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가 마법사의 회귀 - 27
킥킥킥.
이동 중에 사티넬이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유는 크루딘의 표정이 꽤 볼만 했기 때문이다.
‘뭐야, 상행단 승객으로 합류한다는 게 이거였어?’
한창 잘나가는 안데르손 가문의 자식인 만큼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듯했다. 바로 짐마차를 말이다.
거대 상단의 경우 고급 승객 마차를 구비해 운영하지만, 대부분의 상단은 승객들을 짐마차에 태운다. 그리고 애초에 거대 상단은 도시 위주로 거쳐 다니지 변방을 다니진 않는다.
갈 귀족이 있었다면 상단이 아닌 직접 마차를 빌려 이동할 터.
때문에 론 일행은 일정을 고려해 주저 없이 짐마차에 올랐다.
의외로 브뤼센에 이르는 3일간의 여정에 습격은 없었다. 모두가 안심하는 가운데 크루딘만은 투덜댔다. 도적이든 몬스터든 나타났으면 아주 결딴을 냈을 텐데 아쉽다면서.
사실 론 일행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맘때의 브뤼센에는 용병들로 그득하다.
매년 벌이는 몬스터 토벌로 인해 인근 지역에서 칼 좀 쓴다는 용병들은 죄다 몰려든다. 즉 돈 좀 벌어보겠다고 상행단을 찔러 보았다가는 도리어 목이 달아난다는 얘기였다.
아무튼 그렇게 론 일행은 무사히 브뤼센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상단 직원의 말을 뒤로하며 론 일행은 바로 잡화점을 찾아다녔다. 지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론이 회귀 전 피에타 유적에 작업을 하러 갔었다지만, 그것은 전생에서도 무려 50년하고도 더 전의 일이었다.
“흐음. 이게 지··· 도란 얘기지?”
어느새 도착한 잡화점.
잡화점 주인이 건네준 지도에 크루딘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봐 온 지도하고는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지형의 고저 구분, 길, 마을, 산지의 나무 밀도 등 표시된 것들이 전부 모호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지도를 보고도 론이 대충이나마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얼마인가?”
“예, 도련님. 10실버만 주시면 됩니다요.”
흥정이 기본인 상인들이기에 딱히 존대를 안 했건만, 돈 많은 귀족의 자식들이라 생각했던 걸까. 상점 주인은 처음부터 크게 불렀다.
“뭐, 10실버?! 아니 수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지도 제작자가 만들어도 10실버면 충분하겠다. 하!”
“지도 제작자가 누군가?”
“예?”
“누구길래 왕실 지도 제작자 수준의 값어치를 받는지 확인 좀 해야겠어서 말야. 누구한테 받았지?”
웬만하면 대충 사려 했다. 하지만 꼭 도를 넘는 이들이 문제다. 론이 추궁하듯 물었다.
“아니, 그게, 그···.”
“지형 고저 구분은 개나 줘버리고, 길인지 선인지 모를 표시 봐. 어이! 주인장! 지도 제작자란 놈 당장 데리고 와 봐!”
크루딘도 짜증이 났는지 열불을 쏟아냈다.
“저, 저도 이게 오래전에 받은 거라···. 그, 그게 누구였는지···.”
추운 겨울인데도 상점 주인은 당황해 땀을 뻘뻘 흘렸다.
“오래전? 그런데 10실버? 게다가 이 조악한 수준으로?”
“아이고. 그렇죠, 그렇죠! 소인이 상품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 하는데, 아이고, 죄송합니다. 무지한 상인이라···.”
“하아···. 됐고, 얼마 주면 되겠나?”
“사, 삼 실버···.”
“뭐?!”
“아이고!”
크루딘의 호통에 상점 주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은화 하, 하나만···.”
눈치를 보던 상점 주인은 결국 자신은 사들인 구매가를 불렀다.
“쯧···.”
론은 그쯤에서 그만 값을 지불했다.
아까 왕실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맛이 간 상점 주인. 론은 지도를 챙기며 그에게 한 가지 더 물었다.
“브뤼센 영주님이 매년 겨울 몬스터 토벌을 하는 거로 아는데, 일정에 대해 아는 거 있나?”
“예? 아, 예예! 그 용병 길드와 경비대를 통해 매년 모집하고 있습니다요.”
“그렇군. 고맙네.”
“아,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게나.”
“예예, 살펴 가십시오.”
론 일행이 저 멀리 가고 나서야 상점 주인은 그제야 이마를 닦았다. 땀자국으로 튜닉 소매가 흥건하다.
“에그그···.”
요 몇 분 새 상점 주인의 얼굴 핼쑥해졌다.
얼마 전 왕실에 대해 함부로 얘기했던 칸필드란 용병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다들 다른 곳으로 간 것 아니냐며 쉬쉬하긴 했지만, 잡화상점 주인은 알고 있었다.
그 칸필드가 40년째 브뤼센 토박이였음을. 자칭 호사가랍시고 떠들고 다니던 이가 말도 없이 옆 영지 혹은 타지로 갈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끄응···. 등쳐먹는 것도 이제 힘들구먼.”
상점 주인은 흔들의자에 몸을 깊숙이 넣으며 론 일행이 떠난 곳을 바라봤다. 점점 작아지던 그들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론 일행이 향한 곳은 경비대였다.
영주성에서 공고를 두 군데로 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방면의 홍보 목적도 있지만, 정확히는 모집 인원이 달랐다.
아무리 왕실이 귀족과 평민의 경계를 허문다지만, 이곳은 아카데미가 아니다.
때문에 평민을 비롯한 용병들은 용병 길드를 통해 신청하고, 공적을 쌓으려는 귀족들은 경비대를 통해 신청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누가 봐도 당당한 걸음걸이.
귀티 나는 외모.
그리고 그 특유의 분위기에 경비대원들은 자연스레 말을 높였다.
“브뤼센 영주님께서 매년 겨울, 몬스터 토벌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일정이 맞으면 참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잘 맞춰 오셨습니다. 몬스터 토벌 일정은 연초에 열흘 정도씩 합니다. 정확한 날짜로는 눈꽃달 다섯째 날입니다.”
“눈꽃달 5일이면···.”
오늘이 서리달 24일이니 다음 달 5일까지는 약 열흘 정도가 남았다.
“괜찮을까요?”
사티넬이 론과 크루딘을 쳐다봤다.
브뤼센 성에서 피에타 유적까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하루 반나절이다. 7일이면 나쁘지 않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신청하죠.”
론 일행의 결정을 들었는지 설명하던 경비병이 안쪽을 향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직원이 명부를 가지고 나왔다.
“여기에 소속과 이름을 써주시면 됩니다.”
“예.”
론은 앞서 신청한 이들의 양식을 보고 비슷하게 적었다. 소속과 이름만 바꿔서. 크루딘과 사티넬도 차례로 자신의 이름과 서명을 했다.
“아! 마법 아카데미 분들이셨군요!”
“예.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그냥 브뤼센이 최남단이다 보니 아카데미 분들은 말로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그런데 마법사 직군으로 지원하시는 거면 영지 마법사님께서 출발 전에 한 번씩 확인하실 겁니다.”
“확인 말입니까?”
론의 의아한 물음에 경비대 직원이 이어서 설명했다.
“아무래도 마법사가 고급인력이다 보니 인명 피해 발생할 시 저희도 책임이 따라서 말입니다. 모쪼록 불쾌히 생각지 말아 주시고, 안전을 위한 거로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확인은 언제 합니까?”
“출발 당일 담당 마법사님께서 영주님과 같이 나오실 겁니다. 그때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신청을 마치고 나오는 길.
크루딘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크큭···. 들었지? 고급 인력이랜다. 크으···. 내가 좀 고오급 인력이긴 하지.”
“킥킥, 고오급 마법사라서 좋으시겠어요.”
“드디어 내 진가를 알아보는 거지! 하하하! 크으, 이 맛에 마법 수행을 떠나는 건가.”
“···”
론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영주성의 그 마법사님이란 분은 어느 정도 수준이려나.”
크루딘이 평민 지역 가운데 위치한 브뤼센 영주성을 바라 모여 말했다.
같은 남작가 임에도 불구하고 스펜서 영지와는 달리 버젓이 존재하는 영주성. 이는 쌓아 온 부의 규모가 작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뭐 남작가인데도 저리 영주성을 지을 정도면 꽤 괜찮은 수준의 마법사는 있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론 일행은 그대로 동남쪽 출입문으로 빠졌다.
시간은 아직 정오 무렵.
서둘러야 노숙을 줄일 수 있다.
“어서 가죠.”
“론, 근데 그 지도 진짜 믿을 만하긴 한 거지?”
“예, 조악하긴 해도 찾아가는 데 어렵진 않을 겁니다.”
“론님 혹시 전에 피에타 유적 가본 적 있었던 거예요? 엄청 능숙하시네요.”
“음···. 가봤다기보다는 주변 사람들한테서 많이 들었습니다. 유적 탐방을 끼니 먹듯이 하던 지인이 있어서···.”
허술한 지도를 들고도 걱정 하나 없는 론의 태도에 다들 궁금하긴 했을 것이다.
때문에 론은 전생의 기억을 적당히 버무려 대답해 주고는 길 안내를 했다.
유적관리단.
회귀 전 론이 반평생을 몸담았던 왕실 기관이다. 그런데 이 기관의 유래는 사실 마법 아카데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로이드 4세와 아카데미 초대 총장 필리어스는 마법 아카데미 설립을 앞두고 고민을 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마법의 역사 그 자체와도 같은 마탑의 정통에 어떻게 밀리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나 이 역사적인 부분에서는 마탑을 따라갈 수가 없었는데, 그때 내놓은 방안이 고대 유적이었다. 마탑의 기록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유적을 취함으로써 역사적인 명분을 챙기려 했다. 실제로 그리했고.
로이드 4세는 선조의 지혜와 정신을 온전히 계승한다는 취지로 각 지방 영지에 있는 유적들을 하나둘 왕실의 것으로 돌렸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선왕이 양보한 것은 가문의 선산과 유적의 자유로운 출입이 전부였다. 이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왕실이라는 이름 아래 관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외의 의견은 모두 일축했다.
전무후무한 전성기의 아들렌이었기에, 그리고 역사상 다시없을 패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왕국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회귀 전까지 론이 유적관리단에서 근무한 것이 그 근거다.
다만, 그런 론도 감히 생각지는 못했다. 최하위 유적에서 그렇게 큰 사건이 발생하리라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유적들이 계속 발견되면서, 유적관리단은 등급을 매겼다. 상시 특수 관리 대상인 1등급부터 가치성이 미미해 간간이 보수 유지만 신경 쓰는 최하위 5등급까지.
그리고 그중 피에타 유적은 최하위 5등급이었다. 상시 관리 인원 없이 정기적인 보수를 통해 그 존재만을 겨우 존속시키는 정도의 수준 말이다.
그래서 그날도 론은 누가 신고를 했나보다 생각하며 피에타 유적에 갔었다.
선임으로부터 꽤나 들었더랬다.
괜한 오지랖으로 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니 고생 좀 하라는.
그런데 막상 도착한 현장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 봐도 고위 관료로 보이는 마법사들. 그들이 쉴 새 없이 오가며 조사를 벌였다. 론은 그곳에서 보수작업을 하며 들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들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론의 발걸음은 빨라져만 갔다.
노숙은 생애 처음이라는 둥,
이렇게 육포로만 끼니를 채우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둥,
남부 지방은 수도보다 따뜻하다는 둥.
변방의 하늘은 참 맑아서 별들이 잘 보인다는 둥
많은 얘기가 오갔다.
허나 그럴수록 론은 초조했다.
지금껏 귀족의 자제나 마탑의 수련생을 상대할 때와는 수준이 다른 일이다. 그 때문인지 여러 감정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회귀 후 처음 느껴보는 것도 있었다.
바로 두려움.
회귀 전 대항조차 하지 않은 거대한 존재다.
그런데 그들의 대계(大計). 그 커다란 계획의 시작점이라 여겨지는 곳에 이르렀다.
중간에 노숙을 하고, 수풀을 헤치고, 수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론의 머릿속에 남아나지 않았다.
오로지 피에타 유적.
그것만이 론의 머리를 가득 채운 채 그를 이끌 뿐이었다.
“여기···인 건가?”
“그러게요. 책에서 봤던 고대 건물 양식이에요.”
피에타 유적이었다.
곁에서 크루딘과 사티넬이 뭐라 뭐라 얘기했지만, 론에게는 그저 웅성대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도착한 뒤로 론의 눈은 계속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반파되어 그 뼈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유적. 그리고 유적들 사이로 보이는 시커먼 공간.
바로 지하 입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