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31
“다들 미친 거 아니지?”
“안 미쳤습니다.”
킥킥.
사뭇 진지한 크루딘의 말에 사티넬이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건들의 배분은 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약 한 시간 전.
론은 숨겨진 방에 있는 모든 기록물을 가져 나왔다. 혹시라도 후에 괜한 번거로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엘릭서에 대한 추측을 아예 못 하도록 핵심 일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걸 태워버렸다.
그렇게 해서 남은 건 핵심 일지 하나와 엘릭서, 그리고 최상급 포션들이었다.
“그럼 하나씩 가져가죠.”
“하나씩?”
“예. 영지전을 비롯한 전쟁, 각종 사업 등에서도 공적도, 관여도에 따라 나눠 갖지 않습니까.”
“어어··· 그렇긴 하지.”
“개인적으로 이번 일의 우선권은 제가 1순위, 사티넬이 2순위, 크루딘이 3순위라 생각합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헤헤···.”
사티넬이 크루딘의 눈치를 살폈다.
“후우··· 맞는 말이지. 솔직히 한 게 없다. 인정.”
크루딘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깨끗하게 양보했다.
“그럼 저는 이 일지를 가져가겠습니다.”
“응? 아니 왜 엘릭서를 안 가져가고···.”
회귀 전에는 이러한 일지가 있었는지 몰랐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는 천년이 넘는 마탑의 정수가 담긴 것이다. 즉 최초 발견자가 이를 가져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론은 엘릭서 하나와 비교할 게 아니라 생각했다. 이를 이용하면 당장에라도 최상급 포션들을 제작할 수 있다. 즉, 황금알을 낳아줄 거위인 셈.
게다가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후에 운이 좋아서 엘릭서의 대체재를 찾게 될지. 그렇게 되면 그때는 정말 이보다 가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히힛. 그럼 저는 이걸 가져갈게요.”
크루딘이 벙찌어 있는 사이 사티넬이 최상급 포션들이 담긴 포션 함을 품에 안았다.
“엉? 사티넬, 그게 맞아?”
“네! 제 꺼에요, 이거.”
사티넬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 그녀가 대륙을 횡단하며 경험한 일들. 이 세상은 힘없는 자에게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당연히 엘릭서의 가치가 훨씬 높지만, 평민 주제에 고작 아카데미 학생 신분 가지고 이를 처분할 능력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미련 없이 포션 함을 골랐다.
“허! 미친 거야, 다들. 그러지 않고 이럴 수가 없지. 어이, 론, 사티넬. 잠이 덜 깬 거지? 맞네, 맞아! 내가 뺨 좀 때려줄게.”
팡.
실제로 크루딘이 달려드는 바람에 론이 바람으로 밀어버렸다.
“큭! 분명 꿈은 아닌 거 같은데···.”
“어서 드십쇼.”
“어?”
“팔건 아니지 않습니까.”
“폐병, 치료해야 하잖아요. 크루딘님.”
“하아···.”
크루딘의 눈가가 붉어졌다.
“젠장! 짐짝마냥 한 것도 없는데 이래도 되는 거 맞냐?”
“예, 충분히.”
“네!”
유서깊은 가문, 암시장, 장물 등 엘릭서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유통이 됐었는데, 효능을 살펴보면 이렇다. 각종 질병이나 소실된 신체 수복, 그리고 다량의 마나 수급이었다.
때문에 크루딘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효능을 말이다.
“후우···.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그러고는 크루딘이 단숨에 엘릭서를 입 안에 들이부었다.
꿀꺽.
소리가 나기 무섭게 크루딘의 눈이 단번에 커졌다.
‘와!’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엘릭서가 목을 넘어가는 순간, 마치 증발하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허나 이윽고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 크루딘은 본능적으로 심장의 서클을 회전시키며 몸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자 거대한 기운은 알겠다는 듯이 이에 어울려주었다.
후우우웅.
우우웅.
그것이 온몸을 휘저으며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폐에 존재하는 미미한 부조화.
그 순간 크루딘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을 느꼈다.
‘허! 이 정도면···.’
이제껏 서클을 늘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던 그다. 두 번째 서클을 엮으려고만 하면 물 새듯 빠져나가던 마나들. 얼마나 허탈해 했었던가.
또 마나가 새나가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이를 묵살하기라도 하듯 체내의 거대한 기운이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이 계속 날뛰었다.
크루딘은 폐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을 믿었다.
주저 없이 거대한 기운을 끌어모았다.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서클 곁에 또다른 고리를 엮기 시작했다. 마나 컨트롤에 대한 이해도는 이미 3서클까지 이르렀기에 두 번째 서클을 엮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아...’
믿기지 않았다.
항상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어느 순간 흩어지던 마나들이 견고히 유지되고 있었다. 크루딘의 의도대로 너무나 쉽게 움직였고, 이내 두 개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거대함.
크루딘은 내친김에 세 번째 서클까지 달렸다. 추가로 하나를 더 만들기 위해 마나들 끄집어 모았다. 형태를 잡고, 그대로 묶으면 되는 상황.
“커허! 하아···하아···.”
아쉽게도 아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진짜 미쳤네.”
**
브뤼센 성으로 돌아가는 길.
화르륵!!
“그만하십시오. 정신 사납습니다.”
“푸하하하. 내가, 이 크루딘이 2서클이 됐다고!! 하하하!”
“킥킥킥.”
“꼴찌면서 뭐가 그리 좋습니까.”
“꼴찌면 뭐 어때! 하하하하!”
오면서 사티넬이 깨달음을 얻어 2서클로 올라섰다는 얘기를 해줬다. 이에 크루딘은 정말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 또한 2서클에 오른 게 그리도 좋은지 연신 마법을 펼쳐댔다.
한껏 밝아진 얼굴의 크루딘.
허나 그의 머릿속은 그 와중에도 치열했다.
‘아쉽게도 3서클은 실패했지만, 조만간 그것도···.’
이미 체내 곳곳에 상당한 기운들이 잠들어 있는 상태다. 때문에 크루딘은 내심 불을 뿜으면서도 컨트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3개의 서클까지 엮을 수 있을지 하면서 말이다.
이전보다 더욱 활발해진 크루딘 덕분에 일행은 지루하지 않게 브뤼센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착한 브뤼센은 한겨울치고 꽤 시끌벅적했다.
떠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광장에 설치되고 있었다.
“오오, 연말 파티라 이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브뤼센 영주님은 엄청 후하시네요. 북부에서 아들렌에 오기까지 꽤 많은 영지를 거쳐 왔었는데, 어떤 곳은 파티를 안 하는 곳도 있었거든요.”
“뭐, 영지민들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가, 그런 데는?”
“사연들이 있겠지요. 일단 숙소부터 정하죠.”
성내 분위기가 시끌벅적하고 생기 넘치는 것도 좋았지만, 토벌 일정까지 소화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게다가 이곳은 도시보다 규모가 작은 성. 서두르는 게 좋았다.
“아유, 왜 그렇게 늦게 왔어유. 벌써 꽉 찾쥬.”
“엊그제 다 찼습니다요.”
“다른 데 가보십쇼.”
“경비대에 한 번 가보세요. 귀족분들을 위한 거처가 내성에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해가 지도록 모든 여관을 모두 뒤지다시피 했는데, 남는 방이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 여관 주인에게 들은 게 희망이라면 희망.
“와···이거 실화냐? 가문 밖에서 처음으로 맞는 신년인데, 연초부터 길바닥에서 지내게 생겼다고!”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어서 경비대나 갑시다.”
“안 좋은 건가요? 저는 꽤 많이 길에서 새해를 맞이 해가지고···.”
“아···.”
“······”
“미안.”
“크흠! 사티넬, 그래도 올해는 같이 있지 않습니까.”
“헤헤, 맞아요! 두 분께 정말 감사해요! 힛.”
“그, 그래! 그럼 됐지 뭐!”
그렇게 순간 삭막해 질뻔한 분위기를 잘 풀어낸 일행은 해 질 무렵 경비대에 도착했다.
“저번에 토벌 신청하셨던 분들이군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기억하시는군요. 다름 아니라 이곳저곳 여행 좀 한다고 돌아다니고 왔는데, 여관이 다 차서 말입니다.”
“아! 예 그렇지요. 연말에는 특히 브뤼센이 용병들로 인해 사람들이 꽉 찹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께서 이 때문에 귀족분들은 따로 모실 곳을 내성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오오, 주여!”
“바로 가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휘익!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경비병이 안쪽을 향해 휘파람을 불자 실내 직원이 튀어나왔다.
“어, 데빈. 이분들 내성 귀족 숙소로 좀 모셔다드려.”
“아아, 오케이 알았어. 잠시만!”
도로 들어간 데빈이 후다닥 겉옷을 챙겨 나왔다.
“이쪽으로 가시죠.”
외곽 평민 지역을 가로질러 도개교를 지나니 영주성을 비롯한 내성 안이 훤히 보였다. 남작 위 수준의 영주성치고는 상당한 규모다.
부와 규모.
이는 나름 브뤼센만의 특별한 사업이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몬스터 토벌이었다. 연초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토벌로 인해 얻는 마정석이 적지 않았다.
즉, 그로 인한 수입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눈앞의 저택이었고.
“도착했습니다.”
“와아···.”
“와우.”
회귀 전 브뤼센에 몇 번 오긴 했지만, 영주성의 귀빈용 객실은 처음이었다.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살피고 있자니 경비대 직원 데빈이 곧이어 설명했다.
“303호, 304호, 305호. 이렇게 한방씩 쓰시면 됩니다. 식사는 편하실 때 언제든 식당에 가셔서 주문하시면 됩니다. 세탁물은 층별 끝방에 호실별 세탁함에 두시면, 빨아다 드릴 겁니다. 혹시 따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실까요? 아, 참고로 이용료는 없습니다.”
론이 일행들을 살폈다.
없다는 눈치다.
“충분합니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크, 오히려 여관이 다 찬 게 기회였어! 하하하!”
“그러게요. 히힛.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피에타 유적에 갔다 오느라 일행은 며칠씩 노숙을 해야 했는데, 때문에 다들 푹 씻고는 그대로 방에 퍼졌다.
각자 방으로 흩어지고 홀로 침대에 앉은 론.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생일도.
서리달 29일.
론이 태어난 날이다.
어머니의 유서를 통해 알게 된 날이기도 한데, 항상 연말 파티와 더불어 가족들의 축하를 받았었다.
“출가를 하고 나서는 그럴 일은 없었지만 말야.”
유적관리단에 근무하고부터는 거의 일에 파묻히다시피 지내 생일 같은 걸 챙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바라지도 않았고.
그 때문인지 론은 조용한 달밤에 이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동료들도 있으니.”
딱히 축하를 해준 건 아니었으나, 연말을 같이 보낼 동료가 생겼다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까마득한 차이. 거의 손자뻘이다. 하지만 막막하기만 했던 어둠을 헤쳐나가는 데 있어서...
“든든한 녀석들이지.”
그러면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피에타 유적에서 챙긴 가죽 일지가 보인다.
“가문의 사업으로 어떠려나.”
브뤼센과 스펜서.
같은 남작 위 귀족의 영지임에도 두 곳의 규모 차이는 확연했다.
스펜서 영지가 근처에 토벌할 만한 몬스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특히나 브뤼센의 이 귀빈용 접객 건물이 스펜서 가문의 본 저택과 비슷하다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었고.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벌써부터 활동 중인 흑마법 세력. 아직 정체를 드러낸 건 아니었으나,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나쁠 게 전혀 없었다. 포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전쟁에서 특히 극명하게 나뉜다.
약 두 달여 간의 남은 방학 기간.
가문 확장 사업을 추진하는 겸 해서 실마리를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워낙에 단순한 사람들이라 사업을 안 해서 그렇지.”
막상 사업이 커지고, 왕국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반길 것이다.
왜냐면 당장 일지의 최근 부분을 봐도 최고급 포션에 대한 제조법은 현재에도 통용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리 말하면서 론은 일지를 조용히 펼쳤다.
[ 만드리안 트롤 ]
스펜서 영지가 몬스터 토벌은커녕 국외 무역도 불가능한 이유는 그 변경이 험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미시피 산맥.
그런데 그 미시피 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만드리안 트롤이 서식하고 있다. 왕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상급 위험 몬스터로 지정해 모두가 꺼리는 그 몬스터.
허나 론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주 나중, 시간이 흐르고 흑마법사들이 만드리안 트롤의 피를 구한답시고 공략법을 온 땅에 퍼뜨렸었다.
‘역시 그들이 이 일지를 가져갔던 건가.’
당시의 기억에 이런저런 추측들이 떠올랐다.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이번 생에는 이게 내 손안에 들어왔다는 거지만.”
톡. 톡. 톡.
어느새 일지를 덮은 론이 그 겉면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만드리안 트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