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30
생체 활동이 멈춘 신체가 모두 그렇듯 죽은 사내의 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근처에는 모닥불도 없다.
해서 론과 크루딘은 달빛에 의지한 채 사내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론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사내의 얼굴에 새겨진 선명한 문양이.
‘검은 물방울.’
아이블 마탑의 상징이었다.
이 땅을 재앙의 검은색으로 물들였던 그들.
“하···.”
‘아이블 마탑···.’
현재까지 남아있는 세 개의 마탑 중 한 곳. 가장 세력이 미미했기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저 어두운 땅의 그들과 결탁했으리라고는.
‘아니야. 아직 확정하긴 일러. 그래, 우연일 수도 있으니까’
“확실히 죽었네.”
크루딘이 담담히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이러저러한 생각이 드나보다.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론은 시체를 뒤적거렸다.
“어, 어이 론. 뭐해.”
낯선 광경.
크루딘이 멈칫했다.
“뭘 뭐합니까. 뒤진 놈 신상이랑 이것저것 챙길 거 있으면 챙겨야지요. 뭐 뒤에 올 관람객들에게 양보라도 할 겁니까?”
회귀 전 기억 때문인지 론의 입이 거칠어졌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사내다.
게다가 이 사내가 소속된 곳이 어디던가. 곧 있으면 어둠에 모든 걸 바칠 집단이었다. 철저히 죽이되 이용할 건 이용해야 했다.
아직 크루딘이나 사티넬이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생사결 후에 이러한 행동은 그리 이상한 게 아니었다. 사내를 비호하는 세력이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부욱.
론이 허리에 걸쳐 놨던 조그만 패링 나이프로 사내의 로브를 찢었다.
‘사길 잘했군.’
놈은 길거리 깡패 수준도 아니고 5서클.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란 말이다. 가진 게 있다면 꽤나 가치 있는 것일 터. 당연히 이를 취할 사람은 자신들이었다.
그렇게 놈이 입고 있던 로브를 북북 자르고는 해체하듯 하나하나 살폈다.
“어으···.”
론의 말에 수긍한 크루딘이었음에도 어느새 허연 몸뚱이를 드러낸 시체를 보자,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론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일단 첫 번째로 얻은 건 금화 주머니였다. 그래도 5서클 마법사라 그런지 쿠퍼 따위는 주머니에 없었다. 13골드 8실버. 직접 들고 다니는 현금치고는 작지 않은 수준이었다.
두 번째는 웬 이상한 목록표.
솔직히 유적관리단에 근무했었던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뻔 했다.
“···”
목록들이 지칭하는 곳은 모두 아들렌에 있는 유적들 위치였다.
‘이런식으로 해서 어떻게든 엘릭서를 찾으려 했던 건가.’
그리고 세 번째는.
“흑석?”
‘아니, 어떻게 이게···. 시기상 맞나?’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론은 혼란스러웠다.
흑석.
과거 흑마법사들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들이었다. 어둠의 원소를 넘어 사악과 패도로 물든 흑마법을 펼치기 위해선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야 했다.
때문에 철저하게 단련된 마법사들의 이성을 죽이고, 흉악한 본능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 매개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또한 그리고 이것은,
이 땅의 물건이 아니었다.
론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이들은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실행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이렇게나 미리 준비했기에 그리도 쉽게 대륙이 뒤집힌 것인지도 모른다. 저항이란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로 당시 대부분 국가가 함락당했었다.
“후우...”
남겨둘 이유가 없다.
괜한 위험의 소지가 될 수도 있었고.
“뭐야 이건?”
어느새 다가온 크루딘.
어짜피 없앨 거라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론, 이거 나만 이상한 게 느끼는 건가? 좀 불쾌한···.”
“맞습니다. 마탑에서 취급하는 물품 중에 이렇게 감정이 담긴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강한 편이죠. 남겨둬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치? 어쩐지. 손에 쥘 때부터 좀 찝찝하더니. 하여튼 문제 일으키는 것들은 꼭 이상한 걸 가지고 다닌다니까.”
우웅.
서걱 서걱 서걱.
우우웅
화르르륵!
건네받은 그것을 론이 바람의 칼날로 쪼갠 뒤 불로 태워버렸다. 재까지 남김없이 소각될 정도로. 그리고 이왕 불을 꺼낸 김에 그의 옷가지들도 전부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 의미를 상실한 목록표도.
남은 시체는 저 멀리 숲속으로 던져 버렸다. 추운 겨울, 인가 가까이 내려오는 짐승과 몬스터들이 알아서 처리해주리라.
‘이제 남은 건.’
유적의 숨겨진 방.
허나 일행들의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오늘 밤 정도는 쉬었다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다음 날 아침, 유적은 고요했다.
겨울이기도 하거니와 모두가 안식을 취하는 이 연말에 굳이 이 변방의 유적을 놀러 올 사람은 없었다.
쩝쩝.
우물우물.
“참···. 이래서 너도나도 용병, 용병하는 거구만.”
육포를 씹고 있던 크루딘이 어제보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요. 이렇게 많은 돈이 생기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번 여행 때 쓴 경비를 제하고도 엄청 남는 금액이긴 하죠. 사티넬이 관리하는 건 어떻습니까?”
“넷? 제, 제가요?”
“예, 우리가 이번 한 번으로 탐방을 안 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루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크으!! 그래 우리 여행은 이제 시작이라고!! 어이, 사티넬 혹시 벌써부터 발을 빼려는 건 아니지?”
론은 사티넬이 필요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나 그녀가 보여준 마법, 그것은 보통 마법사들의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는 엘프의 후손.
딱히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함께 하고 싶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쓰십시오. 이번 싸움에서 사티넬의 몫이 정말 크지 않았습니까.”
“젠장! 내가 맛탱이만 안 갔으면 나도 그놈의 5서클 녀석, 한 방 멕이는 건데. 하아···.”
이른 아침, 어제의 전투를 간단히 설명해줬었다. 마법 파훼로 정신력이 온전치 못했던 사내는 5서클 마법을 펼친 후 이내 얼마 못 버텼다는 얘기.
사티넬이 엘프의 후손이라는 것과 자신이 5서클의 마법을 펼쳤다는 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그리고 크루딘이 조금 걱정되었다. 선천적인 폐병으로 안 그래도 쉽지 않은 환경인데, 친구라고 있는 것들이 저 멀리 앞서 가버린다면 마주해야 할 허탈함이 작지 않을게 뻔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니까.’
“그럼 돈 관리는 사티넬이 하는 것으로 하고, 이제 슬슬 들어가 보죠.”
론 일행이 지금까지 피에타 유적에 죽치고 앉아 있었던 이유, 그리고 어제 아이블 마탑의 마법사가 습격했었던 이유.
그것이 남아있었다.
유적 지하의 숨겨진 방.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론 일행은 곧장 지하로 향했다.
구구구궁.
어젯밤 자기전 확인했을 때 보니 닫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다시 닫히는 듯 했다.
그렇게 론 일행은 이번 탐방의 목적, 피에타 유적의 숨겨진 방에 도착했다.
‘드디어···.’
론의 시야로 들어온 모습은 회귀 전과 똑같았다. 다만 차이가 좀 있다면, 그때엔 비어있는 곳이 이번엔 채워져 있다는 정도.
“와··· 이 맛에 플라델님도 마법 수행을 떠나신 거구나···.”
“······”
“풉!”
확실히 예전의 크루딘으로 돌아온 듯했다.
“저희가 정말 운이 좋은 겁니다.”
“아, 그래?”
“킥킥킥.”
그렇게 일행은 유심히 방 내부를 살폈다.
‘이곳에 반드시··· 아!’
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오랜 유적관리단 경험으로 딱 봐도 귀한게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가 방 저 끝에 보였다.
알 수 없는 인력에 끌리듯 론이 그대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바로 상자를 열었다.
끼이익.
‘하!’
너무 놀라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금과 백금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유리병 하나와 붉은색의 포션 병들. 론이 찾던 그것이었다.
꿀걱.
내부의 있는 것들의 기록이라 해봐야 고대어였기에 물건들 위주로 살펴보던 일행들도 이내 론 곁으로 왔다.
“이거 같은데?”
상당히 모호했지만, 크루딘이 말이 맞았다. 숨겨진 방이 존재한 이유. 과연 엘릭서일지는 복용해봐야 알 일이겠지만 말이다.
론이 고급스러운 유리병을 크루딘에게 넘기고, 테이블에 있는 기록물들을 살폈다. 유적관리단에 있으며 수많은 고대어를 섭렵했었고, 당시 이곳에 남겨진 몇몇 일지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얼마나 뒤적거렸을까.
‘허!...’
과거에는 없던 일지를 찾았다.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감싸진 그것의 안에는 꽤 솔깃할 만한 글들이 있었다.
“와아···. 뭐가 담겼기에 이렇게 병이 고급스러운 걸까요?”
“이것뿐만이 아냐. 이것도 봐봐. 우리 가문도 가끔 포션을 지원해주긴 하는데, 이건 거의 최상급 포션이야.”
지금껏 크루딘은 폐병으로 인해 꽤 많은 치료법을 거쳐왔었는데, 그중에는 당연히 최상급 포션도 있었다.
당시 엄청난 재정적 출혈을 내면서 아버지가 추진했던 일, 아쉽게도 차도는 없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후로 크루딘은 가문 원로들의 눈 밖에 났다. 하지만 덕분에 지금 크루딘은 최상급 포션 정도는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딸각.
크루딘이 포션병을 열고는 그 냄새와 느껴지는 기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결과는 틀림없는 그것이었다.
“대체 누가 이곳을 썼길래···.”
“벨데레르 마탑의 초대 탑주는 희대의 연금술사라 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자들의 방이었을 겁니다.”
고급스런 가죽 일지를 보고 있던 론이 결론을 도출해냈다. 과거처럼 얼마 없는 증거들로 추측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그가 들고 있는 가죽 일지 안에는 볼만한 것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초대 탑주 벨데레르 그리안이 창시한 특급 포션 제작법과 엘릭서에 관한 얘기까지.
엘릭서의 재료 중 일부가 멸종하면서 그 대체재가 필요했는데, 벨데레르 마탑은 초대 탑주의 유산인 엘릭서를 조금씩 써가며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저기 고급스러운 유리병에 담긴 것은 엘릭서가 맞았다.
엘릭서부터 해서 일지도 그렇고 차마 금전적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들.
“일단 가지고 나가죠.”
“네?”
“어?”
“뭐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어···그, 그래도 되려나? 하하.”
말로만 듣던 기연.
허나 크루딘은 왕실 소유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순간 뜨끔했다.
“피에타 유적은 왕실에서 가치 없다 판정하여 5등급이라 매기고 방치한 곳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왕실 법에 의거하여 도굴이 맞긴 했지만 어울려 줄 필요가 없었다.
‘피에타 유적의 숨겨진 방을 발견했다.’
‘아이블 마탑은 흑마법 세력의 시발점이다.’
‘놈들이 고대 유물을 노린다.’
고작 십대의 말들을 듣고 움직일 왕실이 아니다. 그저 챙길 것을 챙기며, 그들의 대계(大計)를 흩뜨리는 게 훨씬 나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하네요. 헤헷.”
“서두르죠.”
“넵!”
“어이어이, 알았다고.”
구구구궁.
아무 일없었다는 듯이 닫히는 방. 언제 또 열릴지 모르겠으나 그때는 이미 중요한 게 다 사라지고 난 다음이다.
‘그러고 보면 회귀 전에는 뭐 싸우기라도 했던 건가?’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이 입구가 거의 반파되다시피 훼손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조사를 나왔던 조사관들은 모두 생각했었다. 유물을 놓고 도굴꾼들 가운데 싸움이 벌어졌었을 거라고.
꽤 타당하긴 했다.
“참··· 정말 감쪽같군.”
뭐 그러거나 말거나 회귀 전은 회귀 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크루딘의 말대로 닫힌 벽은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이를 알아볼 만한 전문가가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론 일행은 유적 지하를 나와 근처 조용한 곳에서 챙겨온 것들을 펼쳤다.
일지들과 엘릭서, 그리고 최상급 포션들.
“어··· 그러니까 이게 이제 우리 꺼라는 건가?”
피식.
확실히 10대이긴 한가보다.
엄청난 보물들 앞에 크루딘은 물론이고 사티넬도 벙찌어 있었다.
“예,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 우리 몫은 챙겨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