히 주리니 한 번 제대로 가봅시다.”
“충!”
“가자아!!!”
“목 따러 가자!!!”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토벌단은 브뤼센 성을 벗어나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담당 마법사의 말과는 달리 론 일행은 토벌단 가운데 위치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앞.
더 정확히 말하면 브뤼센 영주의 옆이었다.
“호오?! 그러니까 그대들은 1학년 신입생인데, 2서클 마법사라는 건가? 그리고 오버스펠로 3서클까지 가능하고?”
“예···. 그렇습니다.”
적당히 전력 보고를 했을 뿐인데, 영주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허허허! 왕국의 미래가 참 밝아!”
브뤼센 남작가.
오랫동안 소외당하던 변방 영지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법 열풍이 불고 마정석에 대한 소요가 늘어났다.
마법의 보급은 마냥 평민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때로는 이렇게 변방의 영지에도 꽤 도움을 주고 있었다. 때문에 브뤼센 영주는 왕실의 이러한 정책 방향에 큰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관련 정책으로 인해 가문의 세가 늘어난 케이스라 상당히 우호적이었는데, 아카데미 학생이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카데미 학생들이 1학년인데 3서클 마법까지 가능하단다.
“성취가 상당한데 혹시 가문 내에서 후계자 위치에 있는 자들인가?”
사실 영주는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되는 위치였으면 애초에 타 영지에 하인도 없이 단신으로 오지는 않는다.
딱 봐도 차남 혹은 막내, 그도 아니면 서자 정도였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좋게 포장해 주는 게 예의이고 고급스러운 대화법이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후계자는 아닙니다.”
“예, 따로 내정된 형제가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
브뤼센 영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떤가? 우리 영지의 마법사는?”
전혀 생각지 못한 제안.
론 일행은 그대로 벙찌어 버렸다.
“크하하하! 농일세, 농. 하하하.”
영주의 솔직한 심정은 굽혀서라도 데려오고 싶었다. 열다섯 아카데미 신입생 중 3서클 마법이 가능한 자가 얼마나 될까. 게다가 거기서 더 나아가 방학 때 토벌지까지 나와 경험을 쌓는 이들은 정말 드물다.
그리고 브뤼센 영주의 눈은 론 일행의 끝에 있는 사티넬에게로 향했다.
전날 명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을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하지만 저 여식도 평민이지만 2서클이라 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학생들.
덕분에 브뤼센 영주는 연초부터 기분이 좋았다. 새해 영지에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한 해 운이 결정된다고들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찾아왔다.
씨익.
올해는 대운이 오려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영주였다.
***
이번 토벌에서 전체적인 총괄, 그리고 영주의 부관을 맡은 중년 마법사 닙스는 시작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초 토벌 행사.
한 해의 시작인 만큼 무조건 영주도 함께하는 자리였는데, 그 자리의 부관직이 자신에게 넘어왔다. 그 말은 즉, 윗선이었던 노년 마법사 그웰린이 슬슬 임기를 마치려 한다는 얘기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허허로운 인상에 그다지 욕심도 없던 그웰린. 총관으로서 영주를 보좌하던 그가 하나둘 일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향 얘기를 하는 건 덤이었고.
때문에 닙스는 벌써부터 브뤼센 영지의 총책임 마법사, 그리고 총관이 된다는 생각에 꽤나 기분이 들떠있었다. 바로 저들이 오기 전까지는.
토벌 지원 명부를 보고는 처음에 좀 껄끄러웠다.
마탑 출신인 자신과는 달리 영재들만 들어간다는 아카데미의 학생들. 게다가 모두 열다섯 신입생인데 2서클이라고 했다.
‘그런데, 뭐? 3서클 마법까지 가능하다고?’
닙스 그 자신은 열여섯이 돼서야 2서클에 올랐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용병들이 수군댔다.
‘아카데미 도련님들이라는데?’
‘귀한 집 자제분들이라 그런지 아주 패기가 넘쳐!’
‘그래도 칼질은 우리가 더 잘 할 텐데, 칼 쓰는 법 좀 보여드려야 하나? 하하하!’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곳이야, 아카데미가?’
‘왕실의 고위직은 다 저들이 한다고! 어이! 말조심해!’
딱히 신경 쓰진 않으려 했다.
길바닥의 칼잡이들이 하는 얘기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하지만 어째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주도 그렇고, 다들 아카데미 학생들에게로 관심이 쏠려있었다.
‘영주님 다음은 바로 차기 총관인 내가 돼야 하거늘!’
론 일행을 뒤에서 바라보는 닙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래, 어디 한 번 날 뛰어 봐라, 큭큭. 몬스터 사냥이라는 게 어디 교과서 마냥 쉬이 흘러갈 줄 아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